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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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범 가브릴로 프린치프(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1894년 6월 25일 ~ 1918년 4월 28일)의 사진. 얼굴을 보면 상처투성이인데 붙잡힌 직후 너무 많이 맞아서다. 이후 감옥에서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수없이 폭행을 당했다. 참고로 19살에 찍은 사진이다. 엄청난 노안이다. 아마도 콧수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만. [1]

1 개요

"작금(昨今)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오토 폰 비스마르크[2]

영어 : 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of Austria[3]
스페인어 : Atentado de Sarajevo[4]
일본어 : サラエボ事件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황태자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라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대학생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동료 5명이 같이 참여)에게 보스니아의 주도로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일본에서 サラエボ事件이라고 부르는 것이 번역되어 한국에 자리 잡은 것.

이 사건으로 인해, 전세계를 국가 단위의 패싸움으로 얼룩지게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한 명이 몇천만명을 죽였다[5] 즉, 20세기의 요란한 시작.

2 배경

오스만 제국이 1878년 독일과의 베를린 조약으로 후퇴하며 세르비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이 떨어져 나갔고, 세르비아가 독립한 반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세르비아는 때마침 민족주의 열기가 꽃피기 시작했고, 그 열기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에게 전달해주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년 6월 25일 ~ 1918년 4월 28일)는 세르비아계의 가난한 우편부의 아들로 보스니아의 시골인 오블랴이(Obljaj)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사라예보로 온 프린치프는 남슬라브 민족주의 운동[6]인 '젊은 보스니아'의 운동에 참여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학업을 지속하려 했던 그는 "통합 아니면 죽음!"을 이야기했던 '검은 손'에 가입하였다.

한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0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다난한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당시 관점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을 제창했다. 제국 내의 각 민족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연방제 형태였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국방,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인 이중국가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이를 각 민족 단위로 확대하는 안이었다. 이는 독일계와 헝가리계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국내에서 특히 헝가리계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지만, 슬라브계 소수 민족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있는 남슬라브계를 규합하여 자국으로 포함하기를 원했던 세르비아 왕국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슬라브계가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당시 프란츠-요제프 황제가 고령이었기 때문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을 1914년 6월 28일로 잡은 것이었다. 이 날은 사라예보 인들에게 치욕인 동시에 영광의 날로 1389년 암셀펠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터키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도브난'(성 비투스의 날) 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르비아 사람들의 가슴깊이 기억하고 있는 날을 고른 것이다(...).[7]

또한 이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인 조피와 굳이 동행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하였다. 왕족 출신이 아니었던[8] 조피는 엄격한 귀천상혼 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공식석상에서는 황태자와 마주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다. 프란츠는 이런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조피와 함께 행사에 참석을 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젊은 보스니아'는 감정이 폭발했다. 결국 이 때를 노려 그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검은 손 역시 그들의 공작을 도와주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은 또 황태자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함정은 민족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 구역을 분할한 연방국가로 만들려 한, 즉 독일계와 황실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발상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는 것이다(...). 아래 항목을 보면 알법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무한한 자비심(...)을 보이는 등 페르디난트 대공은 굉장히 대인배였다.

3 경과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태자비 조피는 9시 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 이후 황태자는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Oskar Potiorek) 보스니아 총독과 함께 카운터 해리치 중위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랐다. 한편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 검은 손 단원들도 권총수류탄 그리고 자살용 청산가리를 챙겨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황태자 부부가 아펠 강둑[9]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단원은 갑자기 겁이 나서 암살을 시도하지 못했다. 이후 10시 10분경 두 번째 단원인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가 이 기어코 수류탄을 던졌지만 다행이 차를 맞고 튕겨나가서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10] 이 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쳤다. 이 후 시청에서 황태자는 이 암살시도를 두고 Fehim Čurčić 사라예보 시장에게 폭탄으로 환영받았다고 분노했지만 아내 조피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이후 영접행사가 끝나고 그와 동승했던 포티오레크 총독은 빨리 군사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페르디난트 대공이 폭탄테러로 다친 수행원의 위문을 위해서 그들이 입원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프란츠는 이를 강행했는데 아마 암살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을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도는 좋았지만 이것이 프란츠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사라예보 시청에서, 황태자 부부가 암살 몇분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

