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사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서 사용했던 거대한 장창.
길이 : 보병용 5.5m~6.5m, 기병용 4.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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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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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리사의 구조

사리사는 3개의 금속부위와 2개의 나무 자루로 구성된다. 각 나무 자루는 약 3m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앞부분의 창날은 약 51cm에 1kg, 뒷부분의 버트캡은 44.45cm에 1kg정도. 자루 2개를 연결하는 청동파이프가 있다. 행군시에는 양자를 분리해서 지고 다니다가, 전투 전에 연결하여 사용한다.

2 사리사의 전투법

잡을 때는 버트캡에서 1.8m정도 떨어진 곳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는다. 방패는 지름 약 60cm정도에 끈으로 팔뚝에 묶어 착용한다. 갑옷은 리넨으로 만든 단단한 천 갑옷이며, 정강이가리개와 투구를 착용한다.

이와 같은 장비를 갖춘 보병을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라고 하며, 이들이 16*16열의 총 256명으로 이루어진 방진을 1개 신타그마로 규정한다. 이 신타그마가 여러개 모여 횡진, 사선진 등 열을 세워 늘어선다. 이러면 사리사가 활약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사리사에 대한 오해가 이것이 전열을 엄중하게 짜고 '제자리에 서서' 진형을 유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장창의 방어적 사용이 세계적인 대세라는 것에 기인한 오해이다.

실제로는 창을 양손으로 잡고 적과 가까워지면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창을 상대의 몸통 혹은 방패에 체중을 실어 부딪친다. 이를 오티스모스(Othismos)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어로 밀어붙인다는 의미이다. 이 방식은 무겁고 긴 사리사의 중량과 길이에 의해 어지간한 방패는 뚫려버렸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전군이 계속해서 들이치는 데에 버틸 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뛰어나간다고 해서 고함치며 달려간다고 생각하지 말자. 창끝이 적과 거의 가까워졌을때 두 세걸음 뛰어나가며 들이받는다는 말이다.

신티그마의 위력은 확실히 강력하지만 창이 길고 장비가 무거워 빠르게 이동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신타그마가 적의 주력과 교전을 개시하여 밀어 붙이면 기병이나 코끼리 같은 기동병력이 측면이나 틈새를 포착하여 돌입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역할을 했다. 가우가멜라 전투와 같은 사례는 이러한 알렉산더 전법을 잘 보여준다. 신타그마는 그 오티스모스 파워로 아군보다 훨씬 많은 적 전열과 정면으로 교전해도 항상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는데, 이는 청동방패와 팔랑크스 진법으로 무장한 그리스 도시국가도 마찬가지로 창의 길이 차이 때문에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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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계자 전쟁 시대의 사리사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이 내전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끼리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똑같은 오티스모스를 둘이서 서로 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이 싸움에서 유리해지기 위해 페제타이로이를 중장화시키는 경향이 생긴다. 창이 6.5m까지 길어졌으며, 두꺼운 천을 여러겹 겹쳐서 만든 리넨 갑옷에서 금속제인 청동갑옷으로 바뀌고, 방패도 가죽을 씌운 것에서 청동방패로 바뀌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면의 밀어붙이는 위력은 더욱 강해졌으나, 반대로 빠르게 명령에 반응하여 전후좌우로 방향을 바꿀 수 있던 알렉산더 시절의 기동력은 크게 추락하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창의 길이를 다시 5.5m정도로 줄이게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겁기는 마찬가지 였고, 이렇게 중장화된 페제타이로이는 로마 레기온에게 패배하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된다.

4 사리사의 몰락

지중해에서 꾸준히 세력을 형성하던 로마는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그중 키노스케팔라이 전투(Battle of Cynoscephalae, BC 197)는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와 로마의 레기온의 대조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 전투로 기록된다. 여기서 산을 사이에 두고 행군중이던 마케도니아군과 로마군은 서로 산 너머에 적이 있다는걸 알고 급히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마케도니아군 우익은 진형을 편성하는데 성공했지만 마케도니아군 좌익은 험한지형 때문에 전형 편성이 늦어지고, 로마 레기온 우익은 진형이 편성되지 않은 마케도니아군의 측면을 강타하며 밀어붙였다.

