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

곤충에 대해서는 등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위서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왕릉관구검제갈탄등애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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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艾
(? ~ 264)[1]

1 개요

장합-곽회-진태-등애로 이어지는 위나라 황금 대촉전선 라인의 정점.[2]

삼국시대 위나라산악인 무장. 는 사재(士載). 등충의 아버지. 형주 남양군 사람. 훗날 중국의 자본주의 개방을 이끌어낸 덩샤오핑[3]의 조상이다.

주로 촉 방면의 전선을 맡았고 강유와의 기나긴 악연으로 강유의 라이벌로 여겨지고 있다.

2 정사

2.1 어린 시절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길렀다. 12세에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렀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등애는 어려서 양성의 전농부민이 되었는데, 함께 관리로 있던 석포와 12~13세였다. 전농사마의 추천으로 길본의 허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에 연루되어 근신 중이던 곽현신(郭玄信)의 마부가 된 적이 있었는데, 곽현신은 10여 리 길을 가면서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장래에 좌상(佐相)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했다.

다만 상당히 출세하고자하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식이 지은 비문을 보고 자신의 이름[4]을 바꾼 적도 있다.

글은 세상의 모범이며, 실천은 선비의 규칙이다.

「文爲世範, 行爲士則」

이 비문에서 따와 이름을 등범(鄧範), 자를 사칙(士則)으로 지었지만 문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등애(鄧艾)로 개명했다고 한다.

2.2 하급 관리로 시작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었지만 말더듬이라서 간좌(문서를 다루는 각 부서의 보좌관)도 할 수 없어 도전수총초리(稻田守叢草吏)[5]가 되었다. 벼슬도 출세직이 아닌 농업 계통의 낮은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같은 군 관리의 부친이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재물을 후하게 주었지만, 등애는 처음부터 사례도 표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 능한 편으로 큰 산이나 연못을 보게 되면 군영 설치를 위한 그림을 그려두는 등 군사 운영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하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밀덕?

후에 전농강기가 되고 인구 및 공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자리인 주의 상계리까지 올라간다. 상계리 시절 사마의를 만나게 되었는데 사마의는 등애의 재주를 알아봤다나. 결국 사마의의 눈에 띄어 중앙의 상서랑으로 임명, 문관으로서 중앙 관직을 시작한다. 그도 처음부터 산악인은 아니었으며 무관도 아니었다. 단지 밀덕이었을 뿐.

2.3 대운하 프로젝트

중앙 관료로서 등애의 첫 공은 다름 아닌 대운하.

보급과 물자 운영에 재능이 있던 그는 사마의와 함께 수춘 일대를 둘러보고선 땅은 좋은데 수원이 없는 것에 착안해 제하론(濟河論)이란 글을 올렸다.

당시 오나라를 상대로 전략을 구상해야 했던 위나라로써는 허창에서 군량을 조달해 파견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운송병이 필요했다. 등애의 구상은 허창 주위에 물을 대서 회수 연안지대로 연결되는 운하를 판 후 이 주변 지대에 둔전병을 두고 경작과 방비를 돌아가며 시키는 것이다. 이러면 서쪽 지방의 3배 가까이 군량을 수확할 수 있고 운송도 배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사마의는 등애의 이 '대운하 프로젝트'에 대만족, 일을 추진해 241년 운하를 완공했다.

완공된 대운하의 효과는 말한 그대로였다. 첫째, 군사적으로 오를 견제할 수 있었다. 등애전에 따르면 매번 동남쪽으로 군이 출진할 때마다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회수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 정사 등애전에는 "수춘 지역에 물자와 식량이 회복되었고 수해가 없었다."라고 적혀 있어 운하의 경제적 효과 역시 거론하고 있다. 한큐에 국방과 경제를 해결하니 레알 천재인 듯.

2.4 강유의 1차 북벌

249년, 진태전에 따르면 강유가 국산(麴山)에 성을 쌓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진태서질과 등애 등을 인솔하여 성의 보급을 끊었고, 진태와 곽회가 구원하러 온 강유까지 격퇴하자 구안과 이흠은 결국 위군에 투항한다.

등애전에 따르면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는 강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둔한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보내 등애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해 강유군을 막아냈다.

2.5 사마사의 양신

251년에는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사마사는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등애가 여남태수로 전임하자 과거에 자신을 후하게 대우했던 관리의 아버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관리를 보내 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선물을 보내 주었으며, 그의 아들을 추천하여 계리로 임명했다.

