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兵制
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실행한 제도. 이후 남북조시대에 쭉 이어지다가 부병제로 변화했다.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세병제는 위나라나 오나라에서만 쓰이는 제도가 아니며 위촉오 삼국에서는 모두 이 제도를 실행했다. 삼국의 호적 자료에서는 모두 병적, 민적, 이적(吏籍)[1]이 분화된 것이 나타난다. '병호제'도 사실 이것과 같은 말이다. 다만 오나라의 제도는 이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2 특징
세병제는 병역을 특정한 계급의 의무로 삼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병사 카스트'를 만든 것. 세병들의 가정은 병호(兵戶)나 사가(士家)라 불렸으며, 일반적으로 세병제에서 병호는 민호(民戶)와는 따로 관리되었다.
병호는 일종의 차별을 받았는데, 의무적으로 집단으로 거주해야 했으며 혼인도 같은 병호들끼리만 해야 했다. 병호가 죄를 지으면 민호보다 더 엄격하게 다스렸고, 병호에 속한 병사가 배신을 하거나 투항을 하면 가족에게까지 죄가 미치는 연좌제가 실행되었다.
의무적으로 병호의 남성은 병사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일정한 나이까지 복무하고, 아들이 의무를 이어서 실행하고, 손자가 또 의무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병역의 의무를 대물림하는 방식이다. 그 대신 나라에서는 병호에게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내려줘서 생활을 보장한다. 위나라에서는 둔전 개간과 결합하여 유랑민들을 세병제로 끌어들여 많은 병력을 손쉽게 확보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병호를 확보하게 된다.
- 반란군이 항복하거나 유랑민을 체포.
- 2. 둔전에 구역을 주고 정주시킴.
- 3. 가정을 꾸리게 만들어 병호로 삼음.[2]
- 4. 병호로부터 지속적으로 병력을 조달.
- 5. 병호의 지위는 세습되므로 환경이 좋을 경우 병호가 자체적으로 증가함. 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쟁의 피해 등으로 인해 오히려 줄어들므로 1번 과정으로 돌아감.
2.1 오나라의 특징
손권의 오나라에서는 세병제에 더해서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가 실행되었다. 이는 병호를 식읍처럼 신하들이 병호를 세습할 수 있으며 평시에도 병호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다. 사실상 사병으로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오나라는 미개척지가 많았기 때문에 개척지를 늘리는데 유용했지만, 대신 전투력과 통솔력이 떨어지고 공식적으로 사병을 거느리게 되니 호족들의 세력이 커져서 국가의 중앙집권 능력이 저하했다. 당장 해당 병호를 이끄는 장군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으며, 어떤 장군이 병사하거나 전사하면 그 아들을 해당 장군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될 지경이었다.[3] 이 때문에 한종같은 아주 나쁜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4]
2.2 촉한의 특징
제갈량은 100일 단위로 2교대제를 실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적의 연구로 보아, 촉한은 세병제가 아니라 후한식의 징병제를 실시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3 장점
- 모병제와 비교해 볼 때, 토지만 할당해두면 병사들에게 봉급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많은 병사를 부릴 수 있다.
- 병사들이 세습하여 장기간 전투 기술을 습득하므로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하는 것보다 병력의 질이 높아진다.
- 농사일 자체가 병사로 활동할 체력을 기르는 것이고, 병호제에서는 같이 농사짓는 사람도 병호이므로 병사간의 유대감도 상대적으로 높다.
- 당장 전쟁에서 필요한 병사를 차출할 때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병호가 남아있을 때까지는 병력 충원이 수월하다. 즉, 사소한 손해를 메꾸기 위해 민심이 악화되는 가두모집같은 것을 안해도 된다.
- 병사 각자가 전장에서 인명 피해를 입으면 가족의 생업이 끊길 위험이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농병일치제와 달리, 안심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어 사기가 높아진다.
4 단점
- 민호의 인적 자원을 직접 징병하는 징병제와 비교해 볼 때, 병호의 수에는 한도가 있으므로 같은 인구라면 병호제는 병호의 숫자가 곧 총 병력이 되며 더 늘리기는 어렵다. 이렇게 병력 숫자에 일정한 제한이 생긴다.[5]
- 참패로 몇 만명씩 죽고 하면 병호의 인적 자원이 빠르게 고갈돼버린다. 가장이 죽은 셈이므로 병사들의 전사에 병호의 가정은 크게 동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북벌에서 강유가 1만의 병사를 잃었다는 것은 병호 1만 가구의 가장이 전멸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라진 병호의 피해를 쉽게 대체하기도 힘들다. 당장 가장이 죽었는데 농사 짓는 것이 어려울 것은 기정사실이므로 정상화는 죽은 병사의 아들이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장성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된다. 게다가 병호에서 태어난 자식이 꼭 아들이라는 법도 없다. 이 경우에는 병호의 자식들이 아닌 새로운 유민들이 유입되어 병호를 보충하게 된다.