그러나 진형이 편성된 마케도니아군 우익을 상대하는 로마군 좌익은 무시무시한 오티스모스에 밀리기 시작했고, 산 정상에서 시작된 교전이 산기슭까지 밀려 탈주병이 발생할 때 즈음 마케도니아군 좌익을 패퇴시킨 로마군 우익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후방을 강타, 결국 마케도니아군은 완전 패배하게 된다. 중장화된 페제타이로이는 강력했지만 그만큼 느렸고, 결국 로마군 우익이 마케도니아 좌익을 돌파하는 속도가 페제타이로이가 로마군 좌익을 무너뜨리는데 필요한 시간보다 빨랐던 것이다. 거기다 마케도니아 지휘관들의 기량도 떨어졌다.

이 전투를 통해 두가지 양상을 한번에 알 수 있는데 곧 로마 레기온은 전열이 갖추어진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정면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과 로마군의 지형 적응성이 뛰어난 점, 그리고 전열을 갖추지 못하고 기병이 제대로 지원을 못해주면 한번에 끝장난다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문제점도 함께 보여준다.

자세한 항목은 위키의 해당 항목을 참고하자. 전투 상황표까지 나와 있다.

로마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자신들의 팔랑크스가 패배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케도니아인들의 풍조를 계기로 팔랑크스와 레기온이 어째서 그리 되었는가를 썼는데, 그는 창의 숫자와 페제타이로이의 1인당 간격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분석을 한 이후 정면에서는 팔랑크스가 무적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평평한 지형이 아니면 크게 약점을 노출하는 팔랑크스의 지형 적응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로마군은 어떠한 지형에서도 100%의 전투력이 발휘되는 기동력있고 유연한 군대임을 지적하며 이 점이 패인임을 결론 내리고 있다. 키노스케팔라이를 비롯해 여러 레기온 vs 로마의 격돌에서의 패인과 정확히 일치하는 통찰력 있는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뭐 이 양반도 그리스인이지만 그리스 기병대장, 로마 장교로 양국 군인 생활을 다 해봤으니 정확한 분석이 가능한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5 로마군이 창 사이로 돌진하여 이겼다?

여러 책에서는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의 상성을 설명하면서 로마군이 단순히 마케도니아 팔랭크스 장창 사이로 파고들어 전투하여 승리했다고 되어 있는데, 완전히 잘못된 말이다. 실제로는 처음에 처참히 실패했다.

위의 그림들에서 볼수있듯, 상대가 첫 번째 창날을 피하거나 막으면서 들어오면, 그 뒤에 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정면에서만 무려 4개의 창날들이 상대에 맞추어 위치를 조정하면서 막거나 찔러버리는 것이 사리사 팔랑크스의 기본적인 전술이다. 이를 파고 들면서 깨뜨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전쟁은 1:1의 싸움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서 설명한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 이어 벌어진 피드나 전투(Battle of Pydna,168 BC)이다. 여기서 로마군 최전열인 하스타티는 전열을 갖춘 마케도니아군의 장창전열에 겁이 나 사기가 크게 떨어져버렸다. 이에 병사들이 돌격할 생각을 않자 장교가 부대기를 빼앗아 마케도니아군에게 던져버렸는데, 당시 부대기를 잃는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이었기에 꼼짝않던 로마군이 전열도 안갖추고 미친듯이 달려들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마 병사들은 칼이 창 상대로 이기는 방법이라고 알려진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다 썼다. 투창도 던지고 방패로 창을 빗겨내며 틈새로 달려들어 보고, 밑으로 기어들어가 보고, 창을 잡고 용을 쓰는 사이 다른 병사가 밀고 들어가 보고... 그러나 그 병사들 거의 대부분이 방패가 뚫리고 사리사 앞에 꼬치 신세가 되면서 학살당했으며, 결국 로마군 전체가 밀리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측도 로마군의 투창공격에 대한 피해가 다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지형과 승리에 도취된 마케도니아군의 진격으로 진형에 틈이 생겼고, 이를 포착한 로마 보병이 팔랑크스 대열 틈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성공하는 한편 그리스 동맹군에서 지원해준 기병까지 포함한 로마군 기병대가 우측에서 들이치면서 간신히 로마군이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참고로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아군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비해 큰 창과 중장갑을 장비한 탓에 크게 둔해진 팔랑크스도 문제였지만, 좋은 무장을 한 강한 병사들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알렉산더 대왕과 같이 전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지휘관'이 없다면 무용지물임을 보여준 전투라 할 수 있다.

