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식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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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그림 '새참'. 그림 속의 맨 가운데 농민이 수저로 퍼먹고 있는 밥그릇의 크기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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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한 조선인의 식사량 (다만 일본인에 의해 연출되었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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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밥그릇 비교사진

1 개요

대한민국은 옛날부터 식신의 나라였다는 주장이 많다.

역사적 근거에 따르면, 현재 쓰는 일반적인 밥그릇의 크기는 350g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690g, 고려 시대에는 1,040g, 고구려 시대에는 무려 1,300g의 밥그릇이 발굴되었다.[1] 근데 그거 보관용이거나 파티용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삼국유사에서 김춘추가 하루에 처묵처묵한 양이 엄청나다.[2]

왕은 하루에 드시길 3말과 9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6말, 술이 6말, 그리고 꿩이 10마리였다.(어째 더 늘었다!)[3] 성 안의 시장 물가는 베 1필에 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하였다. ─ 삼국유사

한민족은 현대인과 같이 을 일반적인 밥으로 먹듯이 곡물을 주식으로 섭취했는데,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쌀밥을 원없이 즐겨 먹는 건 주로 높은 신분에 한정되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귀족 계층은 쌀밥을 먹었지만, 평민들은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많이 보급된 조선 후기에 와서도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의 기록에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적었다. 그나마 수전이 먼저 보급되고 기후 조건상 벼농사가 활성화된 남부 지방은 경제 조건만 되면 쌀밥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거꾸로 돌리면, 경제 사정이 안되어서 쌀이 없으면 잡곡밥을 곁들여 지어 먹어야 했다는 소리다. 헌데 이런 잡곡밥은 먹어도 배가 금방 꺼지는 속성이 있다. 이걸 봤을 때 큰 그릇에다가 엄청난 양의 밥을 먹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소리. 힘이 많이 들어가는 농사 일을 한다면 더더욱.

정리를 하자면 한민족이 옛부터 밥을 많이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다 쌀밥이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현재 먹는 흰쌀은 옛날에 먹던 쌀도 아니었다.[4] 이 말인즉, 옛날 조상들이 대식을 했다는 것을 지금 먹는 하얀 쌀밥이 꾹꾹 담겨진 밥 공기로 환산하면 오류라는 소리다.

또한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주식도 곡물이었기에 탄수화물 섭취는 그럭저럭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다른 영양소에 비해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다. 필수 단백질 섭취를 엄청난 양의 곡물로 때운 거냐 이는 복날에 고기를 구할 수 없으면 를 즐겨 잡아먹었다든가, 고기 음식 중에 내장을 비롯해 버리는 부위가 없을 정도임을 근거로 삼는데, 실제로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당장 유럽 국가들에도 개고기 요리가 있고, 유목민족 출신이었던 게르만족에서 소시지가 나왔다. 단백질 섭취량 부족설을 요약하자면 조선에서는 고기가 모자라니 채소나 나물 외에 밥이라도 한 가득 담아놓고 먹었다는 소리인데, 과거 한반도의 단백질 부족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조선시대에 대식하는 식사 사진에서 유독 밥은 어마어마한 데 비해 반찬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유일한 근거로 삼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일단 쌀을 많이 먹는 것은 확실하지만, 고기까지 많이 먹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통해 제대로된 근거는 대지 못하겠지만 조선 사람들이 과연 잘 살았을 리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튀어나온 근거 없는 주장이다. 3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생선과 같이 충분한 단백질 대체제도 있었으며, 만약 단백질 섭취량이 부족해서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쪽에서 정당한 역사 기록을 찾거나 명시적인 증거를 찾아서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오히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다산 정약용의 글, 박제가의 북학의만 봐도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라며(출처) 차라리 먹으려면 소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 중국인들처럼 돼지도 먹고 도 먹으라는 말도 있었던 데다가, 개와 생선만 해도 복날에만 먹은 게 아니라 18세기 술집에서 술안주로 가장 인기 있었던 음식이 생선 요리와 개장국이었으며 일반적인 술집 손님의 대부분은 서민이었다(출처). 즉,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다는 주장은 실제 역사 기록들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옆 나라 일본 같은 경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농민은 죽지도 살지도 않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7공 3민, 세금 70%의 가혹한 지배에 육식 금지령으로 서민들은 고기를 거의 못 먹었다는 점과 쌀조차도 충분히 못 먹었다는 점, 육식 금지령에다가 대식을 하기는커녕 소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영양학적으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봐도 단백질이 부족해서 대신 탄수화물을 대량으로 섭취했다는 말은 낭설이다.

