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2016년 KBS 1TV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에 대해서는 장영실(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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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1385/1390?~1450[1]?)

조선 세종 때 활약한 과학기술자. 생몰년도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려진 기록이 없어서, 이에 대한 건 주로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1 일생

흔한 공돌이의 일생 공밀레 공밀레 장팀장
본관은 아산현.(오늘날의 충남 아산) 기녀의 소생으로 동래현(오늘날의 부산광역시)의 관노로 있었다. 그의 출생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가 소주, 항주 출신 중국인이라고 하며 기술력으로 미루어보면 혹 그가 원나라에서 망명한 기술자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아산 장씨 종친회# 에서는 장영실이 아산 장씨 8세손인 장성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을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 세대는 5형제 5전판서 장성길(成吉), 장성발(成發), 장성휘(成暉), 장성미(成美), 장성유(成裕)로 유명한 영남 출신의 고려의 명문이었다가 고려-조선 변천기에 급격히 몰락한 집안이라 역사 드라마 제작가들이 주목할 수 있을 만한 떡밥을 제공하고 있다. 말이 쉬워 그렇지 5형제가 다 과거를 붙은 것을 넘어 각부서 장관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종친회 운영자는 이들 아버지 세대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던 중 이방원을 위시한 인사가 휘두른 철퇴를 맞아 죽고,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추리를 한다.[2] 사실 여부를 떠나 역사 드라마 한 편이 될만한 매우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는데, 장영실의 영은 아산 장씨 족보상의 항렬과 꼭 들어 맞는다. 그리고 나머지 4형제들은 어떻게 경북 산골에 숨어들어 무덤도 남겼고 그들의 후손도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데 반해,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영실 이외에 알려진 후손이 없고, 그들의 무덤의 유무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이언스 타임스#에 따르면 장영실 집안은 원래 고려 때 귀화하여 아산군을 봉지로써 하사받은 장서 이후, 3세손인 장공수와 장숭이 당시 무기 제조 기관이었던 군기시 책임자를 지내고, 5세손 장득분이 군기시 책임자 및 기상관청인 서운관의 책임자를 지내는 등 대대로 고려의 과학 기술 분야 고위직 책임자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 과학 연구소장 및 기상청장을 지낸 셈이다. 이렇듯 그의 조상 대대로 세습되었던 직종이 암시하듯, 유전적으로 세습된 그의 재능 역시 타고났던 것 같다.[3] 어린 시절에 동네 또래 친구들이 작대기를 들고 격검술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직접 나무를 깎아서 실물 장도와 유사한 멋진 나무 검을 만들어 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금속 제련, 성곽 축조, 농기구, 무기 수리 등에 탁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박사학위가 몇개야 조선의 SCV 전하는 이야기로는 동래현이 가뭄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차(오늘날로 따지면 양수기 펌프 비슷한 기구)를 개발해내어 동래현에 들었던 가뭄을 해결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종에게 보고 되어 한양으로 불려갔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연려실기술에 있는 기록이며 태종실록에서부터 장영실이 등장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보호받았다고 한다.

당시 세종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유교적 정치 이상의 구현을 위한 차원에서 천문학과 천문기기 제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장영실의 재능을 보고 받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나머지 그를 서울로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 5년인 1423년, 세종은 장영실을 왕실의 물품을 제작,수리하는 상의원의 별좌로 임명하려고 일단 허조조말생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허조는 반대하고 조말생은 찬성하였다. 이에 세종은 잠깐 결정을 미뤘다가 유정현 등 다른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결국 그를 등용하자는 결론이 나서 장영실은 무난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백관들이 장영실을 등용하는 세종의 결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설은 실록의 기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그는 40대에 든 중년의 신사였음을 추정할 수 있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에 근거해 장영실이 주로 1380년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후 그는 행사직을 거쳐 1432년에 공조판서 이천의 휘하에서 천문 기구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장영실은 명나라에 건너가서 천문학과 천문 기구 제작기술을 연구해왔다고 한다. 장영실이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가지고 왔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명나라에 들어온 아랍 상인들이나 원나라 출신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듬해인 1433년에는 호군에 제수되었고, 혼천의 제작에 착수해 1년만에 완성했다. 이후 태종 대의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갑인자의 주조를 감독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후 장영실은 많은 과학적 발명품들을 쏟아냈다. 천체관측 기구인 대·소 간의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공공장소 설치용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천문기기들과 시계의 제작은 세종의 강력한 지원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또한 자격루를 발전시켜 만든 천상시계 옥루를 개발하였다. 이는 자동시계의 배경으로 농촌의 4계절의 광경을 그린 화폭을 세우고, 선녀가 방울을 들고 나타나는 모양, 사람·동물·나무 등을 나무로 조각하여 농촌의 자연을 재현하는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습을 한 인형이 나타나고 사리지게 만든 것으로 세종은 옥루를 두기 위해 전각을 짓고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흠경각"이라는 현판을 달게 했다.

