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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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øren Aabye Kierkegaard
1813년 5월 5일 ~ 1855년 11월 11일

1 개요

주체성이 곧 진리이다.

덴마크철학자.

쇼펜하우어, 니체 등과 함께 이전의 전통적인 철학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철학자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함께, 독실한 종교적 신앙심을 지닌 철학자로도 평가되고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쇠얀 키에르케고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한국 키에르케고어 학회에서는 후자를 발음상의 이유로 적극 추천하나, 사실 전자가 더욱 널리 쓰이는 편이다. 한국 키에르케고어 협회는 2011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글과 컴퓨터 프로그램에 써보면 키에르케고르도, 키에르케고어 둘 다 옳지않은 표기이다. 키르케고르가 옳은 표기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 지!) 덧붙이자면, Søren Kierkegaard를 덴마크어 발음으로 음독하면 [쇠안 키아거고][* IPA로 [sɶːɐn ˈkʰiɐ̯ɡ̊əɡ̊ɒːˀ]라는 발음으로 읽힌다. 따라서 엄밀하게 키에르케고어라는 발음도 제대로 된 발음은 아니다.

2 생애

키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르케고르는 아버지가 57세, 어머니가 45살일 때 출생했으니 이른바 늦둥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 명이 모두 후처 소생으로, 전처는 자식이 없이 죽었다. 그런데 이 일곱 남매의 어머니는 본래 키르케고르의 아버지 집에 가정부로 있던 사람으로, 결혼한지 다섯 달 만에 아이를 낳았다. 이런 사실은 워낙 양심적이었던 키르케고르의 아버지가 일생을 두고 괴로워한 고뇌 중 하나였다. 맏형 페터는 후에 목사가 되었고, 둘째 형은 상인이 되었으나 젊어서 미국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또 하나의 형은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누나 둘은 자라서 결혼을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어려서 죽었다. 아버지가 여든두 살에 돌아가셨을 때, 남은 형제라고는 페터와 쇠얀 뿐이였다. 쇠렌 키르케고르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의 형 페테르 크리스티아는 이후 루터교 교주로 활동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회프딩은 '키르케고르의 어머니는 다순하고 명량한 부인이었다. 쇠얀은 모친으로부터 쾌활한 성격을 물려받았으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음울함과 서로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고 말하고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근엄하고 지극히 신앙적인 사람이었으나, 그가 어린 시절 목동이었을 때 산 위에 올라가 주님을 모욕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후처와의 비교적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생각이 그가 태생적으로 지니고있던 우울함과 뒤섞였고, 이는 키르케고르의 가정이 극도로 엄격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쇠렌의 어린시절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것으로 보인다.(키르케고르 자신의 표현으로 '광기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으며, 그런 이유로 키르케고르는 "나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라고 한탄하곤 했다. 일찍이 애늙은이였던것)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소크라테스에 주안점을 둔 아이러니 개념론>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84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와중에 그는 1840년에 자신보다 열 살 연하인 레기네 울센이라는 연인과 약혼했으나, 불과 1년여 만에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공부를 계속하러 떠난다. 그의 갑작스런 파혼에는 결혼에 대한 환멸,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위해서는 결혼과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깔려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끔찍한 고뇌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야 하는 인간"으로 여겼다.

결별 이후 그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여 각종 저작들을 내놓는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 1844년의 <불안의 개념>과 <두려움과 떨림>, 1845년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 등의 주요 저작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여 출판되었으며, 그는 훗날 이 책들의 원저자가 자신임이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익명을 고수하였다. 이 시기의 저작들은 주로 헤겔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후 그의 저작과 관련된 논쟁 속에서 그는 한동안 가명으로 저술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1849년의 <죽음이 이르는 병>이나 1850년의 <기독교의 훈련>을 출판하던 시점에는 다시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그는 기독교, 특히 당시 덴마크와 독일의 주류였던 루터교 교회의 비판에 집중하였다.