결국 포티오레크 장군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기로 했지만 정작 운전기사 해리치 중위에게는 지름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예정된 길로 갔고, 포티오레크 장군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운전기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길이 V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밀랴츠카(Miljacka) 강의 라틴 다리에서는 반드시 서행을 해야 했고, 후진을 하던 차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암살에 아무런 참여도 못하고 있던(...) 프린치프가 하필 모리츠 쉴러(Moritz Schiller) 카페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황태자 부부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지나갔다.

결국, 이 기회를 노려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준비해뒀던 FN M1910 자동권총을 꺼내서 자동차 앞에 뛰어들며 황태자 부부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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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시 사용된 FN M1910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Heeresgeschichtliche 박물관에 있다

첫 번째 총알은 황태자를, 두 번째 총알은 그의 부인인 조피를 맞췄다. 더더욱 운이 없었던 사실은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380ACP를 막을 수 있는 실크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고, 실제로 1901년에 이미 알폰소 13세의 목숨을 살렸던 방탄조끼였지만, 문제는 총탄은 방탄조끼가 아니라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명중해 경동맥을 끊어버렸다(...). 암살직후 황태자부부는 시청으로 옮겨졌다. 당시 운전기사 카운터 해리치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츠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Sopherl! Sopherl! Stirb nicht! Bleib' am Leben für unsere Kinder!(조피, 조피 죽으면 안되오 아이들을 위해 살아주시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피는 시청에서 숨을 거두었고 프란츠도 몇분뒤에 숨을 거두었다.

사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조피가 아닌 동승했던 보스니아 총독인 오스카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1853 ~ 1933) 장군을 암살할 생각이었기에 조피의 죽음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했다. 겨우 목숨을 구한 포티오레크 장군은 황태자 내외 암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계속 괴로워했고, 이후 술에 의존하다가 1차 대전 패배 이후 보스니아 총독 및 군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남은 삶을 마무리하였다.

3.1 우연의 연속

원체 극적인 사건이었고 정말로 우연의 연속이라 할 만한 사건이라 갖가지 역사적 가정(假定)이 가능하다. 당장 사건당일에도 암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분기점이 5가지가 있었다.

  • 만약 프란츠 황태자가 문병가지 않았다면?
  • 운전기사가 샛길로 가지 않았다면?
  •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들어 후진하지 않았다면?
  • 프린치프가 카페 안에 없었다면?
  • 프란츠 황태자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면?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 5가지의 우연이 완벽하게 겹쳐져서 만들어진 사건 특성상, 만약 이 5가지의 우연들이 단 하나라도 겹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에는 이미 방탄조끼가 등장했던 시기였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높으신 분들답게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발의 총탄은 방탄복을 절묘하게 피해서 급소에 박히고 말았다![11]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려고 모인 단원은 7명이었는데, 그 중 단 두 명만이 시도했고, 한 명이 성공시켰다. 그 한 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최후 위치. 한 마디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실패했더라면 그냥 그 날 황태자는 무사하게 살았을 것이고, 어쩌면 1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더라도 늦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살 성공에 대해서도 황태자에겐 이보다 재수가 없을 수 없던 것이, 처음으로 암살을 시도한 네델코 차브리노비치(Недељко Чабриновић)가 투척한 폭탄에 피해를 입은 수행자 에리크 폰 메리치 중령을 보려고 암살 시도 후 진로를 바꿔[12] 병원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이걸 기사에게 이야기 안했다! 때문에 갈림길에서 지나쳐 버린 기사는 후진했는데 마침 후진한 곳이 바로 프린치프 정면(...).

