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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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Wilhelm Nietzsche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1 개요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해자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즐거운 학문(1882) 中

때려부수는 철학자[1], 다이너마이트[2], 비도덕주의자, 안티크리스트, 의심의 학파, 적극적 니힐리스트, 무신론자, 현대 유럽 철학의 시조, 서양철학의 거인 중 한명, 신살

19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시인, 음악가[3], 문헌학자, 문화 비평가, 심리학자, 계보학자, 미학자, 철학자 그리고 문제적 인간. 급진적인 사상으로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4] 특유의 공격적 비판으로 인해 오인되기도 하며, 평가 또한 극으로 갈리지만 정작 니체 본인은 세간의 오해를 특이한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었다. "모든 심원한 사상가는 오해되는 것보다 이해되는 것을 더 두려워 한다. 왜 그대는 그것을 나처럼 그다지도 힘들게 생각하려 하는가?" <선악의 저편> 中

2 생애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생일이 똑같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5] 목사였던 아버지는 니체가 5살 때 뇌질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할머니 집에서 고모들,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쇠약했다. 1864년 본 대학교에 진학해 신학과 그리스 문헌학을 배웠다. 목사 집안에서 자랐지만 기독교를 가장 호되게 비판한 철학자이다. 기독교적 개념들은 모두 미신이라 생각하여 믿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도덕은 삶에 대한 범죄이며, 인류를 망쳐버린 그것이다.[6]

아버지는 목사. 어머니는 목사 집안 출신. 어렸을 때 집안 사정이 복잡했다. 부모님, 할머니, 미혼인 두 고모와 함께 살았다. 집안 여자들이 걸핏하면 엄마를 구박했다. 아버지는 유약해서 엄마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는 니체가 5살 때 뇌경색으로 죽었다. 이후 니체는 여성들 틈에서 성장했다. 니체의 무신론은 가정환경이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부장의 권위가 없는 가운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기에 정신적 부담이 컸다. 니체는 사춘기 즈음에 기독교에 깊이 매진하며 경험하지 못했던 권위를 찾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은 종교에서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이 즈음 니체가 썼던 시가 발견되었는데, 그 시는 슬픔과 곤란에 빠진 남자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예수는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니체의 종교관은 이때부터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시절부터 작곡 활동이나 시를 짓는 등 음악과 언어에 재능을 보였으며, 24세의 나이에 바젤 대학교 문헌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아무런 학위가 없었다. 아무런 실적이 없는 학생을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데려간 예외적인 경우. 당시 바젤 대학교는 리츨(F. W. Ritschl) 교수의 추천과 니체의 문헌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 때문에 이러한 이례적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바젤대 교수로 있던 시절 인근에 거주하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되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바그너가 점차 독일 제국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여긴 니체는 1876년 바그너와 결별하게 된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의무병으로 종군했다. 그러나 병으로 귀환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병에 시달렸다. 1879년 건강 악화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후 10년간 유럽을 떠돌며 주요 작품을 집필했다. 1889년 1월 3일을 기점으로 정신이 나갔다.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목격하고는 울면서 그 말을 감싸안다가 넘어졌다. 이 날 작성된 편지[7]를 보면 그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니체가 제정신을 가진 마지막 날로 사실상 그의 기일이다. 그의 정신착란을 두고 매독이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니체의 매독설은 1947년 니체 비평가인 빌헬름 랑에-아이히바움이 "니체가 학생 때 라이프치히의 한 창녀로부터 성병에 걸렸다는 말을 베를린의 한 신경학자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밝힌 데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이 니체가 매독에 걸렸다는 근거로 추후 여러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인용되면서 매독설이 확산됐다고 한다. 현대 의학에선 뇌종양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8]

말년엔 정신 발작으로 몸과 마음이 더 쇠약해져 10년동안 부모님과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가 없었으며 식분증 증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뒤 병이 악화되어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니체는 평생 독신이었다. 1882년 루 살로메라는 여자와 친분을 맺고 청혼했으나 차였다. 루 살로메의 회고에 의하면 니체는 자신보다 17살이나 연상이었다. 게다가 지독한 사시 때문에 자신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고, 치질까지 앓고 있어서 10분마다 앉는 자세를 바꿨다고 한다. 이런 남성에게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3 사상

"주거를 제공하고, 오락을 제공하고, 음식과 영양을 제공하고, 건강을 주었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불행과 불만을 느낀다. 사람은 압도적인 힘[9]을 원하는 것이다.