피드나 전투의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

여기서 명확한 점은 결국 무슨 짓을 해도 평지 지형에 정면에서 공격할 때 사리사 대형의 정면에는 절대로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장창 밀집대형'의 정면의 힘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다만 지형의 영향으로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에게 반격하며 밀어붙이기 시작할 때 흩어진 진형사이나 장창 아래로 들어가 공격했다는 일부 기록이 있는걸 보면 아마도 그 기록 자체는 사실인데 그 공격의 시기와 타이밍 등이 잘못 전달되었거나 승자의 입장에서만 과장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여러 책들은 진실을 올바로 표기하고 충분한 설명을 별도로 해야 한다.

다만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기는 있다. 스페인의 도검병인 로델레로들은 라벤나 전투에서 파이크 방진 아래로 굴러들어가 다리를 베는 방식으로 파이크 방진을 허물어뜨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파이크와 총병의 지원을 받는 경우였고, 세미나라 전투에서는 도검병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파이크 방진을 분쇄할 수 없었다.

물론 사리사가 몰락하게 된 원인 또한 바로 이 '평지+정면'이라는 전제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위의 두 전투,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와 피드나 전투에서 알 수 있듯 로마군이 보여준 유연한 전술(험지로의 유인, 측면, 후방으로의 우회기동)을 결국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장창 밀집방진이 측면 공격에 약하다는 것은 그 전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며, 하다못해 로마군과 대결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도 그 정도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런 사리사 팔랑크스를 엄호해줄 펠타스트 같은 경보병 및 기병을 함께 사용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국가들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인적 자원 고갈과 페르시아 지역에 비해 전체 인구수가 적었던 마케도니아인들의 동방으로의 많은 인구이동은 보병 뿐만 아니라 기병 전력의 약화로 이어졌고, 한니발과의 싸움 끝에 전술적으로 숙련된 로마군의 병력 운영은 헬레니즘 국가들을 능가했다. 결국 마그네시아 전투를 비롯해 셀레우코스 왕국이나 마케도니아 왕국같은 구 헬레니즘권 국가들이 로마에 패배하면서 지중해 세계의 대세는 로마식 병제로 선회하게 된다. 다만 헬레니즘 군대들이 정말로 "로마화"되었는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이들이 패했다고 장창부대가 완전히 금방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후로도 사리사에서 파이크 등으로 무기가 개량되거나, 혹은 운용의 형태와 방법만 바뀌었다 뿐이지, '장창 방진' 자체는 근세 이후 머스킷 전열보병 싸움에 대포가 날아다니던 1700년대가 넘어가도록 전쟁터에서 항상 한 몫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창 사이로 돌파하면 이긴다' 정도의 단순한 작전으로 이길 수 있었다면 장창병은 진작에 전쟁터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철저한 훈련을 받은 장창병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대열을 유지하며 각자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조건이지만.

  1. 영화 알렉산더에서, 가우가멜라 전투의 개시 직전 보병 지휘관, '애꾸눈 장군' 안티고노스가 이 구령을 외친다. 그 때 수 만명의 창병이 세워 두었던 사리사를 일제히 앞으로 겨눈 후, 나팔소리에 맞춰 구호를 외치며 전진하는 장면이 매우 압권인데, 이 그림과 유사하다. 다만 영화에서 재현된 실제 전투에서는 위 그림의 보병 방진(신타그마)이 100개 이상(...) 가로로 길게 펼쳐졌다는 차이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