舍方知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조선 세조 시절, 어지자지로 조선을 발칵 뒤집었던 인물. 세종때 조선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을 만드는데 공헌한 이순지의 종이었는데 이순지의 딸인 과부 이씨와 놀아나 결국 그 꼬리가 밟히게 되었다.
2 실록의 기록
그 발단은 세조 8년, 장령 신송주(그 유명한 신숙주의 동생이다)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신송주는 “이제 서부(西部)의 정문(呈文)에 의거하면, 여경방(餘慶坊)[1] 에 사는 고(故) 학생(學生) 김구석(金龜石)의 처(妻) 이씨(李氏)[2]의 가인(家人) 사방지(舍方知)가 여복(女服)을 하며 종적(蹤跡)이 괴이하다고 하였으므로 본부(本部)에서 잡아다가 이를 보았더니, 과연 여복(女服)을 하였는데, 음경(陰莖)과 음낭(陰囊)은 곧 남자였습니다. 사방지가 남자로서 여장(女裝)을 한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가두어 고신(栲訊)하게 하소서.”라고 세조에게 아룄고 이에 세조는 자신의 사위인 하성위 정현조(정인지의 아들)를 보내 사방지를 살피게 했다.
결국 사방지는 이순지에 의해 시골로 쫓겨났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씨 외에도 여승 중비(仲非), 지원(智遠), 소녀(小女), 내수(內竪) 김연(金衍)의 처[3] 등 최소 다섯명의 여성과 간통행각을 벌였던 모양이다.[4] 그러나 이순지가 죽은 후, 이씨는 다시 사방지를 불러 올려서 간통을 즐겼고 결국 더 이상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세조는 사방지를 변방의 관노비로 내쳐버렸다.
이 사건은 당사자의 아들이었던 김유악에게 두고두고 주홍글씨로서 작용했었던듯 하다. 성종 때 이 일로 경상도 도사에서 개차 당하였고 연산군은 이 일 때문에 부마를 선택할때 김유악의 아들은 궐에 들이지 말라고 했었다.
3 필원잡기의 기록
조선 초 대신이었던 서거정이 자신의 저서 필원잡기에 사방지에 대해 적은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서거정은 사방지를 관노비로 보낼때 세조가 의견을 물은 신하였으며 성종때 대사헌을 지내면서 위 사건의 피해자(?) 김유악을 경상도 도사로 임명하는걸 반대한 인물이다. 세조가 서거정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을 실록에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서거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로는 좀 더 길게 얘기했었던 듯 하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근래에 한 사내종의 모습이 여자와 흡사한 자가 있었다. 이 사내종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옷을 입고, 나이 40이 넘도록 사대부 가문에 출입하다가 이 사실이 드디어 탄로되었다. 대간이 법에 의하여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조(世祖)는 일이 애매하다 하여 이를 용서하고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의 의사는 어떠하냐." 하니, 이렇게 답하였다. "신이 소시 때에 《강호기문(江湖記問)》을 열람하였는데 강회(江淮) 사이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수(繡)를 잘 놓았으므로 양가(良家)에서 딸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더니, 돌연 임신을 하였습니다. 부모가 이를 힐책하니, 딸은, '비구니와 더불어 날마다 서로 잠자리를 같이하자 성(性)의 감각이 있는 것 같더니 드디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양가에서 지방관에 호소하여 비구니를 자세히 조사해 살펴보니, 음양(陰陽)의 두 생식기가 모두 없었습니다. 지방관이 장차 이를 관대히 용서하려 하자, 한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소금물로 양경(陽莖 자지) 뿌리 위를 적신 다음 누런 개를 데려다가 이를 핥게 하면 양경이 튀어나옵니다.' 하므로, 지방관이 시험하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지방관이 판단하여 말하기를,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양과 음이요,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이다. 이제 이 비구니는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니, 인도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는 자이다.' 하고 마침내 죽이니, 강회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하오니, 대개 천하의 사리(事理)가 무궁함이 이와 같사옵니다." 하였더니, 세조는 웃으며 말하기를, |
이 얘기를 보아 사방지의 행각은 꽤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4 사실
그러나 과연 사방지가 반음양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방지가 불완전한 남성의 성기를 가진것은 맞다. 정도(精道)가 경두(莖頭)아래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사정관=요도가 음경 끝이 아니라 밑으로 열린 요도밑열림증(요도하열)을 말한다.
신송주의 고변에서는 여장남자의 뉘앙스를 풍기던 사건이 하성위 정현조의 검사 이후로는 이의(二儀)의 사람, 다시 말해 양성인간으로 바뀌었고[5] 심지어 처음 고변했던 신송주마저 파직시켰다.
세조가 불완전하지만 엄연한 남성인 사방지를 양성인으로 보아 일을 처리한 데에는 자신의 공신이자 사돈인 정인지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정인지는 김유악을 사위로 삼았는데 김유악은 바로 사방지와 간통한 이씨의 아들이었다. 만약 이씨와 간통한 사방지를 여장남자로 인정해버리면 김유악은 물론 장인인 정인지까지도 체통이 심히 깎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통자들이 오랜기간 간통했으면서도 임신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사방지의 요도하열증에는 불임으로 연결되는 다른 원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 기타
1988년 송경식 감독. 지상학 극본, 이혜영/방희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캐치카피는 무려 '그들에겐 남자가 필요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