-아침놀 中

  1. 자기긍정
니체는 기본적으로 귀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의미의 귀족주의가 아니라 정신의 귀족주의를 말한다. 본인도 어떤 사람이 귀족인가 아닌가는 어디에서 왔는다(=혈통)가 아니고, 어디로 가는가로 분별해야한다고 말했다. 귀족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해 자기 자신의 의욕을 긍정하는 인간이며, 또 자신의 의욕을 이루기 위해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인간과 도덕을 두 부류; 노예와 귀족. 노예의 도덕과 귀족의 도덕으로 구분짓는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노예의 덕은 헤브라이즘이고 귀족의 덕은 헬레니즘이다.[10] 니체에 의하면 기독교란 노예의 도덕이다. 기독교에서는 자기부정을 가르치는 탓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와 플라톤, 마누 , 유대교 교사들은 거짓말쟁이이며, 불교 또한 데카당트하다. 이들은 하나 같이 자기 욕망의 긍정을 말하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니체는 극기복례를 넘어선 자기극복을 말하게 된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란 바로 자기를 극복한 인간, 즉 뛰어넘은(über) 인간(mensch)을 가리킨다. 그런데 무엇을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앞서 쓴 것처럼 '속세를 이긴 자(wer überwindet)'를 뛰어넘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11][12]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이라는 오류를 최초로 고안해낸 인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도덕의 오류를 최초로 인지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성실성을 통한 도덕의 자기 극복, ...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지시하는 의미이다.[13]
  1. #2 자기긍정을 방해하는 노예도덕을 때려부숴야 된다는 사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예도덕과 노예도덕이 근거하는 도덕적 세계관을 때려부숴야 한다는 뜻이다. 도덕적 세계관은 다시 저편세계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니체의 도식을 간략화하면 다음과 같다. '저편세계(천국, 이데아 세계) - 도덕적 세계관 - 노예도덕'을 때려부수자! 왜냐하면 그들(도덕주의자)은 '지상의 삶'에 대해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2. 윤리
전술한 바와 같이 니체는 도덕을 2가지 종류, 소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이라 불리는 것으로 구분 짓고, 인간의 삶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불필요하게 옥죄고 구속하는 것들을 비판했다. '신은 죽었다'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로, 신의 명령, 이성중심주의, 절대적 법칙 등을 인간이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행위는 짓에서 벗어나자는 것. 즉 신은 비단 종교에서 믿는 신이나 인간을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감성, 경이로움 등의 형이상학적인 것조차 '호르몬에 의한 착각일 뿐 바보같은 짓이다'라는 염세주의자 혹은 과학 신봉자가 있다면, 그것이 곧 그를 옥죄는 도덕률이자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니체가 등장한 근대 철학은 종교보다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측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인간상을 만들어두고, 그에 부합하지 않으면 정신병원에 넣는 방식. '신은 죽었다'는 말이 알려지면서 니체는 기독교만을 싫어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기존의 절대가치들을 모조리 때려부쉈고, 그 배경엔 니체의 도덕관이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기존의 규범들을(Nomos) 비판하며, 전통적인 규범들이 생의 활력을 빼앗아간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이나 순종 등의 소극적인 가치들. 그것들은 더 이상 미덕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4 음악 그리고 문화

니체가 작곡한 관현악 합창곡 <생애의 찬가>(Hymnus an das Leben), 1887년 작품.