그 뒤 경상도 찰방별감으로 제수되어 경상도로 내려가 각종 금속 채굴과 제련작업을 지휘감독했다. 1441년, 강수량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기구제작에 착수해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4], 그리고 강의 범람여부를 알 수 있는 수표를 발명하였다. 이 수표를 설치한 다리인 수표교는 청계천에 있다가 복개공사로 인해 해체되어 장충단 공원으로 운반된 뒤 재설치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공으로 상호군으로 특진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여행을 갈때 타고 갈 가마를 제작하라는 명을 받고 가마를 제작했다. 이 가마도 비범한 것이 무려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자동차? 그러나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장영실은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형을 받은 뒤 파직되었다.뭐 해봤자 속전내고 끝났겠지

장영실의 가마 사고는 많은 의혹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사실 가마 제작의 총 책임자는 장영실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가마 제작의 총 책임자는 따로 있었으나 세종은 이해할 수 없게도, 장영실을 더 무겁게 처벌하고 따로 있던 총 책임자는 벌을 내리지 않았다. 게다가 장영실은 가마가 부실하다며 다시 꼼꼼하게 제작할 것을 요구했지만 총 책임자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까지 존재해 더 의혹을 키웠다.세종의 혹독한 일로 이 가마사건으로 세종에게서 벗어나려는 장영실의 자작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공밀레 공밀레

'역사저널 그날' 113화 장영실 2편 - 세종, 장영실을 버리다 - 편에서도 가마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당시 가마 제작은 장영실과 조순생이 맡았는데, 장영실이 만들어진 가마를 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조순생은 가마엔 이상이 없으므로 수리를 하지 않고자 하고, 결국 수리하지 않아 일이 터진 것이라고 한다. 장영실과 조순생은 같은 관직(대호군) 이었으나 조순생의 할아버지가 조선 개국공신의 한 명으로써 장영실로써는 가마 수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밀어붙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조순생의 경우 당시 사복시의 관리였는데, 사복시라는 것은 토목이 아니라 만들어진 가마를 관리하거나 말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가마를 만드는 일은 조순생보다는 장영실의 책임이 더 컸으므로 장영실에게 더 벌을 내린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세종의 행보는 이후 장영실이 만든 천문대(간의대)를 철거하는 더 황당한 사태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세종이 친명사대적인 관료들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장영실을 내치기 위해 가마사건을 이용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 혹은 명나라 사신의 방문에 대비해 천문대 철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장영실을 내칠 구실을 찾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간의대는 세종이 철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명을 내린 것인데, 이 때 세종은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하였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즉, 천문대를 굳이 철거하려 했던 이유는 당시 천문관측은 황제의 권한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명나라에서 조선의 천문관측에 대해 안다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명나라 사신이 오기 전 천문대를 철거함으로써 천문관측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장영실은 불경죄로 의금부에서 장형을 받은 후 파직되어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장영실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조차 전해지지 않아서 그가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장영실은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기록 한 줄만이 전하는 고로 그가 본관인 아산에 내려가서 여생을 마쳤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대체로 그가 사망한 때는 1450년대로 추정된다.

'역사저널 그날' 에서는 장영실의 이러한 퇴출을 세종의 천문 사업이 종료된 이후, 장영실이 더 이상 쓸모없어지게 되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세종은 장영실로 하여금 천문사업을 주도하게 하여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법, 천문학 등을 대성시키는데, 이러한 천문 사업이 1438년에 마무리되었으며, 가마사건은 1442년에 일어난 것으로, 이제는 장영실의 역할이 다 하였으므로 면천시켰던 장영실을 비호해주던 세종도 장영실을 지킬 의미도 여력도 없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장영실은 사실상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조선의 과학 기술과 농업생산에 엄청난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장영실이 제작한 각종 천문기기와 시계들로 인해 조선 고유의 역법이 탄생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농경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영실이 제작한 수표는 강수량을 측정하고 하천의 범람 여부를 알게 해주어서 백성들의 실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2 발명품들

3 창작물에서의 등장

흉기의 발명에서 등장한다. 우포도청에서 일어난 군관 살인 미수 사건을 해결하려는 일종의 탐정 역할로 묘사되어 있는데, 굉장히 괴짜 같은 성격의 개그 캐릭터로 묘사되어 있다.