키르케고르는 평생 특정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으며,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을 전부 저술 활동에 사용하였다. 이후 그는 1855년에 42세의 나이로 거리에서 쓰려졌고, 한 달여 뒤에 목사로부터 성만찬을 받는 것을 끝내 거절하고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마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폭탄은 터져서 불을 지른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는 훗날 그의 철학이 재조명받으면서 현실이 되었다.

3 사상

한 세대 위의 쇼펜하우어가 근대 철학의 '이성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면 그는 헤겔 등이 구성하려 시도한 구성한 '보편적인 철학 체계' 자체에 도전함으로써 근대 철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특히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강조하였던 필연적인(이성적인) 운동의 법칙을 부정하였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인간학과 기독교 신앙의 두 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언제나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전개된다. 그래서 그의 문제의식은 "참다운(본래적인) 나란 무엇일까?"이다. 그가 내린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그의 유명한 문구인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진정한 자기'라고 말한다. 그는 삶 자체, 진리 자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근대 철학을 싫어하였는데, 객관적인 철학이란 자신의 문제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개인들이, 결단을 내리면서 생기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 그리고 진정한 삶이란 비객관적이고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즉 각자의 개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 일반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가 아니라 "특정 인간인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2] 따라서 그의 철학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면서도 윤리학적이다.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는 기독교인은 교화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실존을 분석하면서 3가지 실존을 언급하는데, 실존을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 나눈다.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의 철학은 윤리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인간 '실존'의 근원을 인간의 내적 인격으로 보았으며, 인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아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생에 대부분의 저작을 가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는 그의 이러한 사상과 관련이 깊다. 그는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진리란 없다고 생각하였고, 소크라테스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문을 전개하게 하여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만 '개인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적으로 공유하는' 전달 방식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의 저작은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에 비해 상당히 '시적'인데,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보편적인 진리란 없기에 하나의 사상은 특정 개별 인간들의 사례를 통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후기 사상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주요한 대상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도약이었고, 그러하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각종 성사나 의식을 주관하는 '이성적인' 교회 체계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는 신앙이란 보이거나 존재하지 않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라도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란 모든 사람들과 결별하여 '신 앞의 단독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은 선별적이고 논쟁적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 기독교 체계를 흔들고 그 정체를 폭로해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덴마크와 독일의 주류 기독교 신앙이었던 루터교 교회를 혹독하게 공격하였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실명으로' <선전>이라는 책자를 통해 "공공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죄를 하나 덜게 될 것이라"고 기존의 교회 체계를 공격하였으며, 기독교란 그 자체로 너무 숭고한 것이기에 자신은 본인을 차마 기독교도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4 영향

그나마 늘그막에 인정을 받았던 쇼펜하우어와 달리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그의 생애 동안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비타협적이고 자학적이며 급진적이기도 했지만, 그가 덴마크어로 대부분의 저술을 진행하여 유럽 사회에 그의 사상이 알려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한몫하였다. 그에 대한 논의는 1890년도에야 겨우 역사에 등장하며, 그의 전집이 출판된 것은 1909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대접을 받게 된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20세기 초반의 변증법적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실존주의나 기초존재론에 대한 모든 사상은 그를 시초로 하고 있다.

5 기타

  •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철학이 50년 뒤에 재조명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의 말이 들어 맞았다.[3]
  • 키르케고르의 전집은 약 60여권 정도[4]인데 그 중 일기가 30여권(..)이나 된다.
  1. 키르케고르,'주체적으로 되는 것',임규정 역,지만지고전천줄,2008,p25
  2. 그는 기독교의 교리가 이렇다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주체적으로 되는 것',임규정 역,지만지고전천줄,2008,p26-28 참고
  3. 비슷한 예로 니체 또한 자신의 철학이 200년 뒤에 재조명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200년이 되기 전에 니체는 일류 철학자 반열에 들어갔다.
  4. 오차가 있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