니체는 10세 때 모테트(Motette 성서 구절을 다성적으로 다룬 무반주 악곡)를 작곡하는 등 10대 시절부터 짧게 작곡 활동을 했었다. 안타깝게도 청년 시절 이후부터는 본업인 저술에 몰두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작곡에 할애하지는 않았지만, 바쁜 활동 와중에도 오페라나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음악 스타일은 슈만과 흡사했다고. 음반으로 나와있는 것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24세의 나이로 바젤대 교수로 임용되었던 시절 인근에 거주하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깊이 교류했다. 바그너가 니체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여러가지로 적지 않은 것이었다. 니체가 바그너와 친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둘 사이엔 여러 공통분모가 있었다. 니체는 10대 시절부터 바그너의 음악을 알고 있었고, 바그너의 곡을 직접 피아노로 치기도 했다. 니체의 전공 중 하나가 그리스 문학이었는데, 오페라를 그리스 비극으로 돌려놓자고[14] 주장했던 점,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심취. 바그너는 젊은 시절부터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그의 오페라에도 그의 사상을 많이 반영했다. 니체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바그너보다 쇼펜하우어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위스 산골짜기에서 별로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에 니체는 거의 매일 같이 바그너 집에 놀러가 거기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바그너와 니체는 31년이나 나이차이가 났는데, 아버지 없이 자랐던 니체는 바그너 부부에게 거의 부모와 같은 정을 느꼈다고 한다.

바그너와 많은 사상을 공유하게 된 니체는 자신의 첫 작품인 '비극의 탄생'을 통해서, 예술 본연의 정신을 살리고 있는 작곡가로 바그너를 지목한다. 하지만 이후 서서히 여러가지 이유로 니체는 바그너의 예술에 회의를 품게 된다. 바그너 작품들 자체가 내재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불일치에 대해 점차 회의를 가지고 혐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876년 바그너가 25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여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초연을 보고 나서 바그너에 대한 회의가 심화되었으며, 1882년 바그너의 유작 '파르지팔'의 초연을 보고 바그너가 기독교에 굴복했다고 비판하며 그를 데카당스로 규정하고 바그너로부터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1882년 작고하기 수개월 전 베니스에서 요양하고 있던 바그너와 그의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나 담담하게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미 그전부터 니체가 심심치 않게 바그너를 비판하는 글을 써오던 차였기 때문에 바그너도 니체와의 결별을 예상하긴 했으나, 그로부터 직접 결별을 선언받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자신의 정적들에게 언론을 통해 가차없는 독설로 비판해왔던 바그너였지만 니체에 대해서는 매독으로 정신적으로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언급한 것 이외에는 니체의 공개적인 비판에 대해서 따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한 뒤부터 1889년 전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완숙미가 넘칠 시기에 에세이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등 바그너를 공격하는 저서를 여러 권 저술했다. 이에 대해 니체가 정작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튜브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그너의 만년 음악극은 바그너 생전에도 상연된 적이 거의 한두번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 오늘날의 기준만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튼 바그너로부터 결별하며 그에 대해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니체 개인으로서는 뼈아픈 일이고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었지만,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가치가 없었고, 그렇기에 잊혔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아들도 아니고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던 니체로서는 바그너의 말기 오페라에서 신에 대한 인정과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후 극심한 정신분열상태가 더욱 심해졌다. 애초부터 바그너와 친해진 연유도 일찍이 쇼펜하우어와 교제하며 그의 사상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바그너를 니체가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즉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이상 니체는 더 이상 바그너와 함께할 이유가 없었던 것.

(참고 -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쇼펜하우어도 깠다. 그는 아무 희망 없는 염세주의 역시 기독교나 형이상학 못지 않게 미워했다.)[15]

어쨌든 바그너와의 열렬한 키배(...)와는 관계없이, 음악 자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음악이 인간 특유의 감성과 낭만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샀으며, 따라서 음악 중에서도 교향곡 등의 순수 기악보다는 즉흥 연주곡, 소나타등을 더 선호했다. 그가 한 때 바그너에게 끌린 이유 역시 바그너의 음악에 들어있는 그리스 비극으로의 회귀라는 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그의 스탠스에도 변화가 어느 정도 오는데, 이는 "비극의 탄생"에 그가 1884년에 붙인, "자기비판에의 시도"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학 쪽에서 본다면 "스탕달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라 할 정도로 스탕달을 높게 평가했으며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도 "내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라면서 격찬했다. 반면에 "보바리 부인"의 작가 플로베르를 허무주의자로 단정하고 안 좋은 방향으로 평가했다. 스탕달이 사실주의 문학의 시조격인 인물이고 플로베르 역시 사실주의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작가임을 감안하면 약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모파상에 대해서도 호평했고, 대체로 프랑스 문학이나 예술을 좋아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 근거로 "모든 유럽적 교양 가운데 나는 오직 프랑스적 교양만을 인정한다.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오해이다."라든가, "독일이 닿으면 문화가 썩어버린다." 등의 글을 남겼다.

