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세기 말인 1898년 7월 10일, 프랑스 육군 원정대가 북아프리카 수단 남부 파쇼다(Fashoda: 오늘날 남수단의 코도크 Kodok)에 자국 깃발을 게양하여 대영제국 육군과 충돌한 사건.
2 배경
흔히 이것은 '영국의 종단 정책(케이프 타운-카이로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충돌'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의 육상 종단이 가능해진 것은 독일의 식민지였던 지금의 탄자니아를 획득한 1919년 이후이며 남아프리카 이북은 그닥 쓸모도 없었던 만큼 파쇼다 사건을 그러한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의 "횡단 정책"의 압력이 떨어지던 와중에 "수단 남하 정책"의 필요성이 높아지던 영국이 서로 공조하지 못했던 해프닝성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당시 영국에게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이집트와 인도(인도 제국)를 잇는 항로였다. 두 국가는 식민지화되기 이전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국가였고, 무엇보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와 약소 국가들에게 수출하던 면화 산업의 경쟁 국가였다. 따라서 두 국가를 점령하고 효율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영국에게는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 장악해야 하는 것이 홍해 지역의 항로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홍해 주변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수단에도 힘을 써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게 수단은 어디까지나 주된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점진적으로 지배하며 대충 허수아비 체제로 수단을 놔두려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881년 마흐디 운동으로 독립운동이 빈번해지자 영국의 이런 처지는 곤경에 놓였다.마흐디(구세주)라고 자처한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 압드 알라(1844~1885)가 이끄는 마흐디군은 한창 세력을 넓혔고 1883년 마흐디군 1만명이 영국군 윌리암 힉스 대령(William Hicks, 1830~1883)의 지휘를 받는 영국-이집트 혼성군 4만명을 참패시킨 <엘 오베이드 전투(Battle of El Obeid) 1883년 11월 3일 ~5일>에서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패한 힉스 대령도 전사해[1]시체는 효수되면서 영국 여론은 굴욕감에 떨어야 했다.
이런 가운데 1884년 민간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이집트를 지키고자 파견된 영국 총독 찰스 조지 고든 경은 이집트 방위군과 수단의 수도 하르툼(카르툼) 방위전에 나섰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무하마드 아흐마드군의 반격으로 1885년 1월 26일 하르툼이 함락당하면서 고든 총독이 참수당했다. # 하르툼 방위전 1. # 하르툼 방위전 2. 참고로 고든의 죽음을 듣고 통쾌해했던 나라가 바로 청나라였다. 바로 영국 육군의 장군이었던 고든이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을 거느리고 원명원을 휩쓸며 청을 뭉갰던 인물인지라. 태평천국 운동 진압에도 참여했던게 바로 그 고든 장군이다. 고든은 청교도 성향이 강한 침착한 인물이었고, 수단에서 노예무역 금지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든 장군은 청과 달리 수단이나 북아프리카에선 의외로 평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현지에 남아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들 교육이나 자립까지 관심을 보였으며[2] 현지인이 믿는 이슬람교에 대하여 꽤 관대하게 대했고 현지인 부하들도 잘 대해줬기에 대부분이 무슬림인 7천여명 이집트 및 수단인 부하들은 마지막까지 그와 같이하다가 모두 죽었다. 마흐디도 그에 대한 평을 듣고 '유럽 기독교놈치곤 그나마 나은 놈'[3]이라며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부하들이 죽여서 목을 베어 가지고 오자 불같이 화냈다는 기록도 있다.
- 1966년에 개봉한 영국 영화 하르툼 공방전(Khartoum, 한국에서는 '카슘 공방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비디오로는 이 제목으로 출시됐다. 공중파에서 더빙되어 방영도 여럿 했는데 90년 초반 KBS-1 방영판에선 유강진이 고든 역, 마흐디는 박상일이 맡았었다.)에선 찰턴 헤스턴이 고든을 연기했는데 여기에선 창에 배를 맞고 죽는 걸로 나온다. 마흐디는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맡았는데 부하들이 참수된 고든의 목을 가져오자[4] 괴로워하며 "내가 그를 죽이지 마라고 명령했잖느냐!" 라며 화낸다. 참고로 이 영화는 제작당시, 마흐디의 증손자들에게 감수받았는데 그들도 전해듣던 증조부 이미지랑 맞다고 매우 호평했다. 고든의 머리는 말그대로 효수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당시 죽은 고든의 시체는 끝내 찾지못하고 영국에 가묘로 안장되었다. 수단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수단이 영국에게 독립되자 고향으로 옮겨져 지금은 영국에 있다.
하르툼 공방전 포스터.
영화 하르툼에서 마지막 전투 장면.