역사가 존 키건은 제1차 세계 대전불필요한 전쟁으로 규정했을 정도다. 물론 존 키건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는 적지만, 신두병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는 "사라예보 사건이 세계대전까지 유발할 이유는 없었다."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대해서 "과도하게 팽창되어 있던 유럽 자체"가 원인이라 이는 조만간 언제든지 터질 문제였고, 사라예보 사건은 단지 계기였을 뿐이라는 해석을 펼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13]

  • 다만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라면 다른 문제로 참전할려 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친독일 성향이긴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달리 황권에 제약이 있었고(영국보다는 왕권이 강하긴 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발언권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강하긴 해도 그도 많이 늙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외에 후계자가 없었기에 황태자의 발언권 역시도 무시할순 없다. 만약 사라예보 사건이 아닌 다른 쪽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면 오스트리아의 운명이 많이 달라졌을수도 있다.

4 결과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

당장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그 자리에서 수행원에게 붙잡혀서 그야말로 완전히 초주검이 되도록 복날 개 패듯이 구타를 당한 뒤 군 영창으로 보내졌고, 이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한편 세르비아 정부는 자국내 검은 손을 숙청, 암살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 및 기타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암살 피해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와 검은 손의 관계를 알고는 세르비아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으며, 한달뒤인 1914년 7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최후통첩을 보내고 48시간안에 답장하라고 요청했다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가 요구한 직접적인 내정 간섭 및 조사 허용을 거부했고,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침공하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권총 하나와 총알 두발은 유럽열강들을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처넣었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유럽 들판의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다만, 전쟁 선포에 한 달이나 걸린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린 탓이었는데 그 바람에 다른 나라들도 머리를 식히고 정치적으로 저울질을 한 끝에 참전을 선택해서 줄줄이 말려들어가고 말았다. 만약 빡친 오스트리아가 암살사건이 터지고 곧바로, 길어봐야 1주일 정도 이내에 독일이 돕건말건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면 러시아고 프랑스고 개입하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 1:1 매치로 그냥 전쟁이 끝났으리라는 관측도 있다. 자기 나라 황위계승자가 암살당해서 빡쳤는데 그걸 가지고 똑같은 군주국인 러시아가 막아선다면 자기가 똑같은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지라...그런데 오스트리아가 시간을 너무 끌어버렸다.

사건의 주역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의 수백만 명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죽어간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동안에 교도소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물론, 오스트리아 정부도 가브릴로를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법으로는 만 20세가 넘어야 사형을 선고, 집행할 수 있었는데 가브릴로는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라서 미성년자인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 사유를 적용,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물론, 감옥에서 호강한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폭력 속에서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지냈다. 그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얼굴에 상처투성이인데 붙잡힌 직후 교도소에 갇혀있던 죄수들에게도 복날 개 패듯이 얻어터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도소 안에서조차, 심지어 같은 세르비아 출신 재소자들에게도 그는 영웅으로 대접받지도 못했는데 그가 죽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나쁜 사람도 아니었던 데다가, 나중에 세르비아의 자치라든지 되레 관대한 정책을 생각해오던 게 드러났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은 "저 쓰레기 같은 새끼가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전쟁이 터지고 세르비아인들을 다 죽어나가게 했다."라면서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를 영웅으로 기리던 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 뿐이었으나, 그들조차도 1차 대전으로 인해 전쟁터에서 수없이 죽어나가는 세르비아인들을 보고는 경악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 자신들도 전쟁터로 끌려가서 총알받이 신세가 되어 친구들과 가족들이 싹 죽어나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당연히 처음에는 악인을 처단했을 뿐이라며 당당했다고 한다.[14] 가브릴로는 교도관들에게 이 전쟁으로 세르비아인도 많이 죽었다는 말을 비웃음과 같이 "결국 네놈도 네 동족을 마구 죽이게 한 셈이지."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나, 정작 본인은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며, 나는 단지 그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에 교도관들이 비웃으며 "그래서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죄책감은 전혀 없느냐?"라는 비아냥에는 멈칫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원래 폐결핵이 있었던 가브릴로는 전쟁이 끝나가던 1918년 무렵에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고작 24살 생일을 석 달 앞두고 사망했다. 물론, 사람 취급을 안했던 탓에 교도소에서 일부러 치료도 해주지 않았으며, 식사도 개판으로 제공해서 그냥 천천히 죽어가도록 방치한 것이었다.[15]

