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침조약

불가침조약 Treaty of Nonaggression, 不可侵條約

국가가 상호간에 독립을 존중하여 무력공격을 하지 않을 것을 약정하는 조약.

1 역사

베스트팔렌 조약이후 여러 조약들이 나왔지만, 국가와 국가간의 협정은 거의 3가지로만 나타났다. 예를 들어 가령 조약 맺는 나라를 A, B라고 한다면

'B야 우리 동맹 맺어서 C 공격하자.' (동맹협정)

'B야 C가 나에게 공격하면, 우리 A에게 물자좀 주고 C에게는 안주는 방향으로 하면 안되냐? 대신 너도 다른 애들에게 공격받으면 도와줄께' (상호원조협정)
'야 B야, 이제 그만 싸우자.' (휴전협정)

정도로만 나타났다. 그 이유는

1. 일단 강자와 약자가 뚜렷했다. -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 삼키는 시대로써, 국가에게 아군 아니면, 적국밖에 없던 시기였다.

2. 조약을 확인하고 조정할 국제기구가 없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이 등장할 때 까지 이러한 국가간의 협정을 감시할 국제기구가 없었다.
3. 무엇보다 강대국끼리의 전쟁을 하는 것 보다, 비어있는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지, 그 이익이 상충되지 않는다면, 상대방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1]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무너진다. 1차 대전의 시발점은 사라예보 사건이지만, 그 뿌리에는 식민지 자체는 먹을 수 있는 만큼 다 먹어서 더 이상 식민지가 없는데, 식민지를 풍족하게 차지하지 못했던 국가이미 풍족하게 차지한 국가간의 갈등이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은 그 갈등의 대가를 피로 치뤘다.

재발방지책이 필요하다 생각한 국가들은, 베르사유 조약 이후에도 '비록 자신들의 이득과는 상충되지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잠재적 적대국과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는 안전보장 수단' 을 만들어야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불가침조약이다. 그래서 불가침조약은 1920~30년대 시작되었고, 그 즈음에 약소국들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하였다.

2 한계

다만, 한계 역시 뚜렷해서 불가침조약 자체가 국가들간에 개별적으로 체결되기 때문에, 국가간 혹은 국가 사이에 중재를 하는 국제기구가 불가침조약 내용 위반에 대해서 효과적인 제재를 갖추지 못한 것한다면, 정세 변화에 따라서 파기되기도 쉬웠다.

이러한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된 계기는, 한 국가의 주권이 침범받는데, 당시 가장 큰 국제기구의 상임이사국이자 그 국가의 동맹국이라는 국가들이 도리어 주권을 침범하려는 국가에게 힘을 실어주고 영토까지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끼친 영향은 국가간의 조정을 해야할 국제기구가 제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불가침조약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 이후로 누구자기시대의 평화를 확보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국가들간의 이합집산새로운 판짜기를 통해 탄생한, 다시는 일어나선 안되는 피바람이었다.

3 불가침조약 목록

  1. 그래서 위의 3가지 협정 형태와 다르게 나타난 것도 파쇼다 사건 이후에, 맺어진 영프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