- 고든의 죽음은 "순교"는 결코 아니었다. 고든 본인이야 성공회 신도로 충실하지만 적어도 선교에 대해서 나서지 않았고, 그가 죽을 때 무슬림 부하들도 그와 생사를 함께했다. 더불어 극단주의 무장운동을 벌이던 마흐디 본인조차도 인정하던 사람이다.[5]고든이 그런 선교 행위를 했더라면 마흐디가 과연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 게다가, 마흐디 신국을 뭉개고 수단 총독이 된 윈게이트 백작조차도 이슬람을 싫어했지만, 고든을 이렇게 떠받드는 거나 기독교인의 수단 선교를 무척 불쾌하게 여겼고, 결국 1902년에는 북수단(현재 수단)에 대한 기독교 선교를 아예 금지하였다. 영국이나 유럽 기독교 측에서 반발하자 윈게이트 백작은 "기독교인이 하는 선교짓거리가 무슬림 극단파랑 차이가 뭐냐?"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현 미국 복음주의 선교로 유명한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위대한 순교자라고 고든을 기리자 고든의 증손자는 증조부를 따라죽은 무슬림들은 개종도 하지 않았듯이 적어도 종교에 미치지 않은 분을 종교에 미친 놈으로 멋대로 포장한다고 비난했다.
참고로 <하르툼 공방전>의 마지막 나레이션처럼 마흐디도 고든이 죽고나서 몇 달 안가 발진 티푸스로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 마흐디 신국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국내 정치적으로도 위기였던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총리는 고든이 참수되어 목이 매달렸다는 정보를 듣곤 "하필이면 이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화내며 큰소리를 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전보를 보내 사임을 권했을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글래드스턴은 결국 곤경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년만에 사임하고 만다. 뒤를 이은 것은 보수당의 솔즈베리 경 소수당 내각. (다만 6년 뒤에 다시 총리로 재임하여 2년 가까이 일하다가 85세 가까이 고령으로 은퇴했다.)
수단의 마흐디 신국은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대영제국의 떨어진 위신을 상징하는 생선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군은 결국 굴욕 13년 만에 대규모로 수단 침공에 나선다.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의 수행을 위해 허버트 키치너 장군은 수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면서 철도를 부설하고 1898년 9월 하르툼을 다시 함락시키고 마흐디 신국을 멸망시키고[6]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인도차이나 지역의 식민지로 진출하는 빠른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홍해 인근을 노리던 영국과 이탈리아[7]를 견제하기 위해 서아프리카 - 수단 - 에티오피아 - 프랑스령 소말릴란드(현재의 지부티)를 잇는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8]. 1893년~1895년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공고하게 한 프랑스는 동진을 계속했다. 프랑스의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토(Gabriel Hanotau)는 1896년 육군대령 장 바티스트 마르샹이 이끄는 원정대 150명을 가봉에서 동쪽으로 진격시켰고, 7월 10일 파쇼다에 도착해 요새를 점령해 프랑스 국기(삼색기)를 내걸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이 9월 18일 파쇼다에 들이닥치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포함(gunboat)까지 거느린 영국 원정군의 우세가 명백한 상황, 양측 지휘관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합의하고 주둔에 들어간다. 영국 국기와 프랑스 국기, 그리고 이집트의 깃발은 일단 함께 내걸렸다. 이런 갈등 소식이 본국에 날아들자 가뜩이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불붙었던 양국 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고, 양국은 함대까지 준비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3 해결
프랑스의 종단정책이 상실 된 데에는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이 있었다. 단기적인 원인으로는 1898년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이 있다. 파나마 운하 비리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다수의 내각이 몇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이 때문에 4년간을 재임했던 아노토 장관은 7월 말에 사임해야했다. 뒤를 이은 앙리 브뤼송(Henri Brisson) 내각의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 장관#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을 극히 경계하고 있었기에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다고 보았다.
결국 이 사건은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 마르샹 대령의 부대에게 철수를 지시하여 쉽게 끝났으며, 1899년 3월, 나일 강과 콩고 강의 수원을 경계로 하자는 내용에 양국이 동의했다.
장기적인 원인으로는 델카세가 이례적으로 7년 동안 장기 재임했으며[9], 프랑스가 횡단정책을 재개할 수 없는 환경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노리던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내륙으로 진출하려던 이탈리아를 격퇴[10]했던 상황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메넬리크 2세는 1902년 철도 건설을 구실로 에티오피아에 손을 써보려던 프랑스의 계획을 파악해 철도 건설을 중단해 버렸는데,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또한 1899년 초에 마흐디 신국은 영국에 의해 완전한 진압 단계에 있었다. 결국 프랑스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기존에 장악하려던 횡단선을 계속 추구할 이유가 점점 사라졌던 것이다.