제갈각이 합비 신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사마사에게 왕권이 탄탄하지 않은 오나라는 참패하고 온 제갈각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고 그의 예측을 말했는데 과연 제갈각은 귀국하자 주살되었다.

사마사에게 농사가 전쟁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며 경작을 권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255년,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 잘 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등애가 그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가게 하고 우선 낙가성(樂嘉城)으로 달려가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사마사가 군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등애가 만들어 놓은 부교 덕분에 편히 낙가성을 점거했다. 반란에 동조한 문흠의 대군은 위의 대군보다 늦게 왔기때문에 성 아래에서 패배하였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추격하였고,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2.6 사마소의 양신

오나라 대장군 손준 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 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사마소가 말을 더듬는 등애에게 "경은 말할 때마다 '애, 애' 거리는데 미사카는 미사카는 애가 도대체 몇이나 되는가?"라고 놀린다.

참고로 고대에는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의미에서 '나'라는 대명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지칭한다. 즉 등애가 '애', '애', 하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나, 나'하며 나를 반복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사마소가 '너는 왜 '나, 나'라 하는데 대체 넌 몇 명이냐?'며 놀린 것이다.

이에 등애는 "접여[6]도 '봉황이여, 봉황이여'라고 했지만, 이는 단 하나를 가리킬 뿐입니다."라고 센스있게 답변한다.

2.7 강유의 4,5차 북벌

255년, 진태전에 따르면 강유가 이전에 촉에 항복한 하후패와 함께 옹주자사 왕경을 박살내고 왕경을 적도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등애, 호분 등은 일단 물러난 뒤 반격을 하자고 했으나 진태는 조속히 공격하자고 했고 즉시 적도로 행군하여 촉군을 포위하려 하자 강유는 퇴각했다.

등애전에 따르면 이때 대부분의 위나라 장수들은 강유의 병력은 다했으므로 다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등애는 다섯개의 이유를 들어 간언한다.

1 : 왕경의 패배로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기때문에 적은 승기를 타고 있고 우리는 허약하다.

2 : 저들은 훈련이 잘 되어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병사 증원과 병기 수리가 필요하다.
3 :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적의 소요는 적다.
4 : 적은 병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적도, 농서, 남안, 기산) 나누어야 한다.
5 : 옹주의 풍성한 곡식이 적을 유인할 것이다.

따라서 등애는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256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서 상규로 달려갔다. 등애는 단곡에서 교전하여 강유를 대패시킨다. 대장군이었던 강유는 스스로의 벼슬을 우장군으로 깎아버릴 정도였다.

2.8 강유의 6,7차 북벌

257년 등애는 사마망과 함께 장성으로 쳐들어온 강유에게 대응하지 않고 잘 방어해 강유군을 물린다.

262년에는 후화에서 강유를 또 패퇴시킨다.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이쯤되면 강유 입장에선 철천지 원수로 여겨질 만도 하다.

2.9 촉한 정벌군

263년, 해가 가도 끈질기게 계속되는 강유의 북침에 골머리를 썩힌 사마소종회의 진언에 따라 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종회는 장안 방면에서 양안(촉의 오른쪽에 해당한다.) 방면으로 쳐들어가며 등애는 제갈서와 함께 옹주 방면에서 답중으로 쳐들어가 강유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王頎) 등을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으며, 농서태수 견홍 등을 보내 강유 군대의 앞에서 싸우도록 하고, 금성태수 양흔 등에게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이미 한중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양흔 등은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고 강유가 패하여 달아난다.

강유는 옹주가 벌써 길을 막고 교두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공함곡으로부터 북쪽 길로 들어가서 옹주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여 30리를 돌아갔다. 강유가 북쪽 길로부터 30여리 진입하였는데,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곧 돌아서 교두를 통과했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했고 강유는 음평을 통과해 검각에서 결사농성을 벌였다. 이후 검각에서 종회와 강유 사이에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이에 등애는 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3만 군사 중 별동대를 조직하여 산길을 타 넘으며 검각을 우회하기로 한다. 이때 제갈서에게도 같이 진격하자고 했는데, 제갈서는 산을 타기 싫었는지 그대로 종회에게 합류했다.[7] 이때 등애가 선택한 루트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성을 공략하는 것.

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 등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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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각 주변의 산세는 험악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다닐만한 길이 아니었는데 저런 곳을 넘어갔다.