결론적으로 한민족, 우리가 정확하게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조선 사람들이 대식을 한 것은 사실이고, 역사 기록과 유골 분석으로 동시대 다른 나라사람들과의 신장을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조선 시대 서민들조차도 동시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단백질 섭취량이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시대 서구와 비교하자면 우유를 먹지 않았으며, 동시대의 중국과 비교했을 때 양과 돼지는 아예 먹지 않아서 주로 개와 생선으로 단백질을 섭취했으며, 소 같은 경우에도 워낙 귀중한 동물이라 조선시대에 금지령도 몇 번 내려졌음에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굉장히 많이 먹었던 편이다.

1.1 한민족이 대식을 했다는 근거

어찌됐든 한민족이 대식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면 아주 많다.



  1.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사실 점심이란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중국어로, 우리가 흔히 쓰는 딤섬이 바로 점심이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아침과 저녁 2끼만 먹기가 평상시의 식습관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사람들은 하루 2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3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이었다. 그러나 말이 하루 2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3~4명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다만 이 복숭아는 현재의 개량된, 과육이 많은 복숭아와는 거리가 먼 야생 복숭아일 것이다.)
  2.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낸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을 마신다'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3.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인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입니다'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4.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에 힘쓰는 건 으뜸이다. 일본(유구국 - 지금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며 비웃었다."이라 기록했다.
  5. 임진왜란 때 기록한 <쇄미록>이란 책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을 설명했다. 쇄미록에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었는데, 이것은 현재 먹는 1공기의 5배인 양이다.[5]
  6.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것과 관련한 비화가 있었는데,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량을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하니 1달치 정도였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1달만 버티면 왜군들이 물러가리라 생각했는데 고니시 부대의 식사량을 본 밀정이 왜군들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정도임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왜군들이 승리를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다고 생각했다고.그리고 조정의 예측은 아주 먼 훗날에 와서 적중한다 카더라
  7.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6]의 이야기.[7]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 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1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1인 1닭은 요새도 자주 하지 않나[8]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인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8. 21세기에 와서도 한국인은 연예게를 중심으로 세계구급 식신을 끊임없이 배출하고 있다. 정준하, 김준현, 유민상, 김민경, 문세윤 등등...

2 결론

여기까지 봤으면 알겠지만 이래저래 반론이 있어도 대체적으로 한민족이 많이 먹은 모양이다.

