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1]]
한국의 파브르
石宙明
1908년 11월 13일 ~ 1950년 10월 6일

1 개요

한국의 나비 연구가이자 생물학자, 곤충학자, 동물학자, 언어학자[1], 박물학자.
희대의 근성남이자, 자칫하면 일본에게 빼앗겼을 한국의 생물분류를 주도한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2]


2 생애

1908년 11월 13일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가고시마농림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집이 평양에서 대단히 큰 요릿집을 한 터라 어려서는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일본의 나비학자들이 대충 연구하여 종류만 921종으로 늘려놓은 나비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여[3] 정확하게 250종으로 분류하였다. 특이한 나비를 보면 그걸 잡으러 몇시간이나 쫓아 산과 들을 헤매기도 했다고 한다. 배추흰나비를 16만 마리나 사육하며 개체변이를 연구하기도 했고, 국내 대부분의 나비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다. 특히 지리산을 헤매며 지리산팔랑나비를 발견한 사례는 유명하다. 동시대에 교류한 학자로는 조복성 선생이 있으며, 그가 발견한 나비의 종류와 이름은 '조선산 나비목록' 등에 저술되어 있다.


2.1 가족 관계

석주명의 여동생인 석주선도 유명한 인물로 한복 등 한국의 전통 옷 및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였다. 1.4 후퇴 때 피난을 가면서 자신의 자료들과 함께 석주명의 나비 표본 및 연구 문서들을 함께 챙기려 했는데, 석주선의 자료는 옷이란 특성상 부피가 너무 커서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석주명의 나비 자료만 챙기고 자신이 연구한 복식자료는 보따리에 싸서 편지를 써놓고 기둥에 매달아 놨는데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남겨뒀던 옷은 단 한벌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주선은 처음부터 다시 옷들을 모아야 했고, 이렇게 모은 옷들은 단국대부속박물관에 기증해서 그녀의 이름을 따 석주선기념박물관을 세웠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활달한 성격이었던 부인과는 사이가 좋지않아 불화 끝에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이혼한다. 당시 신문에서는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며 그의 사생활을 가십거리로 다뤘다. 훗날 딸의 증언으로는 자세한 것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고모인 석주선이 둘 사이를 악화시켰다고 한다.

2.2 여러 가지 일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공부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 시간에도 땅콩을 먹으면서 걸어다니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의 오류를 바로 잡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터라 생전에 학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는데 신분이 교사라 주변에서는 '기껏 교사 주제에 잘난 척은...' 이러면서 냉소를 보냈지만, 어느 날 도쿄에서 온 교수가 그를 찾아 온 뒤로는 주변의 평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연구할 시간이 아까워 집에서도 서재와 안방사이에 벨을 달아 볼일이 있으면 그걸로 부인을 불렀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담당 학급을 연구실 옆에 붙여 달라고 요구해 박물관에 있던 연구실 옆으로 교실을 옮겼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나비표본을 확보한 비결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곤충채집 숙제를 내는 것. 이것이 초딩 곤충채집 여름방학 숙제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2.3 안타까운 죽음

1950년 10월 6일 서울 수복 전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국립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친구가 고구마를 삶았으니 먹고가라고 붙잡는 통에 시간을 지체해서 허겁지겁 뛰어가다 대낮에 술을 먹던 국군 무리 중 하나와 부딪쳤는데 그 자가 양복을 입은 석주명을 보고 "저기 인민군 소좌가 간다" 라며 붙잡아 총으로 쏴죽이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고 낄낄대며 시신은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던졌다고 한다. 행인들 중에는 석주명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총 든 자들의 기세가 무서워 감히 변호해주지 못했다 한다. 죽기 직전 그는 "나는 나비 밖에 모르는 사람이오."라고 외쳤고 그게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4] 국내 생물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은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시신은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던 친구와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


3 여담

국어 교과서에서도 석주명에 대해 나온다. 통칭 '나비 박사'.
프랑스에는 파스퇴르역, 퀴리역 등등이 있는데 어째 우리나라는 장영실, 석주명 등 이런 과학자의 이름을 붙인 학교 하나가 없다. 안습. (원래는 장영실의 이름을 딴 과학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개명했다) 동시대 문학작가의 경우 딱 하나 있긴 하다. 게다가 국내 생물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음에도 대중의 인식이 매우 적은 인물. 최근에야 교과서에 그의 내용이 실리고 위인전이나 전기로 나오기는 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불탄 과학관 안에는 그가 그동안 채집한 나비 표본 30만 점이 있었다고 한다.......
어째 여담이 다 불행하냐


자신이 모아놓았던 나비들 중 일부 표본은 나비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화장하라는 어느 스님의 조언에 따라 화장한 적이 있다고 한다.
  1. 에스페란토로 논문을 내고 교과서를 저술하는 한편으로 제주 방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2. 석주명이 활동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이기 때문. 이 시기 일본은 서양의 영향으로 박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 일본 학자들의 영향으로 한국에만 서식하는 생물종의 학명일본어가 들어간 것이 몇 있다.
  3. 전국을 돌아다니며 75만 여 마리의 나비를 수집하여 비교하였다. 당시 학계는 약간 다른 특징만으로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곤 했으나, 석주명이 바로잡은 것. 사실 당시 일본학자들은 자기네 신종 만들기에 급급했다 갓주명
  4. 석주명은 자기 말대로 나비 밖에 몰랐고 딱히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았다. 그낭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하던 시기에 길거리를 걷다가 술 취한 미친놈들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