한편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해서는 아주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로 비추어봤을 때 도덕적 기준에 맞춰 숨기고 포장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원시원하게 까발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5 오해와 진실

무신론자였다가 말년에 정신병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 때문에 공연히 종교계(특히 기독교 계통)의 샌드백이 되기도 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온건한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거없는 주장이다.

내 나이 12살에 나는 기발한 삼위일체를 생각해냈다
즉 신-아버지, 신-아들, 신-악마라고 하는.

나의 결론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과정에서 신성의 2번째 인격을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해 그는 자신에 반대되는 것을 생각해내야 했다는 것.
말하자면 창조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 그럼으로써 나는 철학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고 17권

“내가 여성 자체에 대해 말하는 몇 가지 진리는 [...] ‘나의 진리’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니체는 19세기의 철학자였음을 감안하더라도 특유의 공격성 짙은 발언 등으로 인해 성차별주의자였다는 의혹이 따라 붙고, 이는 현대 학계에서도 해석에 따른 의견차가 상당하다. 성차별주의자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그의 발언[16][17] [18]이 여성의 권리에 대한 반감을 여과없이 드러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발언[19]을 인용하며 "여성은 철학적 차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 진리라고 주장된 것은 서투른 독단이고, 실제 진리의 모습은 여성의 태도와 행위에 가깝다는 관찰이 그것이다."[20] 와 같이 여성성을 진리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여성성의 재발견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또 해체론적 관점에서는 니체가 현대적 페미니즘과는 다르게 사회적-정치적 관점에 갇히거나 국한되지 않은 철학적 분석과 주장을 하였다고 말한다.[21] 니체가 살던 시기가 19세기였던 것과 당대의 사회적 한계를 감안했을 때 이런 내용은 오히려 진보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독일의 독특한 보수적 성향과 1860년대 중반 이후의 독일 자유주의의 쇠퇴, 독일 중간계급의 정치적 취약성의 결과가 반영된 19세기 독일 여성운동의 성격은, 교육의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어머니로서의 소양교육 정도에 만족하고, 기혼여성의 재산권이나 자녀에 대한 권리를 말하면서도 그 적극적 모색에는 주저하며, 여성참정권에 대한 강력한 주장도 오랫동안 표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여성의 권리와 요구가 증대한 것에 비해 감소되어 왔다”는 말에서 처럼, 초기 페미니즘의 동일화 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22]현대 제3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가 제기했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의 평등을 위해 니체를 재평가한다. 성성이 지니는 고유한 장점을 결핍으로 파악하고, 이를 인위적인 남성성과의 동일화운동으로 없애려한 당시의 페미니즘의 경향은 니체가 볼 때 여성성을 죽이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를 과거의 페미니스트들처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1]

여동생에게 하악하악하는 시스콘이라는 루머가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이 루머는 니체가 썼다는 '나의 여동생과 나'라는 책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책은 후에 위서로 밝혀졌으며, 방대한 문헌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출간하여 현재 정본으로 평가받는 비평판 니체 전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여동생과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그리고 여동생이 반유대주의자와 결혼하자 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니체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를 옹호했다는 오해가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정작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들을 자기 앞에 나타나면 확 쏴버리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싫어했다. 이러한 오해는 니체의 여동생에게서 나왔다. 니체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인종주의자였다. 그녀는 니체가 죽은 후에 니체의 메모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짜집하기하여 자기 멋대로 책을 만들고는 니체의 이름으로 팔아먹었다. 이 책의 제목은 '힘에의 의지'. 니체가 저술 계획만 세우고 저술을 포기한 책이다. 현재 이 책은 비평판 니체 전집에 포함되지 않는다.

니체는 사상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을 비판하긴 했어도, 히틀러처럼 인종적인 이유로 유대인을 공격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니체는 유대인의 노예도덕이 기독교의 근본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반면에 유대인을 오랜 고난의 세월을 통해 단련된 민족이며 질적으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평했다. 또한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논거가 단지 유대인들의 돈에 대한 시기와 질투, 원한일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저서에 들어가 있다. 애초에 그가 바그너와 갈라선 이유 중에는 바그너의 완강한 반유대주의적 성향도 포함되어 있다.

