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실존[1]은 본질에 앞선다."[2][3][4]

-장 폴 사르트르-

1 정의

20세기문학철학 사조. 전후 프랑스독일에서 발달했다.[5] 보통 쇠렌 키르케고르를 시조로 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알베르 카뮈가 있다.

단, 이는 사르트르가 일방적으로 만든 개념으로써, 실제 여기 분류되는 철학자들은 사실은 현상학자나 과학철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서로 매우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존주의로 분류된다고 하여 같은 사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동양 철학으로 치면 제자백가유가, 도가, 병가로 임의적으로 나누는 식의, 편의적인 분류기준에 따라 같은 도가에 들어간 노자장자, 같은 병가에 들어간 손자와 오자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는 오류와 같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은 모두 개별 학자로써 접근해야만 한다. 심지어 사르트르는 사상 차이로 친우였던 퐁티, 카뮈와 각각 대판 싸우고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실존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는 현재 전무하며,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들 개개인들의 성향도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확실한 건, 여기로 분류될 수 있는 사상가들은 대개 철학에 보편적, 본질적 관념을 설정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는 것. 즉, "실존주의가 뭐다"하고 정의하는 것도 별로 실존주의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란 단어의 대강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본질주의(essentialism)와 보통 대비되는 주의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나 본질의 개념을 초월하고자 시작된 존재, 감성, 행동, 책임, 특이성(uniqueness)을 탐구하는 철학적 흐름을 실존주의라고 칭하는 편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다 라는것보다 그것의 존재 자체에 중심을 둔 사상.

부조리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애초에 여기에서 연결되는 상황주의 등의 후기 사회주의, 또는 부조리 문학 등은 아예 실존주의자로 분류될 만한 인물들의 영역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도 밀접하게 이어진다. 모더니즘의 기계론적, 본질론적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해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아나키즘으로 귀결되기 쉬운데, 보편적 원리보다 개별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특성 때문이다. 국가나 정당, 자본 등이 "본질적 진리"라고 선전하는 것을 의심, 해체하고 인간 개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내재적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 결국 실존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의 연결고리를 완성한다.

실존주의는 그 자체가 보편적 정의나 관념의 고착을 거부하지만, 사후적으로나마 이 사상적 조류의 특성을 정리하자면 대부분 보편성보다 개별성을, 초월적 가치보다 내재적 가치를 긍정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의 볼드처리된 문장 역시 실존주의에 대한 그다지 실존주의적이지 않은, 독선적인 보편화라고 비판할 수 있는 게(...) 실존주의의 특성 중 하나이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형이상학과는 상극이다. 종래의 형이상학적 가치 체계 및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자라난 사조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형이상학과 대척점에 있다고 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항목과 밀접하게 통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라는 명칭은 원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치안과 정치가 불안정했던 프랑스 파리에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그냥저냥 하루를 보내며 카페나 나이트클럽 등에서 모여드는 젊은이들을 인생의 목적도 없이 사는 놈팽이들이라는 경멸하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도 초기에는 이런 명칭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1.1 실존주의의 근원

실존주의의 확실한 근원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데, 실존주의란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키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등 철학자들의 유일성, 신과 인간의 관계 등에 관련한 연구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 실존주의적 주제들을 2차대전을 겪었던 전후 유럽의 문학가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논의함으로써 사회적 움직임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가브리엘 마르셀에 의해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그 근본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실존주의자임을 거부하거나 혹은 실존주의 자체를 몰랐음에도 실존주의자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음을 보았을 때 실존주의의 등장은 의도되었기 보다는 시대상에 관련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난 문학/철학적 움직임이 보이던 특이한 집합이 실존주의란 이름하에 통합됨으로써 정립된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실존주의 자체가 각각의 유일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완전히 "실존주의라면 이거다!" 할 만할 정도로 의미가 정립되지는 않았다. 부분적인 이유로 그런 식의 정의는 본질주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것이 실존주의인 듯하다.

