홍유

洪儒
(? ~ 936)

1 개요

고려 초기의 장수이자 개국공신. 그리고 남양 홍씨 당홍계의 중시조. 원래는 궁예의 밑에서 마군 장군을 지냈고, 왕건과는 궁예 밑에 있을때 만난 것으로 보인다. 장수였지만 말빨이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궁예의 포악으로 복지겸,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궁예를 제거하고 왕건을 추대할 것을 결의한 뒤 왕건에게 찾아가,

"삼한이 분열되고 뭇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지금 임금이 용기를 분발하고 크게 호통침으로써 그만 도적들을 쳐 없애고 요좌(遼左) 지방의 3분의 1에서 그 절반 이상을 점유한 후 나라를 건설하고 도읍을 정한 지도 이미 2기(紀-12년)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끝을 잘 맺지 못하고 포악한 행위가 태심하여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관리(臣僚)들을 죽여 없애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 같이 여기게 되었는바 걸(桀)이나 주(紂)의 죄악도 이 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

라며 거사를 제안했지만 왕건이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홍유가 나서서,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해독을 입은 온나라 백성들이 밤낮으로 그를 전복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 지위 높고 권세 있는 자들도 모두 학살당하여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은 자로서 당신의 위에 설만한 사람은 없는 까닭에 모든 사람들의 뜻이 당신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는 형편인데 만약 당신이 수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왕창근(王昌瑾)의 거울에 나타난 글도 그와 같이 예고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을 위반하고 폭군의 손에 죽겠습니까?"

라며 설득했고, 결정적으로 류씨 부인(후의 신혜왕후 류씨)가 갑옷을 들고 입혀주면서 결국 왕건은 봉기를 결심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왕건을 추대한 공로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유금필과 함께 청주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 자꾸 유금필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930년, 고창으로 왕건이 출전할 때 홍유는 일단 죽령을 점령해서 퇴로를 확보하자고 의견을 냈지만, 유금필은 결사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반대 의견을 내서 왕건이 유금필의 의견을 수용했다.

935년에는 나주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박술희와 함께 지원했지만, 왕건은 홍유가 백성들 마음 얻기는 어렵겠다고 하며 유금필을 보내는 바람에 박술희와 함께 물을 먹고 말았다.

936년, 후백제와의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는 우익의 기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936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단 일리천 전투에서 전사한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 역시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냈는데 왕건의 26번째 왕비가 바로 그의 딸이다.

먼 훗날 공민왕을 시해한 자객중 하나인 홍륜이 그의 후손이다.

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태조 왕건에서는 초반부, 김순식의 휘하 장수로서 등장하였다. 배우는 송용태[1]. 극 중 여타 장수들과는 다르게 언월도를 무기로 쓰며 꽤나 거칠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금필에 가려서 잘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극 중 이 사람의 무력도 배현경과 더불어 상당한 수준으로 나온다. 고려 건국 후 선장 형제의 난에서 임춘길의 부하로 위장하고 적진에 잠입하여 결국 선장 형제 둘 다 멋지게 베어버리기도 하고, 일리천 전투에서는 백제 측에서 나름대로 명장 축에 끼는 김총과 맞붙어 단 몇 합만에 김총의 무기를 날려버린 후 그의 목에 칼을 겨누며 웃기도 한다. 유금필과 맞먹는 무력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수달에게 혼이 난 것[2] 외에는 전투에서 딱히 실책을 저지르거나 패배하는 일 없이 꾸준히 전과를 올리며, 그와 배현경이 나타난 것을 보고 견훤마저도 "저들은 홍유와 배현경이다. 전투에서 많이 봤다. 어허... 이거 일이 점점 꼬이는구나."라며 불안해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력 못지 않게 지략도 뛰어나, 지옥으로 직접 뛰어들어 계략으로 승리를 이끌어내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리고 고려 건국 이후에는 왕건의 지나친 총애를 받는 유금필을 견제하기 시작하며, 고창 전투 이후 왕건이 유금필만 특별히 많이 칭찬할 때 옆에서 배현경과 더불어 못마땅하는 기색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갈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게 없으면 또 드라마가 재미가 떨어진다 또한 조정 회의에서 왕식렴도읍을 옮기자는 말을 꺼냈을 때 유금필이 격렬히 반대하고 이를 본 홍유는 "당장 옮기자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과민 반응이냐"며 유금필을 정면으로 까면서 둘의 갈등이 표면화된다. 물론 이 사건으로 왕식렴도 유금필에게 불만을 품는다.
그 후 평양에서 오랑캐들이 왕건 대신 유금필에게 만세를 외치는 사소한 사건이 발생한다. 왕건은 오랑캐들이 모르고 한 일이라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3] 옆에 있던 왕식렴이 열폭하면서 "감히 신하가 황제 대신 만세를 받을 수 있느냐. 이건 반역죄가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 동안 유금필을 고깝게 여겨왔던 홍유와 배현경도 이 때다 싶어 왕식렴에 가세하여 유금필을 헐뜯고, 고려 조정이 분열될 위기까지 오게 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유금필이 귀양을 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홍유와 왕식렴은 뭔가 일이 자기들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끼고 불안해하게 된다. 자신들은 삭탈관직만 원했지만 왕건이 굳이 유배형이라는 초 강수를 두었으며, 유배 장소가 곡도, 즉 황도 바로 아래라는 점도 매우 이상했다. 왕건(정확히 말하면 최응)이 노린 점이 바로 이것으로, 이 사건을 통해 신료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냄과 동시에 취약지구인 곡도를 보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이후에 백제 신검 의 군대가 고려 황도를 급습하여 실컷 유린하고 곡도로 쳐들어갔다가 유금필에게 대패하게 된다).