촉나라를 토벌할 때, 등애가 산 위에 앉아있는데 흐르는 물이 있는 꿈을 꾸었다. 등애가 진로호군 원소(爰邵)에게 해몽을 묻자 원소는 주역의 궤를 통해 공을 세우지만 그 길이 다하기 때문에 촉을 이길 것은 분명하지만 돌아올 수 없다고 대답했으며, 이를 들은 등애는 망연한 채 불쾌해했다.

산을 내려가면서 전속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분노한 등애는 목을 베려고 했지만 전속은 이미 달아나 버렸다. 전속은 등애에게 원한을 품는다.

극악한 산길을 넘은 등애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유(江由)성이라는 관문이었다. 80~90km의 산길을, 그것도 겨울에 넘어온 등애군이 상대였지만 당시 강유성을 지키고 있던 마막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등애는 다음으로 상대할 면죽관의 제갈첨에게 등충사찬을 보내지만 그들은 전세가 불리해 퇴각하여 돌아온다. 등충과 사찬이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했다가 등애가 이 싸움에 모든 것이 걸려있어 불가능한 것이 있겠냐고 화를 내면서 목을 베려고 했다. 이에 등충과 사찬이 급히 돌아가 다시 싸워 촉군을 격파해 제갈첨, 장준 등의 머리를 베고 면죽관까지 점령한다.

등애군은 마침내 성도에 도착,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어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등애는 촉의 안정을 위해 힘쓴다.

후한 초기,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촉나라 신하들은 각자 지위의 고하에 따라 왕의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사찬을 익주자사대리로 임명하고, 농서태수 견홍 등이 촉나라 안의 각 군을 대신 관리했다. 사람을 보내 자신이 제갈첨을 격파한 면죽에 누대를 건축하여 경관을 만들어 전공을 빛내는데 사용했다.[8]

2.10 죽음

자만해진 등애는 연회 자리에서 촉의 사대부들을 모아 놓고, "그대들은 나 때문에 산 것이지 만약 오한[9]이 쳐들어 온 거라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가 식견있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산다.

등애는 나이가 70을 넘겼으니 생전에 자기 손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싶은 마음에 사마소에게 촉에 대한 전후 관리를 주장했고 아예 이 기회에 기세를 타서 오를 정벌할 수 있다고 했다. 당장은 병사가 피로해서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익주의 물산을 이용하여 공격할 준비를 갖추어 오를 칠 형세를 하면서 유선에게 잘 해주면 손휴를 오도록할 수 있고 오나라 사람들을 귀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가지 방안에 대해 매우 광범위한 내용을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사마소는 위관을 통해 이 상소를 받아보고는 너무 큰 일이라 즉시 시행할 수 없다고 답을 보낸다. 재차 등애는 춘추를 인용하며 "장수는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10]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했지만 이는 모함을 받을 만한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결국 종회[11], 호열, 사찬 등이 등애에게 모반할 조짐이 있다고 보고하고 등애, 등충은 감군이던 위관에게 불시에 붙들려 수레에 갇혀 낙양으로 호송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등애는 하늘을 우러러 "나 등애는 충신이거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기의 잔혹한 운명이 오늘 또 재현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

이후 종회가 모반을 일으키나 피살되고 결국 반역의 뜻을 가졌던 것은 종회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등애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은 오해가 풀린 것이라 여겨 등애를 모시고 돌아오나 이 행동 때문에 등애를 잡아다 가둔 위관이 두려움을 품어 등애에게 원한이 있는 전속 등을 파견하여 등애, 등충을 죽인다.

두예는 사람들에게 위관이 함부로 공신을 죽였으니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고 깠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위관은 두예에게 직접 찾아가 사죄했다.[12]

2.11 사후

결국 난을 일으킨 것은 종회였고 등애는 누명을 쓴걸로 판명났지만 등애의 가족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변방으로 유배당한다. 누명이었음에도 이런 처벌을 받은 것은 이미 등애가 사마소에게 '위험 분자'로 낙인이 찍혔다는 뜻이다.

그러나 274년, 단작번건사마염에게 상소를 올려 등애의 무죄를 주장하고 반역죄로 처벌된 것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반역죄로 처벌된 죄인을 무죄로 돌리는 일은 위정자의 실수[13]를 시인하는 것으로 상소를 올리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했으며 애초에 반역죄를 면죄하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마염은 등애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의 장손 등랑(鄧郞)을 낭중에 봉했다.[14]

등애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애통해하며 등애묘를 만들었고 그 중에서 일부는 현존한다. 또한 말더듬이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등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인용하기도 한다.