1.2 실존주의란?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혹은 "주관성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한다(Si vous voulez, qu'il faut partir de la subjectivité)"는 것이다.[6]

[1]

- 해당 지식 IN 글에 명료하게 설명해 놓았으므로, 읽어보길 권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사르트르의 해석) 예컨대 의자가 있다고 하자. 의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다. 즉 의자는 누군가가 앉기 위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만약 어떤 의자가 앉을 수 없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의자가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의자의 형태를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앉을 수 있고,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의자인 것이다. 이 경우 의자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즉 원래의 목적(본질)과 상관없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실존)이 그 목적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자와는 다르다. 인간의 본질은 결정되지 않은데다 고정된 것도 아니다. 어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이 아니라, 일단 "신이 없음을 가정"하고 전개되는 것이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부른다.[7]

다만 위의 정의는 오직 사르트르의 실존과 존재에 대한 것이지, 다른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지목되는 니체나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키르케고르의 경우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괴롭지만 신의 의지로 회귀하여 그것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8] 니체는 힘의 의지를 발현하여 초인이 되어서 삶의 고통과 무의미한 세계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뻥카를 치는 (종교 등의) 기존 도덕을 초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와 니체만 비교해봐도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지만, 어쨌든 간단한 교양서나 개론서 등에서는 둘 다 실존주의의 시조로 쳐 준다(...).[9]

전후 실존주의 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10] 부조리주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카뮈는 부조리한 이 현실과 인간조건에 반항하며 살아야 한다고 필력한다. 이러한 문학적 사조는 국내의 근대 문학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6.25 전쟁과 그 이후 사회의 부조리함, 비참함을 다룬 전후 소설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을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존재론자(Ontologist)라고 주장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의 사상은 실존주의자로 오인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긴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실존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간단히 말해 그를 실존주의자라고 이해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지만, 공교롭게도 고등학교 과정의 윤리와 사상 교과서뿐만이 아니라 수능연계교재인 수능특강의 윤리와 사상 교재까지도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와 묶어 다루고 있다! 근현대의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이 하이데거에게서 기반 이론을 많이 빚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해당항목도 참고하길 바란다.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라고 보았다. 근데 정작 공산주의자들은 사르트르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 지가 무슨 연금술사마냥 전혀 다른 두 사상을 합치려고 한다면서.[11]

2 신정통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항목 참조.

3 대표적인 인물

3.1 작가

3.2 철학자

4 대표적인 작품

4.1 문학

4.2 철학

5 대한민국의 실존주의

한국전쟁전후 한국에는 기존 도덕관념 등 수많은 사회통념이 전쟁으로 파괴당하고 남은 것은 인간의 본성과 기회주의 등 부정적인 면이 남았다. 지식인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인간의 휴머니즘과 본성 회복을 외쳤으며 그때 문예지/교양지에서 소개한 실존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이 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문학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다.

5.1 대표적인 작품

5.2 대표적인 인물

6 심리치료 기법 중 하나

심리치료와 상담의 세계
정신분석 치료행동주의 치료인지치료
인간 중심 치료실존주의 치료

의미치료
생물의학적 치료
현실치료게슈탈트 치료아들러 심리치료
여성주의 치료수용-전념치료연극치료
(사이코드라마)
가족상담마음챙김코칭
내면아이목회상담동기화면접법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무엇을 하고 있지?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 스누피

여기서는 실존주의 치료라고 부른다.

한때 심리학계에 몰아쳤던 실존주의 신드롬(?)을 등에 업고 나타난 분야이다. 이 분야는 실증적인 부분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논리적으로는 꽤나 그럴듯해서, 예컨대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이라든지 죽음 현저성(mortality salience)이라든지 하는 이론과 개념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날에도 이 분야는 여전히 실험실존심리학(XXP; experimental existential psychology)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상태.

