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 조약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국제법의 핵심 규칙들이 15세기와 16세기 내내 발전 되어왔다. 그런 국제법 규칙들의 완성은 1648년에 이루어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영토국가를 근대 국가체제의 초석으로 놓았다.

- 한스 모겐소, <국제관계론>

1648년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는 확실한 지점은 아니지만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변동을 상징한다.

- 파리드 자카리아, <자유의 미래>

1 개요

1648년 5월 15일과 10월 24일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에서 체결돼 프랑스어로 쓰인 평화조약.
영어로는 'Peace of Westphalia'라고 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과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간의 80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2 배경

1617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한 페르디난트 2세[1]는 카톨릭 신앙을 강요했으며 이것이 신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귀족들의 반란으로 촉발돼 30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처음에는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었으나 독일 영토에 야심을 품고있던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이 개입되는 바람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결국 유럽국가들은 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644년 개신교 대표들과 카톨릭 대표들이 베스트팔렌 오스나브뤼크에서 맺어지게 된 것.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알자스남부지방을 획득하고[2] 전체를 차지한것, 스웨덴은 오데르 강, 엘베 강, 배저 강 지역의 지배권을 얻었다. 아울러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아울러 독일 제후들의 정치적 독립권이 인정되어 독일은 통치권력이 각 제후들에게 나눠진 분권적 현상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루터교를 정식교파로 인정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의 내용이 다시금 확인되었고. 또 다른 프로테스탄트 종파였던 칼뱅파가 루터파와 동일하게 인정되어 카톨릭과 평등한 종교적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3 내용

베스트팔렌 조약의 주요 내용은

1. 프랑스는 알자스 일부지방과 로렌 지방의 대부분과 메츠 지역 등을 얻는다.[3]
2. 스웨덴은 포메라니아 서쪽 지역과 브레멘 주교의 영지 등을 얻는다.
3. 브란덴부르크는 포메라니아 동쪽 지역을 얻는다.
4. 바이에른, 작센 역시 영토를 조금씩 획득한다.
5.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한다.
6. 1555년 이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내용을 재차 확인하며 칼뱅파에게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
7. 독일의 제후는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갖는다.
8. 스웨덴은 오데르 강, 엘베 강, 배저 강 지역의 지배권을 갖는다.

4 결과 및 의의

독일이 걸레쪼가리로 변했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개념의 외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체결된 조약이 아니라, 관련 국가들이 참석한 외교 회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조약인 것. 또한 중부 유럽에 국가 주권 개념에 기반을 둔 새 질서를 세웠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상호 독립적인 주권국가가 자신의 의사만으로 외국과의 동맹 등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 조약을 근대 국제법의 시작으로 보며, 이후 국제법은 꾸준히 발전하게 된다.[4] 이 외에도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으며, 교황이 황제 위에 군림하던 중세적 질서를 그 틀까지 완벽하게 끝장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5]

비정상회담에서 이 조약이 언급된 적이 있다. 네덜란드는 동성결혼, 매춘, 대마초, 안락사 등이 합법인데 그 배경에는 이 조약으로 얻어진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네덜란드란 국가의 기본 바탕이 되었고 이 정신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조약을 통해 스위스와 네덜란드가 독립했으며, 특히 네덜란드는 이후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상업의 발달을 통해 100여년 간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조약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방 등의 영토를 얻고,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마당에 홀로 큰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호재가 겹쳐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좀 더 넓게 보면 나폴레옹 전쟁 무렵까지)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한다. 스웨덴 역시 영토를 포함한 여러 이익을 얻어 북유럽의 패자가 된다.

카를 5세 이래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스페인은 이 시점에서 완벽히 몰락하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은 제후들의 주권이 보장됨에 따라 실질적으로 해체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독일을 분리시키는 시초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왕가였던 합스부르크 가는 이 시점에서 제후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수 상실하게 되고,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지역에 집중하면서 확장의 방향을 이탈리아와 동유럽으로 돌렸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를 대신하여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브란덴부르크 지역에서 이후 독일 제국의 전신이 되는 프로이센이 새로이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들과 30년 전쟁을 통해 전 인구의 1/3이 쓸려나간 독일 지역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하기 전까지 이리저리 치이는 안습한 신세가 된다.
  1. 1617년 당시 아직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커녕 로마 왕조차 아니었다.
  2. 프랑스가 알자스를 일부 도시들을 영유한것은 오래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 권역내에서의 통치였다. 알자스 전체를 차지한것은 1697년 팔츠-대동맹 전쟁의 대가로 획득하였고, 로렌을 합병한것은 1735년 빈 조약으로 로렌을 점유하고 1766년에야 합병한다.
  3. 알자스의 순다가우 지방만 차지했다. 전체를 차지한것은 1697년 대동맹전쟁이고, 메츠, 툴 ,베르됭 지역은 이미 앙리 2세지역 프랑스 지배하였으나 신성로마제국 종주권하에서란 단서로 점유했다.
  4.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국제법은 고대 로마의 만민법(Jus gentium)이다. 이는 시민법(Jus civile)와 대비되는 법으로 이민족 간의 또는 로마와 이민족 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만민법은 로마의 국내법이고,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오늘날의 국제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특징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만민법을 근대 국제법의 시작으로 보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만민법에 의한 법질서가 중세를 거치면서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5. 그리고 이는 19세기에 이르러 일반 민중의 생활규범이 종교적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를 달성하는 데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