결국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에서 프랑스는 수단을 영국에게 확실하게 양보했고, 대신 모로코를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고립을 완벽하게 해소했다.[11]
이로서 수단은 '영국령 이집트-수단'으로서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단 민중이 대거 학살되었고 수단 측의 극렬한 저항과 같이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철저하게 뿌리내리게 되면서 뒤에 종교적 갈등 요소를 남기게 된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믿는 남수단과 갈등에 또다른 원인이 되게 했다. 또한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12]
이 시기의 역사를 다룬 책인『카르툼』이 2013년 12월 발매되었다. 흥미가 있다면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 리뷰기사- ↑ 밑에 후술한 영화 하르툼 공방전 초반부에 마흐디군에게 공격받아 영국-이집트 혼성군이 전멸당하는게 바로 엘 오베이드 전투다. 영화에서 힉스 대령은 마흐디군이 던진 창을 등에 맞고 전사.
- ↑ 이런 점 때문에 지금도 남수단에서 고든에 대한 인식이 좋다. 왜냐하면 노예 다수가 바로 흑인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흐디 신국은 흑인 노예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기에 흑인들은 마흐디 신국을 싫어했고(다만,마흐디 신국도 무조건 흑인을 차별한게 아니라 흑인 성직자나 흑인들도 일원으로 우대했기에 흑인 신분차별 정도로 봤지, 인종차별을 한 것은 아니다.) 영국을 따르게 만들어 이후 남수단 갈등에 원인 중 하나가 된다.
- ↑ 마흐디는 아예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몇번이나 고든을 설득하게끔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무엄하게 요구해서 기분이 상했나?" 하여 다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흐디 신민들은 그대를 아주 찢어죽일 정도로 미워하니 나로서도 지켜드릴 수 없소, 칼 같이 무슬림이 되라는 게 아니오. 아니, 하다못해 적당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하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려보내드리겠소. 거기서 다시 기독교인이 되던지 그건 자유요." 이런 편지까지 보냈다! 이게 참 놀라운게 마흐디는 수단에서 잡힌 기독교인에게 '너 개종할래, 안할래?' 한마디하고 안하면 즉각 참수! 이렇게 하던 인물이다. 이렇게까지 편지로 여럿 보내면서 설득했다는 건 그만큼 고든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 이에 고든은 "마흐디 당신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잠깐이라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소. 반대로 마흐디 당신이 거꾸로 되어 내가 잠깐이라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척 하라고 하면 하실 수 있으시오?" 라며 거절한다고 답변했다.
- ↑ 검열때문인지 목을 보여주진 않고 장대를 가져와 환호하는데 마흐디가 이겼다는 말에 기뻐하다가 장대를 쳐다보면서 괴로워하며 화낸다. 장대에 목이 꽂혀있다는 건 카메라가 장대 위를 비치더니 나중에 세워지는 고든의 동상에 목이 장대로 연결되면서 상징적으로만 보여줬다.
- ↑ 그러나 마흐디가 얼마안가 죽고 마흐디를 이어 마흐디 신국을 지배한 마디야는 고든을 증오하여 그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게 했다. 마디야는 결국 마흐디 신국의 마지막과 같이 영국군에게 죽게 된다.
- ↑ 마흐디는 이미 병으로 죽어서 묻혀있었는데 바로 고든의 아들이 이끄는 영국 육군은 마흐디의 무덤을 박살내고 시체를 불태우며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영국 타임스 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난하며 "관대함으로 베풀었다면 몰라도 똑같이 따라하니 갈등은 계속 될 것이다."는 기사를 썼다. 결국 그 기사처럼 현지인들은 영국 식민지배 아래에서 이를 갈았고, 심지어 마흐디의 후손들은 70년 가까이 지난 1966년 영화 하르툼을 제작할 당시 찾아온 미국인들에게 증언을 하면서도 이를 갈았다고 한다. 결국 77년이 지난 1975년에서야 고든의 후손과 마흐디의 후손이 만나 서로 화해하고 고든의 후손이 사과했다고 한다.
- ↑ 현재의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 지역을 식민지화.
- ↑ 마다가스카르가 비슷한 시기에 식민화 되어 이것까지 고려한 횡단 정책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지정학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 내각이 장수해서가 아니라 델카세의 능력이 뛰어나서였다. 총리의 변화에도 각료가 변하지 않는 이런 보수적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특성이 장점으로 작용한 예.
- ↑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95년~1896년. 1893년 에티오피아의 조약 거부와 1895년 반란이 원인이 되었다. 아도와 전투가 유명하다.
- ↑ 사실 영국은 당시에 고립(정확히는 불 - 독 대립에서의 중립)을 취해도 손해 볼 게 그다지 없는 입장이었다. 이것을 "명예로운 고립"이라고 한다. 반면 프랑스는 러시아만으로는 동맹국이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적국을 더 늘린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결국 델카세는 지속적으로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친프랑스적인 에드워드 7세와 영국의 랜스다운경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된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이 협상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확실하게 몰락하면서 삼국협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발판이 된 것. 독일은 모로코 위기로 양국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시도했으나 도리어 이 시도는 영-불 협상을 강고하게 했다.
- ↑ 에티오피아의 역사가 극명히 갈린데에는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 왕국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두고 찝쩍거리다가 털린 것도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