니체의 저서를 직접 보면 그가 전체주의와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혐오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니체는 공동체를 혐오했고 공동체의 도덕 또한 혐오했다. 니체는 창조적인 개인을 중시하는 탓이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공동체는 항상 사람을 천박하게 만든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정치제도의 민주주의를 공격했고, 이 역시 니체 옹호자와 비판자의 사이에 커다란 떡밥으로 존재한다. 비판자는 결국 그도 귀족주의자 였다, 니체 역시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의견과 니체는 민주주의가 가진 어두운 면인 중우정치를 지적한 것 뿐이라는 옹호가 존재한다. 혹은, 결국 민족, 국가의 틀안에서 '모두'를 지칭하고 그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자들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유럽인들의 위선적인 면모를 비판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니체 본인이 원체 과격한 논조를 구사했고, 상호모순적인 텍스트를 남겼으며, 그가 비판한 당시 유럽 사회가 결국은 현대 사회들의 기본틀이었다는 점이 결합되어 현재에도 거센 논쟁을 만들어낸다.

모든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산다는 건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곳.
그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6 인용구

보라, 우리의 주위가 얼마나 풍만한가를! 이와 같이 넘쳐흐르는 자연 속에 먼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신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Ubermensch)'을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나는 이 억측이 그대들이 창조하려는 의지를 넘어서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있었는가 -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간구하노라. 모든 신에 대해 침묵을 지켜라. 그대들은 능히 초인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 中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언젠가 나의 이름에는 엄청난 사실이 추억으로 연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에서 전대미문의 대 위기와 가장 심원한 양심의 갈등, 그리고 이제까지 신뢰되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역하며 만들어졌던 결정에 대한 추억 말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다이너마이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 속에는 어떤 종교의 창시자와 같은 사고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란 천민의 관심사이다. 나는 신앙을 갖고 있는 무리들과의 접촉 뒤에는 손을 닦고 싶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며 이것이 또한 나를 탁월한 파괴자로 만든다.
-이 사람을 보라 中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 [2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24]

-선악을 넘어서 中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더 이상 자신있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라.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살아있는 한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철학자들이 "도덕에 논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 이라고 불렀고, 알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은 ,'적절한 조명에 비추어 봤을때', 그저 당시 지배적인 도덕에 대한 "맹신"의 배운 형태이며, 그것의 새로운 '표현 방식'에 불과해, 결과적으로 확고한 도덕이라는 하나의 구체 내부의 '사실문제(matter-of-fact)'에 불과하며, 그것의 궁극적인 동기에서, 이러한 도덕에 대한 '그것의 정당함에 대한 의문'의 어떤 종류의 부정이다──또한, 이러한 맹신에 대한 검증, 분석, 의심, 그리고 해부하려는 행동들과 정반대의 것이다...

-선악을 넘어서 中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묘비명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라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다 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신은 인간을 죽임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자신을 '정의'로 정의한다. 니체는 정의라는 진리를 죽임으로서 자신에게 정의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진리의 말살은 곧 진리.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신을 죽인다. 하지만 니체는 외친다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우리는 신을 죽인 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 즉 삶의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신은 이미 죽었다. 신이 된 우리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리는 풀 수 없다. 우리는 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들 외친다. 하지만 우리가 죽인 신이 만들었던 영원 불멸의 시스템은 행복과 슬픔, 분노, 공포 모든 감정 느낌을 허무하게 만든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그대의 몸은 그대의 철학보다 더많은 지혜를 품고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7 저서

  • 권력에의 의지 - 니체의 저서 목록에서 제명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 나의 여동생과 나[25]
  •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26]
  • 메가라의 테오그니스 [27]
  • 비극의 탄생 [28]
  •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 [29]
  • 선악의 저편 (책세상 개정판 '선악의 저편', 청하판 '선악을 넘어서') Jenseits von Gut und Böse[30]
  • 아침놀 (청하판 '서광')
  • 안티 크리스트 [31]
  • 우상의 황혼 [32]
  • 이 사람을 보라 [33]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즐거운 지혜 (청하판 '즐거운 지식') (책세상판 '즐거운 학문')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 테오그니스 선집의 역사

