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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99년에 벌어진 후삼국시대의 전투.
2 발단
북원(강원도 원주시)에서 거병한 양길은 후삼국시대 초기에 일어난 호족 중 상당한 세력을 쌓아 간다. 그 과정에서 기훤에게서 벗어난 궁예를 받아들이는데 이게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경우 양길은 스스로 죽주를 바치며 투항해온 궁예를 높이 사서 애지중지하던 막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잘 대우했다. 그러다 이미 궁예의 사람이 된 은부의 계략에 넘어가 환선길, 이흔암, 복지겸 같은 핵심 장수들을 전부 내주어 명주를 치게 했는데 궁예는 명주의 김순식에게 항복을 받아낸 다음 함께간 장수들을 모두 포섭해 독립해 버린다. 궁예는 서진하여 철원과 패서지역까지 땅을 넓히고 왕을 칭하기에 이른다.[1]
실제로 홀대했는지는 몰라도[2] 궁예의 원래 병력이 600명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애매하다. 나중에는 5000을 넘어서 만단위까지 등장하지만 각종 호족들이 활개치던 초기에 이게 많은 병력인지 적은지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
아무튼 궁예가 커 버리자 주변 호족들을 규합하여 비뇌성에서 궁예와 전면전을 벌이는데….
3 전면전, 그리고 궁예의 승리
당시 궁예의 영토는 명주 북부+삭주[3] 북부+한주[4] 북부였고, 양길의 영토는 삭주 남부+한주 남부였다. 궁예가 명주 북부를 장악한 후 약 4000명의 병사를 모았다는 대목이 나오고, 이후 서진해서 영토는 3배 이상이 되었으므로 만명 이상은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양길 역시 본인의 병력은 물론 주변 호족들(마찬가지로 궁예에게 뒷통수 맞은 기훤도 포함)까지 모조리 동원했으므로, 비슷한 규모를 되었을 것이다.
이 전투는 궁예의 대승으로 끝났다고 한다. 이후 궁예는 한주 삭주 나아가 웅주까지 석권하며 세력을 한반도의 2/3까지 키우게 된다. 한반도 중부지방의 패권이 완전히 갈리면서 관도대전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후 궁예가 양길 등의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며 후백제와의 전투에서도 승승장구하는 것도 비슷하다.
4 후폭풍
이후 초적에서 출발한 호족들은 사실상 자취를 감추고, 남은 호족들도 후백제 이외에는 자기 영토 보존이나 잘 해야 옆 호족을 공격하는 정도만이 남게 된다. 한반도의 패권을 위해 싸우는 호족은 이제 왕을 칭한 후고구려와 후백제만 남은 상황. 이로써 후삼국이 완전히 정립되게 되는 전투다.
양길이 제법 큰 세력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영향력이 컸다고 보기는 힘들다. 더욱이 비뇌성 전투에서 인근 호족 기훤, 신훤 등과 연합한 걸 보면 그냥 조금 잘난 초적 출신 정도? 삼국시대에 중앙집권까지 발전하지 못한 가야와 비교하면 될 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양길의 밑에 있다 그를 밀어낸 궁예는 약 20년 뒤, 자신의 수하였던 왕건의 쿠테타로 양길이 그러했듯이 권력에서 쫒겨나 죽음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