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 묘호의 한 종류

  • 천명을 이어받아 이를 바꾸지 않았음을 '세'라 한다(承命不遷曰世).
  • 만물 사방을 비추었음을 '세'라 한다(景物四方曰世).
  • 그늘(은택)을 남겨 시대를 크고 아름답게 하였음을 '세'라 한다(貽庥奕葉曰世).

世宗. 시법에서 세(世)란 글자는 위의 의미와 같이 선시(善諡) 중에서도 극찬에 속한다. 태조가 국가를 창건하고, 태종이 국가의 질서를 잡고 왕조가 길게 이어지도록 기틀을 잡았기 때문에 얻는 묘호라면, 세종은 국가의 전성기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거나,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만든 경우에 얻는 묘호로서, 위상 면에서는 태조나 태종과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준으로 다른 묘호들보다 위상이 높다. 사실 세종의 묘호를 받을 수준의 국왕이나 황제라면 국가를 창건했으면 태조, 그 다음대라면 태종의 묘호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세종의 묘호를 받은 군주들은 대부분 유능하며, 국가도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전성기를 맞이하여 가장 강력했던 시대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외도 있다

1.1 세종의 묘호를 받은 군주

성명묘호시호재위기간비고
이도(李祹)조선세종(朝鮮世宗)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1418~14504대 왕
자재(子載)세종(商世宗)정왕(定王)BC 1148?24대 왕
유철(劉徹)세종(漢世宗)효무황제(孝武皇帝)BC 141~BC 877대 황제
사마사(司馬師)서진세종(西晉世宗)경황제(景皇帝)-서진세조 추존
석조갈주(石周曷朱)후조세종(後趙世宗)원황제(元皇帝)-후조고조 추존
모용덕(慕容德)남연세종(南燕世宗)헌무황제(獻武皇帝)398~405초대 황제
장중화(張重華)전량세종(前涼世宗환왕(桓王)346~3535대 왕
부건(苻健)전진세종(前秦世宗)[1]경명황제(景明皇帝)350~355초대 황제
소장무(蕭長懋)남제세종(南齊世宗)문황제(文皇帝)-소보권이 추존
소규(蕭巋)후량세종(後梁世宗)효명황제(孝明皇帝)562~5852대 황제
원각(元恪)북위세종(北魏世宗)선무황제(宣武皇帝)499~5158대 황제
우문육(宇文毓)북주세종(北周世宗)명황제(明皇帝)557~5602대 황제
고징(高澄)북제세종(北齊世宗)문양황제(文襄皇帝)-북위문선제 추존
양소(楊昭)세종(隋世宗)성황제(成皇帝)-수공제 추존
라성염(羅盛炎)남조세종(南詔世宗)[2]흥종왕(興宗王)674~7122대 왕
시영(柴榮)후주세종(後周世宗)예무효문황제(睿武孝文皇帝)954~9592대 황제
전원관(錢元瓘)오월세종(吳越世宗)문목왕(文穆王)932~9412대 왕
야율원(耶律阮)세종(遼世宗)효화장헌황제(孝和莊憲皇帝)947~9513대 황제
완안옹(完顏雍)세종(金世宗)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聖明仁孝皇帝)
1161~11895대 황제
주후총(朱厚熜)세종(明世宗)흠천리도영의신성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
(欽天履道英毅神聖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
1521~156711대 황제
애신각라윤진(愛新覺羅胤禛)세종(淸世宗)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1722~17355대 황제
레주이담(黎維潭)베트남 여세종(黎世宗)적순강정용과의황제(積純剛正勇果毅皇帝)1567~1599후여조 16대

1.2 신라의 인물 세종(노리부)

한자로 훈차하면 세종(世宗)이 되고, 음차하면 노리부(弩里夫)가 된다. 노종(奴宗), 노부(奴夫), 내부(內夫), 내례부(內禮夫)라고도 한다. 위 단락의 묘호 세종과 한자까지 똑같지만 이 세종은 묘호가 아니라 이름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금관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장남이자 김무력의 맏형. 그러니까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다. 신라와 백제나제동맹을 맺고 551년에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방을 공격할 때 거칠부를 비롯한 아홉 장군[3] 중 한 사람으로 참전해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지방) 이내의 10개 군을 공략했다. 즉 백제가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일시에 공략한 것이다. 이 때 세종은 파진찬이었으며 이후 이찬으로 승진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내례부(內禮夫)라는 이름으로 이사부, 김무력 등과 함께 나오는데, 원래 고구려 영역이었던 단양 지역을 점령하는 데 참여한 듯 하다.[4] 이후 관산성 전투의 보복으로 백제군이 577년에 공격해 왔을 때 요격하여 막아내었다. 진평왕이 즉위하고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10년 동안 재임하다가 588년 사망.

