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1 개요

춘궁기(春窮期)·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한다.
한국기근을 가리키는 말. 이를 고개에 빗대어 보릿고개라 부른 것.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을 추수한 뒤 보리를 심어 2모작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보리가 제대로 맺힐 때까지 딜레이가 좀 길단 건데, 이로 인해 추수한 쌀이 바닥나는 5~6월에는 보리가 제대로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보리를 수확할 수 없었다. 쌀도 없고, 보리도 없기에 사람들은 자연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음식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 내용은 구황작물 참고.

오로지 하늘에 맡겨 농사를 짓던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사를 보면 역병 등이 겹쳐 상황이 더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어 시대가 갈수록 그것에 대비하여 대안 수단은 마련하고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이미 의창, 사창 등을 설치하고 미리 대안책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게 기근이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버티기 어렵고 후기로 가면 관련비리가 많았다는 거지만.

2 원인

보릿고개까지 쌀을 비축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 한반도인들이 밥을 워낙 많이 먹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농담같은 주장도 있다.[1] 하지만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 이게 설득력이 있는게, 옛날 밥상을 보면 밥그릇이 지금의 국 그릇보다도 큰 거대한 사발이다. 국 그릇보다도 더 크다! 생산량이 부족한데 이렇게 쌀을 많이 먹으니 쌀이 남는게 이상하긴 하다.(...) 원인에 관한 논쟁은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 참조. 명성황후의 밥상을 사진 찍어둔걸 것을 봐도, 여성의 밥상인데도 밥그릇이 무식하게 큰걸 볼 수 있다. 절대 돌쇠용(...) 밥그릇 같은게 아니다!!! 이런 한국인의 쌀 식욕(?)은 한국전쟁을 거치고 최종적으로는 분식장려 운동을 거치면서 줄어들었다.그리고 현재는 너무 안먹어서 탈이다. 치킨이라던지 라면이라던지..

그러나 제일 큰 원인은 유통망의 부재다. 괜히 북한이 허구헌날 식량난으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포장도로를 전혀 확보하지 않다보니 물품과 식품들이 풍족한 지역에서 부족한 지역들로 제대로 유통이 잘 되어야 적어도 식량난을 겪지 않는데, 한반도에서 보릿고개가 사라진 시기는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들이 개통되고서 유통망이 갖추어지는 시기에 사라져갔다. 괜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속도로에 투자를 한 게 아니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가령 월급 3일 전이라거나...

일제강점기를 찬양하는 정신나간 일뽕 네티즌들이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보릿고개도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냥 개소리다. 오히려 일본 제국에게 수탈당한 쌀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보릿고개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보리쌀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보리조차 없었으니 보릿고개가 없어진 건 맞다 오죽했으면 가난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만주로 떠났을까 생각을 해보자. 그 당시 신문지상에서도 보릿고개를 맞이해 굶주리고 있는 지역 주민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2] [3]

3 여담

야사에 의하면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눈에 들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영조가 간택령에 뽑혀 모여진 규수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규수들이 저마다 높은 고개 이름을 댈 때 정순왕후 김씨는 "보릿고개야 말로 제일 높은 고개인 줄로 아뢰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방석 위에 여식의 몸으로 앉을 수 없다고 하고, 가장 좋은 꽃은 백성들의 옷이 되는 목화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1. 조선시대의 한끼 식사량은 대략 700g 정도인데 그나마 고려 때의 900g에서 줄어든 게 이거다!
  2. 그러나 현재 드러나는 연구에 의하면 쌀을 수탈했다고 보기보단?? 쌀 생산량이 증가한건 맞는데 그만큼 더 팔아 넘겼기 때문에 물론 그 수익은 친일지주들이 챙겨나간다거나 했다 체감상 수확량은 차이가 거의 안났다는게 중론이다.논리가 안맞는데? 표현이 애매한건 사실 그냥 산미증식계획 문서 참고하시길. 이 문서에 수탈과 수출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설명도 있다
  3. 더군다나 그때는 고구마나 감자같은 대체작물이 존재했었기에 조선시대때 기아수준까지는 아니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