유명록에는 등애묘와 관련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등애묘는 경구에 있는 초가집이었는데 어느 날, 사마염이 병에 걸렸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나는 등공(등애)인데, 집이 허물어졌으니 자네가 다시 지어 주게나."라고 말했다. 이에 사마염이 낡은 초가집을 허물고 기왓집으로 다시 지어 주었다. 그 후, 어떤 남녀가 등애묘에서 밀회를 즐기던 중 거대한 구렁이가 나타나 두 사람을 휘감아 버렸다. 이에 여자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니, 그제야 풀어 주었다.

3 연의

연의 한정으로 진군의 아들 진태와는 신분과 직급, 연령을 초월한 망년지교의 우정을 쌓았다.

삼국지연의에선 대운하 경력은 없으며 정사에서는 종회만 언급했던 하후패의 대사 속에 추가되어 하후패가 강유에게 주의해야 할 인물로 소개한다. 이 말을 들은 강유는 등애와 종회를 모두 어린 서생으로 취급하며 별 것 아닌양 여겼다가 후에 북벌을 개시하면서 등애와 첫 대면을 한다. 등애가 워낙 늦게서야 출세한 인물인 만큼 강유는 등애를 젊은 무장이라 생각했는지 등충을 등애로 착각해 일기토를 펼쳤고 뒤이어 진짜 등애가 아들을 지원하러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구검의 난 때에 이른바 후반기 무력 본좌로 불리는 문앙에게 맞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룬다. 문앙이 등애에게 개털리고 혈혈단신으로 로 도망가는 내용이다. 당시 등애가 환갑이 가까운 노장이었으며 문앙이 한창 날아다닐 나이인 18세인걸 감안하면 황충과 맞먹는 노익장의 실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나관중이 제갈량을 신비스럽게 그리기 위하여 연의에서는 마천령을 간신히 올라간 등애가 나아가는 길가에 예전에 제갈량이 썼다고 되어 있는 비석을 본다.

이화초흥(二火初興) : 두 불이 처음 일어나면

유인월차(有人越此) : 여기를 넘어 오는 이가 있다.
이사쟁형(二士爭衡) : 두 선비가 서로 지지 않으려고 다투니
불구자사(不久自死) : 저절로 죽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저 때가 위나라 염흥(炎興) 원년이었는데 이화초흥은 이것을 의미(火+火=炎)하고, 등애와 종회의 자가 각각 사재(士載), 사계(士季)였으므로 이사쟁형은 둘이 싸우게 된다는 의미. 결국 제갈량이 등애와 종회의 최후를 예언한 내용인 것이다. 게다가 근처에 빈 진영이 하나 있어 조사하니 예전에 제갈량이 군사를 두고 길목을 지키라 했는데 유선이 거둬가서(...) 비어 있었다고 한다. 등애도 "과연 무후(제갈량)는 신인이구나."라고 감탄한다.

종회는 상국씩이나 되는 종요의 아들이었는데 호송되는 등애에게 "소 몰고 밭갈던 놈이 고작 암벽등반한 거 가지고 공을 세웠다고 뻐기냐!"라고 그의 한미한 출신을 깐다.

4 이름 논란

'艾'자가 '쑥 애, 다스릴 예'로 쓰이는데 뜻으로 미루어 보아 '등예'라고 발음하는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등애'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인물의 인명은 99.99% '등애'로 나온다. 이름 뜻이 쑥이면 좀 그렇잖아. 장합의 자(준예/준애)와 비슷한 케이스.

삼국지집해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집고록(集古錄)에서 ‘(등애)비에서는 (등애의 이름을 艾가 아닌) 乂(예)로 적었으니 응당 刈(예)처럼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에서 ‘위진(魏晉) 대의 사서에서 모두 (등애의 이름을) 艾로 적었는데 등애비(鄧艾碑)에는 乂로 적었다. 옛날에 艾는 또한 준예(俊乂) 삼예(芟乂) 예안(乂安)할 때의 글자와 통했으니 艾라는 이름은 그 음이 아마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소애(蕭艾,쑥)할 때의 글자처럼 읽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기(禮記)에서 쉰 살을 애(艾)라고 하였다. 또한 가 사재(士載)인데 이아(爾雅)에 따르면 의 시대에 를 재(載)로 불렀다고 하니 이렇게 따지면 를 짓는 전통적 방식에 맞다. 쉰 살까지 살으라고 한 게 이상하겠지만 이때의 평균 수명은 쉰 살도 나름 오래 살았다고 할만큼 짧았음을 기억하자.