사실 이상의 노리부=세종은 진흥왕 순수비금석문에도 자주 등장하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금관가야의 정통 후손(김해 김씨)임에도 당시 신라에서 엄청나게 출세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는데, 아래에 나올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경주 김씨 계열의 인물로 나온다. 이는 남당 박창화가 필사본 화랑세기를 쓰면서 이 사실을 모르고 그만 병크냈다는 것으로 보고 있고 따라서 화랑세기 위서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쓰인다.

화랑세기 진서론을 지지하는 이종욱 교수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잘못된 거고 오히려 화랑세기로 보완된다...는 입장인데, 생각해봐라, 삼국유사+삼국사기랑 화랑세기랑 어느 쪽이 파워가 더 센지. 이에 대해 김태식 교수 입장은 황종이랑 거칠부가 싸운다는 말과 같이 무리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1.3 화랑세기의 세종

진위가 의심되는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시대 인물. 우산국 정벌로 유명한 이사부의 아들. 어머니는 진흥왕의 어머니이자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 아버지가 다른 형 진흥왕이 친동생처럼 대했다고 한다.

처음에 미실과 혼인했으나 미실이 지소태후에게 쫓겨나자 융명을 정실로 삼았다. 미실이 사다함과 사귀자 괴로워하는 세종을 보다못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으나, 미실은 첩이 된 것이 싫어 세종을 멀리 했다. 이에 미실이 정실이 되고 융명은 둘째 부인이 되었다.

사다함이 죽을 때 세종을 풍월주로 추천해 사다함의 뒤를 이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아내 미실이 궁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그외에도 여러 남자와 사통했는데도 오히려 부인에게 정절을 지킨 대인배. 미실이 사도황후와 동침하라고 했는데도 거절했다가 미실이 계속 청하자 어쩔 수 없이 동침했다고 한다. 심지어 풍월주가 잠시 폐지되고 원화가 부활했을 때 불만을 터뜨리는 낭도들에게 "원화(미실)은 내 옛 부인"이라며 따를 것을 종용했다.

화랑세기에서는 '화랑 중의 화랑', '화랑의 전형'이라고 칭송했다.

아들이자 11세 풍월주 하종은 사다함이 미실의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는데, 사다함을 매우 닮아서 실은 사다함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1.4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세종(선덕여왕) 문서로.

2 다른 뜻

대한민국에서 세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면 위 신라시대의 인물 빼고는 십중팔구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에서 따 온 것이다.

2.1 조선의 4대 왕

해당 문서 참조. 아마 99%의 사람들이 이 문서를 목적으로 '세종'이라 검색했을 것이다.

2.2 세종특별자치시

해당 문서 참조.

2.3 남극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연구기지명

해당 문서 참조.

2.4 서울에 소재한 대학교

해당 문서 참조.

2.5 고려대학교와 홍익대학교의 제2캠퍼스

고려대학교의 제2캠퍼스는 위치한 지역을 따라 서창캠퍼스로 불러왔으나 2008년 3월 세종캠퍼스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2011년 홍익대학교 조치원캠퍼스도 따라서 세종 캠퍼스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름을 물론 위쪽 단락의 세종대학교가 미친듯이(...) 항의했으나 별 성과없이 묻혔다. 안습...

2.6 대한민국로펌

김앤장, 광장, 태평양, 율촌과 함께 대한민국 5대 로펌이다.

2.7 대한민국 해군의 구축함급

해당 문서 참조

2.8 오키라쿠 시리즈, 패밀리 테니스 3D의 주인공

문서 참조.

2.9 소행성 이름

7365 세종(7365 Sejong, 1996 QV1)은 1996년 8월 18일 일본의 천문학자 와타나베 가즈오가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발견한 소행성이다. 한글을 창제한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의 이름을 기념하여 이름붙였다.

  1. 이후 고조(高祖)로 추존
  2. 5대 귀의왕 피라각(皮羅閤)이 추존
  3. 대각간 구진(仇珍),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居柒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그리고 파진찬 노부(奴夫, 즉 세종)
  4. 적성비에서는 관등이 대아찬으로 나와서, 파진찬으로 나오는 삼국사기 기록보다 먼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