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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퍼지데이 실사판[1]
복수법이란 고려시대에 실존했던 법으로, 말 그대로 복수를 허용하는 법이다. 고려 제 5대왕인 경종이 제정했던 법으로, 당시 고려를 복수의 피바람으로 만들었다. 병크의 끝장이자 고려 시대의 흑역사 중 하나이지만, 국가차원에서 사적제재를 허용하거나 방치하면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기도 하다.
2 배경
이 법이 제정된 배경은 고려를 탄생시킨 왕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을 하여 가족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왕비가 수십명 단위가 될 정도로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거기에 비례하여 왕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태어나게 된다. 당연히 뒤에서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고, 개경은 왕건이 사망한 후, 끝이 없어 보이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광종이 즉위한 이후, 왕권에 항상 위협이 되던 호족세력들의 권력과 재산(구체적으론 노비들)을 분산, 소멸시켰으며, 반발하는 호족들은 무차별적인 사냥숙청을 통해 후일 나라가 분열되는 정권다툼의 씨앗들을 정리하게 된다. 호족들은 이러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음에는 뭉쳤을지 몰라도 나중에 가서는 서로를 모함하고 왕 앞에서 최대한 비위를 맞추는 등,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였다. 그러나 이 숙청 전에서 살아남지 못한 호족들은 몰락했고, 그 후손들은 고려라는 왕국과 자신들을 모함했던 호족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가득찬 고려사회에 광종은 공포정치를 통해 그 불만을 억눌렀으나, 광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게 되자 상황이 바뀌게 된다. 경종 또한 선왕의 공포정치로 자주 목숨의 위협을 느꼈었기 때문에 호족들을 동정하였고, 즉위하자마자 광종의 탄압으로 쥐죽은 듯 살아가던 구세력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물론 일반 형사 범죄자가 아닌 정치범에 한해서긴 했지만 유배갔던 사람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고 갇혀있던 사람들도 모두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이 안 차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중 한 명인 왕선(王詵)과 그 세력이 경종에게 선대에 입은 조상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복수를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게 되는데, 경종은 호족들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헬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 망했어요
3 복수법의 광기
물론 경종 본인이야 진짜 피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도입했을 것이다. 광종 대의 숙청으로 피붙이를 잃거나 온 가족이 몰살당한 사례는 너무 많아서 멀쩡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였고 이중에는 억울한 이들도 다수 있었기에 복수를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심지어 경종 자신도 광종의 의심을 받아서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적도 있었으니 선왕의 법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의도는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복수법은 왕의 허가에 따라 시행되었고, 그 결과 서기 975년은 호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복수의 범위 또한 지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때려 죽여도 복수라고 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정신나간 상황으로 치닫는다. 또한 원한만 있다면 OK라는 모호한 기준 때문에 복수를 빙자한 살인까지 벌어졌다. 당연한 일인 게, 상대와 싸우다가 주먹으로 얻어맞기만 했어도, 집안의 재산을 조금 털리기만 했어도 사형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극으로 인해 여러곳에서 함부로 사람을 살해하는 일이 많았으며, 그 정도 또한 점점 심해져만 갔다. 호족들의 복수전은 약 1년간 지속되었다가 점차 가열되면서 급기야 976년에는 집정(재상) 왕선이 복수를 빙자하여 태조(왕건)의 아들인 천안부원군(효성태자)과 원녕태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 물론 합당한 복수였다면 모르지만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복수를 빙자해 저지른 살인극에 불과했다.
사건이 이에 미치자 경종은 그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고 왕선을 파직시켜 귀양보냈으며, 복수법도 즉각 없애버렸다. 또한 이 시기 복수의 광기를 허용한 것에 대한 회한과 인간 혐오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한 채 향락에 빠져풍악을 울려라 살다가 981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 뒤에도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경종의 복수법을 대놓고 비판하면서 까였다.
조상들도 이런 사적 복수를 법으로 허용한 시대가 있었다는 걸 매우 부끄럽게 여겨던지 그 시대에 공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호족들부터 일반 백성까지 전국적으로 자행된 광기의 복수극을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건 확실하다.
4 비슷한 사례
비슷한 사례로 알바니아에서 공산체제가 붕괴된 뒤 카눈이 법의 역할을 하면서 복수극이 횡행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바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동네에서 한 번 피해를 입은 사람의 복수가 이뤄지면 그걸로 원한관계를 청산하는 게 아니라 또 남은 가족이 다시 복수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인 같은 중범죄의 피해가 아니라 단순히 얻어맞은 것만으로도 죽여야 할 원한 운운할 정도로 지나치니 더 문제.
물론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고 발각되면 엄벌이 기다리고 있지만 애시당초 사회 분위기 자체가 그런 판에 먹힐 턱이 없다. 현재도 수많은 복수가 이뤄지고, 수많은 복수범이 교도소 행 열차를 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