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吉
목차
1 개요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의 유력 호족. 한때 한반도 중부의 큰 영역을 장악하고 궁예와 패권을 다퉜으나 비뇌성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몰락한다. 삼국지의 원소와 유사한 유형의 인물.
2 생애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대 왕실의 부패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 국고가 텅 비게 되자 전국에 세금을 독촉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 반란군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그 중 양길은 5소경 중 하나로 당시 큰 도시였던 북원경[1]을 기반으로 한 호족으로, 세력이 컸는지 훗날 태봉의 왕이 되는 궁예도 이 시기 양길의 부하가 된다. 양길은 궁예에게 대병력을 맡겨 지금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정벌하게 했고 궁예는 연전연승하여 명주[2]까지 정벌하고 그 소식을 들은 왕건을 비롯한 패서 호족이 잇따라 투항하면서 남쪽의 견훤과 함께 전국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궁예는 이후 장군을 자칭하여 차지한 영역을 기반으로 양길에 맞섰고, 899년 전면전을 벌이나(비뇌성 전투) 대패했다. 여기서 딱히 죽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후 900년에 왕건이 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 충주, 청주 등 양길의 본거지를 털었고 이 때 양길의 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3 창작물에서의 양길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치우[3]가 열연하였다. 초반의 주인공격 궁예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의 중간보스격 인물. 단순하고 언월도를 휘두르는 저돌적인 맹장으로 나온다. 글도 모르는 일자무식인지 제일 먼저 창업한 견훤이 귀부하라는 서신을 보냈을때[4] 본인이 읽지 못하고, 부하 복지겸에게 건네주어 읽으라 시키기도.
궁예가 처음 수하로 들어올 때 복지겸이 몇 번이고 궁예를 경계하라고 간언했지만 양길은 궁예를 믿었고, 결국 뒷통수를 맞는다. 전체적인 스탯은 기훤보다는 낫다는 판단 하에 궁예가 스스로 죽주성을 바치고 몸을 의탁하였으나, 은부의 평에 따르면 사실은 도량이 있는 척 하는 소인배라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장수로서의 능력이나 배포만큼은 어느 정도 갖춰진 것으로 묘사되며, 참수당할 때에는 '너에게 보낸 내 딸아이가 걱정되지만, 장수로 태어난 이상 죽는 방법은 정해져 있다'는 폭풍간지 유언을 날리며 죽음을 택한다.[5] 평소에는 찌질하기 그지없면서도 일부 중요한 순간에는 은근히 간지가 사는 양극단의 캐릭터.
적어도 무력 하나는 굉장한 것으로 나온다. 처음 궁예군과 싸울 때는 일기토를 벌여 신훤, 원회를 단칼에 베어죽이고 이흔암[6]도 제압하며, 전장을 종횡무진 누빈다. 물론 왕건의 계략에 걸려 결국 패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작중 양길은 중년도 아닌,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인물이라는 것이다. 작중 양길의 언급에 의하면 작중 시점에서 환갑을 넘겼다고 하는데, 그 60대에 접어든 노인이 이흔암을 쉽게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선보였다.
이 양길과의 첫번째 싸움은 왕건이 도약하는데 발판이 되어준다. 양길이 첫번째 공격을 감행했을 때 궁예는 갓 스물을 넘긴데다 아직 대규모 병력을 다스려본 경력도 없는 왕건을 총 사령관에 임명한다는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한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젊은 왕건은 노련한 노장처럼 병력들을 통솔했고, 아예 양길이 어찌 행동할건지 처음부터 예상하여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양길은 아직 애송이이던 왕건에게 대패하여 수천의 군사를 잃는 굴욕을 겪는다. 물론 양길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왕건측도 신훤과 원회가 전사하는 등 어느정도 피해를 겪긴 했지만. 하여간 이 전투 이후 왕건은 궁예의 의형제가 된다.