8 한국어판 전집에 대해

니체 전집은 휘문출판사판(1969년), 청하출판사판(1982년), 책세상판(2000년) 총 세가지가 있다. 원고의 방대함과 치밀함은 책세상판이 높지만 번역 질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청하판은 80년대에 나왔고 중역이 많지만 그럼에도 니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책세상판과 달리 중요한 서문/평이 실려있으며 번역의 질이 우수한 작품도 있다. 대표적으로 니체의 말년작인 선악의 피안(청하 '선악을 넘어서')가 그렇다. 책세상판도 일부 단권으로 된 책은 서문이 달려있으며(ex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의 뒤에 해설이 달려있다.

9 관련 항목

  1. <우상의 황혼: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방법>
  2.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이 사람을 보라>
  3. "음악이 없는 삶이란 잘못된 것이다."
  4. "현대 철학은 아마도 니체 덕분에 가능할 것이다." - 들뢰즈-
  5. 니체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에 태어났다. 이 때문에 나에게는 한없는 슬픔을 안겨준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나에게 '프리드리히' 라는 이름을 안겨준 일이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생일날이 휴일이었다는 점뿐이다."
  6. <이 사람을 보라>,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7번글.
  7. "나는 인도에서는 붓다였고, 그리스에선 디오니소스였습니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는 나의 현현이며 셰익스피어와 바콘 경도 그와 한 가지입니다. 근래의 나는 볼테르였으며 나폴레옹이었고 어쩌면 리하르트 바그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무적의 디오니소스이며 지상에 축제를 불러오는 자입니다."
  8. 출처 원문
  9. 원문 Macht. 이 Macht를 일본 쪽에서 권력으로 해석하고, 국내 학계에서 이걸 그대로 "권력"으로 따서 쓰는 바람에 니체와 나치즘, 반민주주의논쟁 등의 떡밥에 활발한 불씨가 지펴졌던 바 있다. 21세기 이후에는 이걸 으로 옮기는 추세이다.
  10. 물론 이는 아주 극단적 표현임을 명심하자. 사실 따지고 보면 기독교는 이미 그 자체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동시에 수용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11.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금욕주의(혹은 자기부정)을 극복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12. 좀 더 정확히 하자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초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3가지로 나누고, 각각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했다. 금욕주의나 자기부정과 같은 일체의 노예도덕을 거부하고 극복한 단계는 '사자'의 단계로, 지배적인 권위와 가치에 의문을 품은 상태지만, 스스로가 가치를 창조하는 상태의 정신은 아니다. 일명 'Neinsagender Geist'로, 영역하면 "No-saying Spirit"정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삶을 긍정하는 정신은 '어린아이'의 단계로서,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에 가깝다.
  13. <이 사람을 보라> ,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3번글.
  14. 바그너 이전의 주류 오페라나 주세페 베르디 등 당시 오페라는 평범(?)한 인간들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최초의 오페라가 그리스 비극의 재현을 목적으로 했다는걸 보면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지도..
  15. 그는 염세주의는 이루지 못한 이상주의에 파생물이라며 약자들의 도덕을 가진 인간들에게나 어울릴법한 것이라며 극딜을 박는다. 쇼펜하우어 : ????
  16. 그래서 여자들에게 정치와 학문의 개별적인 부분들(예를 들면 역사학)이 맡겨진다면, 작지 않은 위험이 생긴다. 왜냐하면 학문이 뭔지 정말 안다고 하는 여자보다 무엇이 더 낮설겠는가?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No.416
  17. 여성 해방에 대하여 - 여자들이 사랑하는 데, 그리고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똑같이 느끼는 데 그렇게 익숙하다면, 그들은 도데체 고정할 수 있을까? 따라서 그들은 또한 어떤 사태에는 드물게 홀딱 빠지지 않지만, 사람에게는 자주 홀딱 빠진다. 그들이 사태에 홀딱 빠질 경우, 그들은 곧바로 이것들의 당파적 추종자가 되고 그로서 이것들의 순수하고 무구한 작용을 망쳐버린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No.416