그리고 가브릴로 말고도 다른 공범 4명이 더 있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증언에 따라 주동자들이 하나 둘 체포되면서 재판으로 넘겨졌는데, 이들 역시 암살 계획에만 가담했고 피살자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징역만 선고받았다. 애당초 암살을 저지른 프린치프가 사형이 아닌 판국에 이들을 처형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도 가브릴로처럼 1916년 교도소 안에서 21살 나이로 병사했으며 , 다른 3명도 교도소에서 지내야했다. 그 가운데 1명인 바소 추브릴로비치는 1930년까지 16년동안 복역 후 출소한 뒤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유고연방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유고슬라비아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농업장관과 삼림장관까지 지냈다. 그 후 60년이나 더 살면서 1990년 93살에 병사하면서 범인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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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 사건 장소에 있던 명판의 모습이다. 사진은 1987년에 촬영되었다. 명판의 내용은 「1914년 6월 28일 이곳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격으로 폭군에 대한 인민의 항쟁과 수세기에 걸친 우리 인민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었다.」이다. 프린치프가 황태자를 저격할 때의 발자국 모습까지 본을 떠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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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명판과 발자국은 보스니아 내전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파괴되고, 지금은 새 명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키릴문자 대신 라틴문자로 바뀌었으며, 명판의 서술도 중립적으로 바뀌었다.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에서도 짧게 지나가듯이 등장하는 사건이다.

20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주범 프린치프를 영웅으로 기리는 쪽도 있지만, 보스니아 쪽에선 단순한 테러범으로 비하하는 인식도 있는 듯하다.기사 기념식의 일환으로 이 날 암살 대상이었던 황태자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초빙되어 암살 장소 근처에 있는 사라예보 국립 도서관 로비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2015년 5월에 소니 클래시컬에서 DVD로 발매될 예정이다.관련 사이트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심문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경찰관은 공교롭게도 세르비아계였다고 한다.
  1. 사실 저렇게 맞은 사람은 당연히 훨씬 노안으로 보인다. 얼굴 여기저기가 붓기 때문.
  2.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작 본인은 이 바보짓의 아주 간접적인 계기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죽을 때 까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바보짓을 제외한 직접적인 계기는 또 따로 있었지만...
  3. 영문위키의 사라예보 사건 항목명이다. 번역하자면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사건.
  4. 사라예보의 총격
  5. 물론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적절한 명분이 생겼다면 '큰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이 사건으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6. 당시 유럽엔 범슬라브주의나 범게르만주의 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당시 범슬라브주의 역시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국가의 연방 국가를 기획하는 운동, 하나는 러시아 중심의 슬라브 통일 민족을 만드는 운동.
  7. 노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개편해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권 분할을 위해 헝가리 쪽 인사들과 씨름 중이었으니까(당연히 이 계획은 세르비아계 주민에겐 큰 호재였다. 하지만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한 점에서 아이러니). 결국 결과가 정말 안습하기 그지없었지만.
  8. 조피도 명색이 백작 가문의 여식이었지만, 오스트리아 황실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풍토가 강해서 이조차 특이한 사례였다.
  9. Appel quay, 아펠 키로 발음된다.
  10.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는데, 단순히 폭탄을 알아채고 가속하여 빗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 설과 황태자가 폭탄을 도로 던져(?!) 무사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11. 심지어 한 발은 머리에 맞았다는 얘기까지 있다!
  12. 황태자를 수행하던 포티오레크는 이미 암살시도가 벌어졌으니 빨리 오스트리아군 주둔지로 몸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문병을 가겠다는 황태자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황태자가 멍청했다기 보다는, 위의 일화들을 볼 때 지나칠 정도로 대인배인 성품이 작용한 듯 하다..
  13.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이 "과도하게 팽창된 유럽"의 근본적인 원인 되는 엠스 전보 사건보불전쟁으로 새로 등장한 독일 제국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14. 현대에도 그는 유럽에서 신념형 범죄자로 분류되어 있다.
  15. 다만 이때는 순무의 겨울이라 불릴정도로 국민들이 식료품도 모자라던 시절이라 어쩔수 없이 방치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