5 강유와의 우열 논란

등애와 강유와의 관계는 삼국지 후반부의 메인 떡밥으로, 이 둘의 관계를 두고 등애가 강유의 공세를 여러차례 막아내었으니 등애가 더 잘났다, 눈에 띄는 전력차를 가지고도 잘싸운 강유가 더 잘났다 등 등애빠와 강유빠, 위빠와 촉빠 간에 늘 논란이 있다. 취존

강유와의 첫 전투인 조성 전투에서 강유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강행해 조성에 미리 도착, 강유의 진격로를 미리 끊은 것은 등애의 자질이 돋보인다. 하지만 255년 왕경이 적도에서 포위당해 진태가 구원하려고 나갔을 때에 등애 등은 왕경을 포기하고자 했던 것은 등애의 오판이었다. 진태가 없었으면 강유가 등애를 망신줄 수 있는 찬스였을까?

등애가 강유를 잘 막아낸 것이 맞지만 실제로 당시 위나라가 촉나라에 비해 인재나 병력 거의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강유가 거의 나홀로 원맨쇼를 했던 것에 비해 등애는 진태, 사마사 등 든든한 아군이 많았기에 결과만 가지고 두 장수의 우위를 섣부르게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뒷세대 왕조들이 꼽은 명장 목록에서 등애는 대부분 들어갈 정도지만 강유가 포함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는 음평산길을 넘는 기발하다기보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촉을 멸망시킨 공을 감안한 것이다. 그래도 등애가 촉의 대신들에게 '강유는 영걸이지만 나를 만나 곤궁하였다!'하고 자랑하고 다니는데도 식견있는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대에는 강유도 결코 낮게 평가받던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현대에 도입하면 등애는 똥별 수준의 병밀레로 저평가 받는다.

6 미디어 믹스

  1. 단작의 상소를 보면 죽을 무렵의 등애를 가리켜 '일흔노공(七十老公)'이라고 표현해서 대략 70 즈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한 이후, 등애 일가가 형주에서 여남으로 이주한 이후 12살에 전농부민이 되었다는 기록과 석포와 같이 활동했던 경력으로 보면 197년 이후 출생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면 70세에 사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군공으로 보나 관직으로 보나 대촉방면 관해선 정점을 찍었다.
  3. 덩샤오핑(등소평 : 鄧小平)은 등애의 54대손이다.
  4. 애가 그리 좋은 뜻은 아니다.
  5. 글자 뜻으로 볼 때 논농사나 숲이나 목초 따위를 관리하는 하급 관리의 명칭으로 보인다.
  6. 유세행 중인 공자의 근처에 나타나 봉혜봉혜(鳳兮鳳兮)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고 사라진 초의 광인 접여(楚狂接輿)의 이야기가 논어에 있다.
  7. 하지만 이후 종회의 무고로 지휘권을 박ㅋ탈ㅋ당했다. 그러나 촉한 멸망 이후 벌어진 헬게이트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새옹지마(...).
  8. 이 때 특이한 점은 등애는 촉한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사졸(士卒) 가운데 죽은 자들 역시 경관에 함께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군 전사자를 이런 식으로 경관에 함께 묻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에 대해선 촉병과 위병을 동등하게 대했다는 설과 자신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함이었다는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9. 전후한 교체기의 인물로, 성도를 깡그리 불태우고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였다. 공손술 항목 참조.
  10. 주로 위에서 칙령이 내려오면 "최전방에서는 사안이 긴급하면 명령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삼국지연의에서 제갈근이 관우에게 형주 반환을 요구하러 갔는데 관우는 유비와 제갈량의 명령도 씹었다.
  11. 연의에서는 강유가 종회를 설득해 등애를 죽인 것처럼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12. 위관이 두예보다 훨씬 벼슬을 오래하여 경력이 높았음에도 그리했다. 자기 행동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도 있겠지만 두예가 사마의의 사위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13.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의 실수를 말한다.
  14. 등애에게는 등충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 둘까지 모두 아들이 셋 있었는데 누구의 아들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장손이라고 하는 걸로 봐서 등충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