신암행어사에서는 장영실을 모티브로 하는 인물 '영실'이 등장하는데, 원본과 달리 격투가 전문이고 발명은 그냥 취미. 게다가 그가 만든 발명품은 하나같이 도움이 안되는 괴랄한 물건들 뿐이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이천희. 장영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는 탓에 작가가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가 있지도 않았던 고려왕실 부활을 노리는 조직에 들어가서 기술자로 활동했고, 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옛 주인의 딸의 도움으로 천문 기술을 명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등의 황당한 스토리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 밖에 가마 사건 같은 경우도 세종의 온천 여행은 온데간데없고 멀쩡한 가마를 부숴먹은 걸로 그려지는데다, 그 이유도 (표면상) '왕이 날 명나라에 넘기려는데, 버림받은 관리가 이런 식으로라도 화풀이를 해야지 어떡함?!' 하는 식으로 조작했다. 다만 극중에서는 사실 세종과 더불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인물. 가마 사건으로 곤장을 맞은 탓에 몸이 불편해지긴 했어도 은밀히 세종을 도와주는 등 마지막 장면까지 세종과 함께 하며, 본작에서 세종을 총평하는 문장인 "단 하나의 백성도 그에게는 하늘이고, 땅이고, 우주였다"는 대사로 대미를 장식한다.

2008년 작 다음 만화속세상에 연재되었던 웹툰 <공길동전>에서는 주인공 공길동의 사부로 등장. 본래 신분을 숨기고 숨어 살던 비범한 공돌이 노인네 정도의 위치였으나, 사망 직전 의원을 통해 장영실임이 밝혀진다. 작중에서는 포쓰아비(로봇) 시스템의 개발자로, 나랏님이 모는 카트를 만들었다가 나랏님이 드리프트를 잘못해 사고가 나서(...) 쫓겨났다는 설정. 고기와 레이싱을 사랑하신 세종대왕

장영실을 주인공으로 한 KBS 대하드라마 장영실이 2016년 1월부터 방영될 예정이며, 장영실 역에는 탤런트 송일국이 캐스팅되었다. 비루한 신분인 것은 역사와 같지만 고려에서 관직을 지내다 조선 건국 이후 떠돌이 신세가 된 아버지를 둔 얼자출신으로 각색되었다. 위에 거론된 옥여(마차) 사고로 인해 파직된 것을 똑같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웹툰 파도의 주인에서 섬에 들어와 살아남은 셋째로 나온다. 가마 사건으로 쫓겨난 후 바다에 배를 띄웠다가 우연히 섬에 닿은 후[5] 거의 폐인 수준이었던 이무기와 반달을 만난 것으로 밝혀졌다. 약으로 살린 대상은 그저 근처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아이. 재주를 알려주다가 정이 들어 그런 모양인데 약을 먹고도 몇 년 후 전염병이 돌아 죽었다고(...) 원망도 없고 그저 궁에서 일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나와서 마냥 안타까운 인물. 한소가 그를 알아보며 사인해 달라고 호들갑을 떨자 놀라 기절해버린다(!) 자신이 후대의 위인으로서의 평가를 두려워 피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그래서 열이가 순수하게 조선 최고의 발명가라고 말하자 또 짜릿!하고 기절한다 뱀이 되었을 때는 하얀 건상투[6]와 수염처럼 백사.

4 기타

그가 어릴 때 활동한 부산광역시(동래)에는 그의 이름을 가진 장영실과학고등학교[7]와 장영실과학동산이 있었는데 그 중 장영실과학고등학교는 현재는 부산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어[8] 금정구로 이전[9]했다. 장영실과학동산은 현재도 동래구에 위치하고 있다. 장영실과학동산에는 장영실이 만든 천문기구 19점이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동래구의 위도경도에 맞게 설치하여 있다고 한다.

2015년부터 KBS1 TV에서 과학 토크쇼 장영실 쇼가 방영되었다. 과학을 주제로 얘기하고 주로 과학자들이 나오지만, 종교학자, 역사학자 등도 출연하여 과학과 인문학을 두루걸친 주제로 얘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주제로는 빅뱅, 바이러스, 인공지능, 로봇, 드론, 3D 프린트, 화성이주, 화산 등이 있었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뇌과학자)와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자)가 메인 MC를 맡고 있다. 총 45부작이었으며 2016년4월 24일에 방송이 종료되었다.

또한 그의 이름을 기려 매년 미래창조과학부 후원 하에 1년 52주동안 매주 1개 제품씩을 선정,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매일경제신문사가 91년부터 시상하고 있는 국내 최고 권위의 산업기술상인 IR52 장영실상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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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 장영실 과학관이 있다. 해당 홈페이지
  1. 과천과학관의 기록
  2. 실제로 수십년 뒤의 수양대군계유정난 때에도 이전까지 멀쩡한 사대부가였던 반대파 대신의 처나 여식을 노비로 만들었던 사례가 있다.
  3. 물론 과학적으로 진지하게 따지면 그런 재능이 유전 되었을 리는 없다. 그래도 정말 그런 집안이었다면 교육환경상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4. 다만, 측우기 아이디어 자체는 문종이 세자 시절 고안해냈다. 측우기 참고.
  5. 찾으려고 작정을 해도 찾기 어려운 곳인지라 이무기는 어이 없어 했다.
  6. 바빠서 혼인을 못했다고 나온다.
  7. 2003년 개교
  8. 2010년
  9.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