한국의 역사가 못 먹고 굶주린 가난의 역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6.25 전쟁, 1960년대까지의 배고팠던 시기가 맞물려 생겨난 잘못된 인식이라는 주장이며, 실제로는 앞에서 열거한 대로 잘먹고 잘 살았다라는 주장이 요즘 대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역대 한반도 국가들을 먹을 게 넘치는 프랑스 같은 선진국으로 생각하면 좀 위험한 듯하다. 현재 인터넷의 근거 자료들 중에는 단순히 흥미를 돋우거나 시선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성향의 것들이 대다수이니, 보다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 당장 사람들이 알던 옛날 백성들의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주장은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일단 생물학적으로 한민족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나 동일한 인간인데, 타고난 식욕 자체가 차이가 난다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식욕 자체가 큰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9] 이는 학술적 논쟁에서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떡밥은 한민족이 경제적으로(특히 식생활에서) 풍족한 편이었는가, 아니었는가에 대한 경제사적 논쟁으로 바뀔 것이다. 다만 일본의 소식문화가 환경에서 비롯된 것처럼, 한국도 환경적이나 여타 다른 요소 때문에 대식문화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걸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인이 야만스럽고 무절제한 민족이라고 까기도 하는데, 배부르게 먹은 게 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조선 관료들이 대식을 깐 거야 나라 세금이 안 걷히기 때문이고 가톨릭은 탐욕과 과식을 금기시 하는 종교다. 당연히 선교사들 입장에선 야만스럽게 여길 수 밖에...게다가 가톨릭에서 절식을 권장하는 이유는 발상지인 지중해권이 그리 풍족하지 못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이 무절제하게 과식하다 나라 망했다고 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으며 환경적 요인에 따른 생활습관의 정착에 따라 대식문화가 정착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 다만 다른 시대는 그렇다 치고라도 고구려그릇 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당시의 농업 기술력이나 고구려의 영토 위치나 기후 상으로, 을 그렇게 먹을 만큼 생산력이 따라주었는지가 문제이다. 실제 그 그릇으로 쌀을 먹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백성이 그렇게 먹었다고 보면 단순 계산으로도 못 나올 일이다. 인터넷 상에 위와 같은 밥 그릇의 신문 기사가 나온 뒤에 고구려인들은 밥심이 대단했다고 여기저기 퍼지는데, 저런 밥그릇 하나 나왔다고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게다가 쌀을 그렇게 먹었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왜? 보리로 밥 지어먹었을 수도 있잖아?
  2. 뒷날의 사례를 보면 그만큼 많이 남겼을지도 모른다. 윗사람이 남겨서 아랫사람이 그것을 나누어 먹는 것은 덕을 베푸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뒤에 물가와 태평성대 이야기가 이어지는 걸 보면 더욱 그런 듯하다. 이완용 항목 일부와 한국 근현대사 산책 참조.
  3. 때문에 앞의 기록을 '1끼'에 쌀 3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거다.
  4. 흔히 '백미'라 부르는 흰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에 완전 정착했다.
  5. 이 기록을 두고도 말이 많다. 일단 현대 상식으로는 1끼에 밥 5그릇은 상상이 안 가기 때문에.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먹는 흰 쌀밥 1공기와 당시의 밥을 같이 보면 곤란하다. 인터넷 상에 앞에 명시한 쇄미록의 인용 부분에서는 쌀이라고 명시했지만 다 똑같이 붙여넣기한 글이 돌아다닐 뿐이고, 실제 쌀인지 잡곡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덧붙여 모내기가 보급된 시기라든가 당시의 정황을 볼 때 일반 백성이 1끼에 쌀을 저렇게 먹을 만했는지도 의문. 게다가 홉의 단위가 지금과 다르지 않냐는 의문 제기도 있다. 근데 실제로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지금 홉의 약 1/3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의 한 홉은 약 60ml, 지금의 한 홉은 대략 180ml인데, 지금 쓰는 홉은 1902년 일본의 것에 맞추어 개정된 단위인 것. 따라서 지금 한 공기인 290ml에 비교해 볼 때 당시의 7홉은 약 420ml로, 확실히 많은 양이긴 하나 5-6배에 달하는 양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6.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1866년 병인박해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7.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Notes pour l`introduction a l`histoire de Coree, Daveluy, 1818-1866)>. 당시의 외국인 관점이라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자기네들 주관에 치우친 편견 가득한 기록일 수 있음도 고려하자.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그들만의 주관에 따른 편견과 과장으로 범벅되어 조선을 이상한 나라로 치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8. 우리가 먹는 치킨은 고기가 연한 영계다. 옛날에 먹던 닭은 지금으로 치면 노계로서 몸집이 훨씬 크다.
  9. 사실 리그베다 위키나무위키에서 퍼뜨린 썰 중에 하나이다. 다른 하나의 예를 들자면 영국 요리 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