유금필이 유배를 떠난 후 왕건은 왕식렴과 홍유를 술자리에 부르고 왠지 배현경은 안 불렀다, 불안한 마음에 잔뜩 얼어있던 두 사람에게 꾸중을 좀 하는가 싶더니 왕건이 갑자기 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 일은 황제인 나의 잘못이 가장 크다"며 용서를 구한다. 이에 홍유와 왕식렴은 폭풍 눈물을 쏟으며 깊이 반성을 하였다. 물론 이 둘은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공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왕건에게 문책을 당하지는 않았고 왕건 역시 무릎을 꿇기 전 "자네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렇게 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잘못을 깊이 뉘우친 그들은 이전과는 정 반대로 유금필의 유배를 풀어줄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청하기 시작하고 유금필과도 화해하면서 이 사건은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긴 하지만 유금필과의 껄끄러웠던 관계가 반영된 작가의 창작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송용태씨는 태조왕건 종영 1년 후 무인시대에서 이소응 역할로 나오는데 이 인물은 잘 알려진 것처럼 수박회에서 젊은 무장인 석린과 붙었다가 실컷 얻어터지고 한뢰에게 뺨을 맞는 등 모욕을 당하면서 무신 정변의 불씨를 당기는 인물이다. 강대한 무력을 선보이던 홍유 장군이 젊은 무장인 석린에게 맞고 문신에게 맞는 안습한 인물로 너프 다운그레이드 당한 모습에 꽤 이질감을 느낀 시청자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1. 참고로 이 배우는 2014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극렴을 맡아 고려와 조선의 개국공신을 모두 연기하게되었다.
  2. 1차 나주 전투 당시 산성에 틀어박혀 있던 수달을 끌어내기 위해 홍유가 수달을 도발한다. 수달은 도발에 말려들긴 했지만, 문제는 수달이 무력에선 이 드라마내 최 상위권이라는 것. 홍유 역시 무력이 상당함에도 수달과의 일기투에서 너무나 쉽게 발리고 데꿀멍을 해야만 했다. 수달이 홍유를 갖고 노느냐고 시간을 끌지만 않았더라면 홍유의 인생은 여기서 끝날뻔했다.
  3. 왕건도 궁예밑에 있을때 똑같은 일을 겪었다. 궁예와 함께 송악을 찾은 외국상인들을 만나게 되었을때 송악성주에게 인사를 올리는 관례가 있었던 상인들은 죄다 왕건에게 달려가 인사하고 선물을 건네 왕건을 당황케 만든다. 궁예도 이 관례에 대해 들은바가 있던터라 관대하게 넘어가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