이후 양길은 영토도 줄어가고 쇠퇴하고 있었는데, 왕건의 병력이 죽주에 이르자 이를 막기위해 마지막으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한다. 양길을 죽이고 싶지 않던 궁예는 은부를 사자로 보내 화친을 제의하는 등 여러차례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미 비분강개한 양길은 화친도 거절하고 끝까지 적의를 보인다.그 많은 장수들 중에서 하필이면 양길의 뒷통수를 친 은부를 사자로 보냈다는 점에서 화친하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로 긴 한가 싶긴 하지만
두번째 전투에선 궁예도 친히 전장에 나서는데, 궁예가 지휘하는 군대가 양길을 상대로 탱킹을 하는 동안, 왕건은 양길의 퇴로를 차단하고, 매복중이던 양길의 둘째 사위도 죽인다. 결국 포위당한 양길은 끝까지 싸우다 생포당했고, 궁예는 양길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양길이 계속 자신을 죽이라고 하는지라 어쩔수 없이 처형해버리는데, 죽기 직전에 네놈도 이런 꼴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여기서는 양길에게 적어도 3명의 딸이 있고, 이들 중 두명, 즉 첫째와 둘째 딸도 양길의 장수에게 시집을 보낸 모양. 양길의 둘째 사위가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셋째 딸인 미향은 궁예가 양길에게 들어온 첫 날 바로 시집을 보냈으나, 불가에서 자란 터라 여인 자체를 꺼려하는 궁예의 성격에 아내가 아니라 보살[7]로 대우받았다. 아내로 대접받지 못하면 죽겠다 하여 어쩔수 없이 합방한 궁예에게 이후 그의 독립 이후 아들을 하나 보았지만 명주의 절에 보내져 살아서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왕비가 된 강비와는 서로의 동질성이 느껴져 잘 지냈으나 비뇌성 전투 때 종간과 은부의 뒷공작에 죽을뻔 하기도 했고, 이후 양길이 죽고 북원이 초토화된 이후 이곳 북원으로 순행을 온 궁예에게 분노하여 깽판을 쳤다.[8] 명주로 갔을때 아들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에 아들의 환청을 듣는 등 정신이상을 보이다 결국 넘어진 촛불에 의해 숙소가 불에 타 죽게 된다.
이래저래 군주가 될 재목은 아닌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기훤과는 달리 인간 말종이거나 폭군은 아니었던 관계로, 여전히 양길을 그리워하는 부하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주군을 죽인 궁예를 증오하였고, 세상을 떠돌며 궁예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렸는데, 때마침 나주를 잃고 비분강개하던 수달에게 찾아가 궁예에게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고, 수달은 이들을 받아들인다(62회). 이 들은 최승우의 명을 받아 자객으로 파견되는데, 이 들은 철원 공사장에서 독화살을 쏴 궁예에게 중상을 입힌다. 물론 궁예는 결국 살아난데다, 철퇴에 겁을 먹은 마지막 한명[9]이 이실직고 하면서 내부분열 조장[10]도 실패했지만, 이 사건 이후 궁예는 미치광이 폭군이 되어 나라를 좀먹었고, 그 것으로 인해 결국 최후를 맞이했으니, 간접적으로나마 복수는 성공하긴 했다.
-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 ↑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 ↑ 개국에서 김용, 한명회에서 황보인, 왕과 비에서 윤사흔, 무인시대에서 현담윤, 명성황후에서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으로 출연한 성우 겸 배우이다. 하지만 소시적에는 이영후와 더불어 백범 김구 전문 배우로 유명했다.
- ↑ 견훤이 자신에게 비장(...)의 벼슬을 주겠다면서 귀부하라고 하자 빡쳐서 사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데, 재밌는 점은 불과 몇화 전 자신이 기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기훤이 보인 반응과 똑같다는 것.
- ↑ 궁예의 독립 이후 양길이 처음 궁예와 맞붙을때도 궁예가 강비를 들인다는 소식에 '그나마 내 딸애를 데리고 있어서 미련은 남았는데' 새로 아내를 들인다는 말에 궁예를 치기로 결심한것.
- ↑ 배우의 이미지가 코믹해서 그냥 지나칠 수 있어도 무력이 복지겸과 비슷한 것으로 묘사된다.
- ↑ 불교에서 여성 시주를 부르는 용어
- ↑ 석총보다 앞서 궁예에게 '당신은 미륵이 아니라 나찰이다'라고 깐 첫 인물이기도 하다.
- ↑ 나중에 마의태자 역할을 맡은 이병욱이 연기했다.
- ↑ 자신들을 왕건의 작은아버지 왕평달의 수하라고 주장했다. 물론 누명이 밝혀졌음에도 왕평달과 왕건의 사부들은 결국 귀양가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