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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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60대61대
스탠리 볼드윈네빌 체임벌린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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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Arthur Neville Chamberlain
(아서 네빌 체임벌린)
출신 정당보수당
생몰년도1869년 3월 18일 ~ 1940년 11월 9일
재임기간1937년 5월 28일 ~ 1940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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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당시 네빌과 히틀러.

"우리 시대에 평화가 찾아왔다."

영국의 제60대 총리. 신흥 정치가문의 당주, 성공한 기업인, 유능한 재무관료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역사에서 기억하는 것은 대독 유화정책이라는 사상 최대의 오판을 저지른 지도자.

1 생애

조지프 체임벌린의 차남으로 1869년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지프 체임벌린은 버밍엄 출신의 자유당 계열 정치인으로 이후 보수당으로 전향했다. 이는 그의 두 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바하마와 앤틸러스 제도 등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며 기업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시작했고, 이후 금융업에도 뛰어들었다. 사실 부친이 하던 코스를 고스란히 밟은 거지만 사업적 수완은 부친보다도 더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

1911년, 42세의 나이로 고향 버밍엄의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로이드 조지 내각의 전시 군수지원 부분의 실무책임자로 기용되었으나 방향성의 차이로 중도에 사퇴했다.

1918년부터 버밍엄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처음으로 내각에 진출했다. 1924년에 보건장관으로 재입각, 29년까지 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 1926년의 전국적 총파업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노동당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의 가장 빛나는 시기는 1931~37년이었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하던 와중에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기용되어, 6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며 긴축재정과 재정 및 금융개혁을 단행하고 열강간 공조를 통한 위기극복 등을 추진, 영국 경제를 다시 회복세로 이끌었고 이런 이유로 당대의 스타였다. 오죽했으면 소련을 방문한 낸시 아스터가 스탈린과 면담했을 때 차세대의 지도자로 이 사람을 골랐고 개인적으로 처칠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는 이미 끝났다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1]

2 총리 재임

1937년,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제59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그의 당면과제는 역시나 독일이었다. 독일은 무서운 기세로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었고, 체임벌린은 독일 문제에 대해 외교적 해결책을 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이탈리아 연대의 파기 시도였다.

두 파시스트 국가의 연합을 막기 위해 체임벌린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병합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도 막았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기에 체임벌린의 생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2]

체임벌린이 이런 외교적 유화책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에 기인한다. 대공황 여파로 대대적 군축을 한 상황에서 무력을 통한 대독일 정책은 불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영국의 군사력은 재무장관으로서 군축을 주도한 체임벌린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35년경부터 본격적 재무장을 시작했지만 아직 군사력의 재건이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나온 오판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이상으로 군사력 재건이 안 되어 있었고, 히틀러의 허풍과는 달리 영국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군사적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오판을 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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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문제는 1938년에 터지고 말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주테텐란드 요구에, 체임벌린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뮌헨 협정이었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통해 당분간 히틀러와 독일 파시즘의 팽창의욕을 꺾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우리 시대의 평화 선언이 나왔다.[3]

그러나 히틀러는 6개월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고, 다시 6개월 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뮌헨 협정 파기 직후 체임벌린은 외교적 유화책을 포기하고 뒤늦게 강경책으로 전환했으나, 폴란드가 망하는 와중에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한 전시내각을 수립하고 대독 강경파 윈스턴 처칠을 기용하였으나 노동당은 과거의 원한으로 전시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개전 이후 급격히 위세가 높아진 처칠 등의 강경파도 좀 더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여 국내정치적으로도 고립되었다.

결국 처칠 등의 요구에 따라 강력한 행동으로 시작한 노르웨이 전역이 1달여 만에 패배로 끝나감에 따라 전시내각은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처칠은 패배를 모조리 체임벌린 탓(...)으로 돌리며 사임을 요구했고, 노동당도 체임벌린이 이끄는 전시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10일 사임했다. 그리고 그 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후 전시내각의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급격한 건강악화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덕분에 자신에 대한 변명도 제대로 남기지 못해 오늘날까지 미친 듯이 까이고 있다.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서 평가한 20세기의 총리들 중에서 앤서니 이든과 함께 0점을 받으면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총리가 된 것도 이러한 평가를 증거한다.

3 옹호론

시일이 꽤 많이 흐르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재평가 내지 옹호론도 하나 둘 일어나고 있다.

