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빈병법

孫臏兵法

고대 중국의 병법서. 전국시대 (齊)나라의 전략가 손빈(孫臏)이 저자이다. 이 때문에 '제손자병법'이라고도 불린다.

사기에 손빈이 자신의 병법서를 저술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한서 예문지에서는 병서류에 제손자의 손빈병법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또한 한서 진탕전에 손빈병법을 인용한 것으로 보면 한서가 쓰인 후한 시기까지는 손빈병법이 전해져 내려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후한 이후의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손빈병법이 유실되어 버렸는지 이후 수서의 경적지에서는 손빈병법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나라 고증학자들은 손빈병법의 실존여부를 의심했고 손자병법의 오기가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1972년 4월, 중국의 산동성 임기현 남쪽에 위치한 은작산의 나라 무덤을 발굴하자 한 무더기의 죽간이 쏟아져 나왔다. 학자들이 죽간을 분석해본 결과 손자병법, 울료자, 육도 등의 병법서들임이 드러났고 그중 89쪽의 죽간 형태인 병법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병법서가 실존여부가 불투명하였던 손빈병법이었다. 그 후에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손빈병법이 손자병법과는 별개의 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여담으로 발견 이전에 중국의 양대 고고학계의 거장들이 이 손빈병법이 실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평생에 걸쳐 자존심을 건 승부를 했는데, 결국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져 패자는 그날로 목을 매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물론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

발견된 죽간이 많이 훼손되어서 전체의 면모를 파악하는 건 어려웠으나 연구를 통해 약 11000여자를 해독하여 전체적인 윤곽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손자병법과 비교해보면 병법상에서 어떤 특이한 혁신적인 사상이나 흐름이 드러난 것은 아니며 손자병법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손빈병법의 핵심적인 주장은 전쟁은 늘 흐름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그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라는 것이라고.

손빈병법 내용중에 특이한 부분은 바로 손빈의 라이벌 방연의 최후에 대한 대목. 사마천의 사기 위세가에 의하면 방연이 손빈의 계략에 의해 매복공격에 당해 사살되었다고 나와있으나 손빈병법 첫 장인 금방연(擒龐涓)편에서는 마릉 전투 이전의 전쟁인 계릉 전투에서 방연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하였다. 상이한 내용이라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손빈병법을 번역한 평론가 신동준은 방연이 계릉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고, 풀려나서 사기에 기록되로 마릉 전투에서 방연이 전사한 것이 맞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손빈병법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사기보다는 더 오래된 기록이고 손빈 자신과 손빈의 제자들이 남긴 기록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일단은 방연이 사로잡았다는 쪽이 더 맞을 개연성도 있어보인다.

일단 해독은 나왔지만 손자병법과는 달리 손빈병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번역서가 홍익출판사본, 신동준본, 중국의 호남인민출판사본 등등 번역본이 적어서 아직 인지도가 크게 밀리는 실정. 그래도 춘추전국시대에서 나온 책이라서 희소성은 높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통솔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고대무장이자 저자인 손빈이 들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