실존주의 심리치료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5가지가 있는데, 간혹 이를 실존주의의 Big5라고도 한다. 정확하게 아는 분은 수정바람.

  • 죽음(Death) : 인간은 결국 죽는다.
  • 정체성(Identity) : 추가바람
  • 유리(Isolation) : 인간은 결국 고독하다.
  • 의미(Meaning) : 인간만사는 결국 무의미하다.
  • 자유(Freedom) :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유명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V.Frankl)의 로고테라피(의미치료) 역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로는 S.R.Maddi 같은 인물들의 주도로 생의 의미, 강인함(hardness), 역경과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 등의 분야에 공헌하는 중이라고.

이쪽에서는 내담자 상담가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고, 너나 나나 똑같이 실존적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저항할 수 없는 가혹한 시련과 운명에 마주하며, 죽음과 고독, 무의미함과 자유를 놓고 그 상황을 초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흐름은 특히나 "극도의 시련을 겪고 있을 때에조차 인간은 어떻게 대처하고 바라볼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 는 프랭클의 어록으로써 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1. 일본에서 처음에는 현실존재라는 단어로 번역했으나 철학자 구키 주조(九鬼周造)가 그냥 '실존'으로 줄였다고 한다. 본질은 본질존재의 준말.
  2. "현존재의 본질은 언제나 그의 실존에 있다" 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약간 비튼것이다.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가 본질을 부정한 것과는 반대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 분석을 통해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인간은 이미 세상에 내던져진 채로, 세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에 의한 책임을 지고 있다(피투성).
  3. 그리고 그 던져짐이란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현사실성). 인간이 그러한 상태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고려하며 어떠한 입장을 떠올린다(실존성). 그리고 그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머릿속의 입장을 세상에 스스로 내던진다(기투성,사르트르는 앙가주망이라고 불렀다.). 종합하여 표현하자면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피투되어 자신의 존재 이해를 바탕으로 실존을 위해 기투한다.' 이런 점에 의하여 인간 현존재는 자신의 의식 안에서 미래 자신의 목적을 정함에서, 자기 자신을 앞선다.
  4.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존재가 선험적인 존재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현존재인 인간은 명료하게 대답할 수는 없으나, 세상과 자기 자신의 이해를 통하여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고 다른 존재자들을 관찰하거나 도구적으로 사용해 자신이나 타인의 어떠한 목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는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선험적 존재이해를 가지고있다. 그렇기에 선험적 존재이해를 가진 현존재 분석이 존재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며, 실존주의에서는 본질의 문제를 부정하고 실존과 기투 문제에 집중한다.
  5. 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비과학적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현대 철학에서 영미 분석철학이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6.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中
  7. 종교에서는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따라 이미 인간의 목적이 생겨버린다. 그렇기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없다고 역설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8. 일단 키르케고르는 신학자였고, "신을 단순히 믿고 따르는 건 맹종이며 신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도 신을 믿는 것이다"라고 했다.
  9. 관점에 따라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을 무신론적 실존주의, 키르케고르, 마르셀, 야스퍼스 등을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분류하기도 한다.
  10. 카뮈는 '실존주의가 끝나는 곳에서 나는 출발한다'고 말한 바 있다.
  11. 실제로 사르트르는 공산당을 지지했다가(6.25 전쟁에 대해 평가하면서 북한의 남침을 옹호한 흑역사가 있다.) 우익 쪽으로 가는 등 변동이 심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양측 모두에게 까인 셈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박쥐(...)고, 좋게 보자면 실존주의자답게 사상이 유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예컨대 6.25전쟁 때는 공산권을 옹호하다가 아나키즘적 성향을 가진 알베르 까뮈 등에게 까인 적이 있고, 반대로 까뮈가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를 비판하기도 하는 식.
  12. 해석에 따라서는 실존주의보다는 형이상학, 존재론 계통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실존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된다.
  13. 정작 이 작품을 쓴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로 자처하지 않았다고.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