일단, 체임벌린은 집권 후 기존 내각이 추진하던 재군비 정책을 보다 가속화했다. 이는 독일의 팽창에 대한 대응책으로 군사적 옵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다만 재군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은 것에 동의한 것이고 이것이 그의 평가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체임벌린의 재군비 강화 방침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보다 더 암울한 상태로 세계대전을 맞이하거나, 아예 군사력 부족을 이유로 폴란드 침공을 묵인했을 수도 있었다.

또, 독일의 군사력을 오판했다지만 이것은 체임벌린의 책임이 아닌 정보부서의 책임이다. 체임벌린은 군사나 외교가 아닌 경제 전문가였고 내각 총리로서 휘하 정보부서의 판단을 바탕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938년 체코 위기에서 독일에 맞서 싸운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정보부서의 독일 군사력 오판은 영국만이 아니라 당대 대부분의 국가가 다 범했던 실수로, 프랑스의 경우 라인란트 재무장 당시 겨우 1~2만에 불과한 독일군 병력을 20만 이상으로 오판하여 군사대응을 포기하기도 했다. 즉, 애당초 뮌헨 협정은 잘못된 정보보고에 기반한 오판이었으나 내각 총리가 체임벌린이라 그냥 체임벌린이 욕먹는 것이다.

체임벌린이 단순히 대독 유화론자였다면 1939년 3월 체코 병합 이후 대독정책의 기조를 변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일방적 협정 파기와 체코 병합에 격분하여 아직 재군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함께 대독 강경노선 및 폴란드에 대한 안전 보장을 천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체임벌린은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실각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1940년 4월까지 정상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노동당이 그의 전시내각에 불참한 건 어디까지나 체임벌린 개인에 대한 사적 불만이었지 그의 대독정책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이 실각한 이유는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 때문이었는데, 노르웨이 전역은 처칠이 주도하였고, 그 패배 책임을 모두 체임벌린 탓으로 돌린 것이다(...).

4 여담

한때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거짓된 평화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며 까였는데, 그는 노벨상을 수상한 적이 없다. 이는 그의 형인 오스틴 체임벌린이 1925년, 로카르노 조약 체결의 공로로 수상한 것을 헷갈려하기 때문.

한국에선 보수쪽 의견으로 네빌 체임벌린의 이러한 일련의 병크를 한국 민주당계 정권의 햇볕정책, 대 북한정책에 빗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비판, 풍자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표적 작가가 바로 복거일이다. 다만 상황의 차이는 있는게, 당시 영국, 독일과 달리 현재 남북한의 국력차는 이미 압도적인 차이가 있을 뿐더러[4] 뒤엔 천조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미친 척하고 선제공격을 한다면 그건 자멸의 길일 뿐이다(...). 이미 북한도 그걸 알기 때문에 더 비대칭전력에 집착하는거겠지만.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탬버린을 치는 걸로 나온다(...).

패러독스사의 게임인 빅토리아에는 컴퓨터가 그 어떤 제안[5]도 다 들어주는 치트키가 있는데 바로 이 네빌에서 따온 것이다. 사용법은 게임 중에 F12를 누르고 Neville을 입력하면 된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일찍 일어난 전쟁에서는 뮌헨에서 히틀러의 강압과 여론 때문에 협정을 파기하고[6] 초기에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수상으로 나온다. 물론 서부전선에서의 여러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7] 역사처럼 처칠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퇴임.
  1. 물론 처칠이 당시로서는 한물간 정치인인 것도 사실이지만 낸시 아스터와 처칠간에는 개인적으로도 원한 관계가 짙었다. 윈스턴 처칠 항목 참조.
  2. 실제 이탈리아는 2차대전 발발 직후, 영국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도 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이 이탈리아 지상군 전부를 현대화할 정도의 장비 요구(...)여서 현실성이 없었다.
  3. 몬티 파이선의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에서는 나레이터가 '신형 농담은 영국의 전쟁 전 농담보다 6만배는 더 강력했다.'라고 설명할 때 이걸 보여주면서 은근히 깠다.
  4. 남한의 국방비 지출은 세계 10위권내로 이미 압도적인 수준이다.
  5. 가진 돈이나 식민지를 다 내놓으라는 식의 정상적인 플레이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
  6. 사실 체코 민족주의자에게 독일 고위 외교관이 암살되는 바람에 히틀러가 협정 파기 후 체코 침공을 결의한 이유가 더 크다.
  7. 이 소설에서는 1차 세계대전 초반+ 낫질작전으로 프랑스 대부분이 독일에게 넘어간다. 진격은 파리 근방에서 간신히 멈추게 되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