- 병호제에만 의지할 경우 병호에서 끌어낸 병사가 싹 궤멸하면, 민호가 아직 남아 있더라도 안하던 병력 징집을 갑자기 재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 쓸 방법이 없게 된다. 게다가 강제 징병은 어떻게든 하더라도 그 질이 크게 떨어지고, 장기간 복무가 불가능한데다가 국가가 모든 장비와 식량을 대주어야 하므로 제대로 운용하기 어렵다.[6]
- 아무리 먹고 살 수 있을 수준의 토지를 받는다고 해도 병호에게는 부담이 너무 심하고, 사회적으로도 차별 계급이 돼버리므로 병사들에 대한 시선이 나빠진다. 그나마 일반 농민들처럼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신 전쟁 나가면 죽을 수도 있고 죄를 지었을 때 벌도 더 심하게 받고 연좌제까지 걸리니 죽을 노릇이다. 위나라가 유부녀 납치질(…)을 해가면서 병호에 여자들을 채워넣어야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걸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그렇다고 병호의 대우를 상승시키면 무력과 높은 대우를 동시에 받는 일종의 '무사 계급'이 나타나서 사회가 통채로 전복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부분은 위나라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후에 포상제도가 마련되고 승진도 가능해지면서 복무기간의 지원책도 마련되어 사실상 장기 복무하는 직업군인 취급되었다.
- 병력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복무기간이 평생인 징병제와 복무여건이 거의 동일하다. 이 때문에 병력 개개인의 복무염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7]
5 평가
세병제는 당장 써먹을 군대를 조달하는데는 유리하지만, 대규모 군대를 조달하거나, 큰 피해를 입은 후 군대를 재건할 때는 매우 부적당한 제도라는 인상이 들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발생하여 병력 수요가 증가하고 대규모 유민이나 반군이 대거 항복해올 때야말로 대규모 신규 편성에 적합하였다. 실제로 조조가 황건적의 포로30만 명을 받아들여 편성된 것이 바로 조조의 청주병이고 이들이 세병제의 시초가 되었다.
반면 인구 과밀 현상이 일어나 병호에게 지급할 땅이 부족할 경우에는 병호를 늘리기 어렵고, 앞서 언급했듯이 병호의 지위가 급락하면서 오히려 병사의 질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따라서 전란이 장기간 지속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한 시대(ex. 삼국시대 중국)에 가장 적합하고, 반대로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인구가 급증한 시대에는 적절성이 떨어지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대체할 목적으로 대우를 크게 개선한 부병제가 도입되었으나, 당/군제에서 보듯이 세병제에서 본질적으로 바뀐 점이 별로 없었다. 점차 당나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급여되는 토지가 감소하면서도 각 병사의 부담이 과중하게 되어 당나라 중기에 가서 붕괴되었고, 절도사 체제가 자리잡았다. 송대에는 전반적으로 모병제가 자리잡았으나, 명나라 초기에 다시 세습되는 병호제로 전환했다. 또한 청나라의 팔기 역시 세병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6 관련자료
중문백과사전- ↑ 향리 계층
- ↑ 이 과정에서 병사들에게 결혼할 여자를 줘야 하는데 민호와는 달리 가혹한 취급을 받는 특수계급인 병호에게 보통 민호가 딸을 순순히 내어줄리가 없으므로 납치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부 사례일 뿐이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맨처음 세병제를 시행한 위나라의 경우 병호에게 물리는 곡물 납부 부담이 지나치게 과중했기 때문에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고 평가될 뿐, 다른 왕조들에서는 오히려 우대받은 경우도 많고, 신분 상승 기회도 충분히 주어졌으며, 토지를 급여하여 세습시키는 것 자체는 흔했던 무토지 빈농들에게 호기로 여겨졌다.
- ↑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많았다. 능통이 병사한 뒤, 그의 군대는 낙통이 맡게 되었고, 감녕이 병사한 뒤에는 반장이 그의 군대를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봉같은 경우, 말단 시절에 소속이 감녕, 반장, 육손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 ↑ 한당이 죽자 한종이 자기 병호를 죄다 위나라에 헌납해버렸다.
- ↑ 실제로는 조조를 제외하면 대체로 병호제에만 의존하지 않고 임시로 병력을 모병하거나 고용하는 방법도 많이 썼다.
- ↑ 263년 당시 촉한의 멸망이 바로 이런 상태. 성도의 인구나 물자는 상당히 남아 있었지만 병호제에만 의지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걸 끌어다 쓰려면 없던 체계를 재수복하는 수완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야전군 전체를 해체하다시피 하고 전면적인 개편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건 등애가 중심이 된 정촉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막판 강유가 이끌던 야전군 7~8만을 제외하고 각지의 수비군을 빼고 투입가능한 병력이 고작 8천이었을 정도. 등애가 괜히 2만의 병력이라도 음평만 넘으면 정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 게 아니다.
- ↑ 이 부분은 부병제 시대에는 전란시에만 복무하게 되었으므로, 평상시에는 훈련만 받는 농병일치제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