  18. 그리고 여자는 복종해야 하고 그녀의 표면을 위해 깊이를 발견해야 한다. 여자의 정서는 표면이다. 얕은 물 위에 떠 있는, 움직이기 쉬운 폭풍우 같은 막. 남자의 정서는 그러나 깊어서, 그의 흐름은 지하의 동굴에서 졸졸 흐른다. 여자는 그의 힘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하지만, 파악하지는 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 그러므로 아마도 삶의 가장 강력한 마법은 이런 것일 것이다. 아름다운 가능성으로 빛나는 금실로 짠 너울이 삶 위에 놓여 있다. 미래를 예고하면서, 저항하고, 부끄러워하며, 조롱하는가 하면, 동정하고, 유혹하면서. 그렇다. 삶은 한 여자이다(니체의 저술 중 <즐거운 학문> No.339)
  20. 김진석 저술,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161~162P
  21. 김진석 저술,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163P
  22. [2]
  23. 그의 대표사상인 영원회귀 사상의 핵심 내용이다.
  24. 니체의 관용구 중에서 "신은 죽었다"와 함께 가장 유명한 말이다. 주로 독재자가 된 영웅과 같은 경우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25. 니체의 자서전이라고는 하는데 위작으로 판명 났다. 위에 나온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의 권미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은 1960년대에 철학자들에 의해 가짜라고 밝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선 니체가 시카고,뉴욕,샌프란시스코와 함께 디트로이트를 언급하며 그 곳에서 강연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디트로이트의 폭발적인 발전은 헨리 포드가 디트로이트에 자동차 공장을 세운 1903년 이후이다. 니체는 1900년에 죽었고, 죽기 10년 전에 정신병이 도져서 뭘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26. 도덕적 개념의 형성사를 다룬 책. 그래서 책 제목이 <도덕적 개념의 족보>이다.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노예도덕의 계보>라고 해도 된다.
  27. 테오그니스가 친서민적 시인이라는 학계의 주류적인 해석에 반대하며, 테오그니스를 귀족주의자로 해석하는 논문이다. 니체가 쓴 최초의 논문으로 라틴어로 씌여졌다. 읽고 싶으면 영어 라틴어 합본을 보자. [3] 한국어 번역본은 있는지 모르겠다.
  28. 장르가 다양하다. 미학책, 철학책, 문헌학책. 원래 문헌학 책으로 씌여졌는데, 문헌학자 사이에서 엄청나게 까였다. 해당 서적 출판을 계기로 학자 집단에서 영영 왕따당하게 된다. 혹은 니체가 다른 문헌학자들을 왕따시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로어셰크
  29. 니체 저술 중 가장 짧고 쉬운 논문이다. 분량도 30페이지 정도밖에 안되며 철학에 교양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고나서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수준. 니체의 초기 사상이 가장 명료하게 결집된 텍스트.
  30. <짜라투스트라>의 해설서. <짜라투스트라>는 읽어도 뭔말인지 모르지만, 이건 그래도 이해할만하다. 아홉장으로 나뉘어 기술되었는데, 첫장에서 실체론을 비판하며 시작된다.
  31.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기독교를 까내린다. 기독교는 찌질이들의 망상이고, 불교는 실증적인 종교이다. 기독교는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헛소리를 하고, 불교는 실제로 존재하는 '고통'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고통'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이는 니체의 관점과 상충된다. 불교와 기독교는 큰 갈래로 보면, 둘 다 퇴폐적인 종교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모두 지상에서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바라보는 탓이다.
  32. 소크라테스와 칸트를 집중적으로 까대는 서적으로, 책 제목이 패러디다. 신들의 황혼(라그나로크). 바그너 오페라중에 저 이름을 가진게 있었지...?
  33. 니체의 자서전. 본인의 다른 저술에 대한 해설이 많이 씌여져 있기에 다른 저술들을 읽고 이해하지 못했을 때 참고삼아 읽어도 재미있다. 우상의 황혼과 같이 책 제목이 패러디다.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옷을 입은 채로 나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다!' 하였다." <요한복음> 19:5
  34. 영어권에서 Übermensch를 superman으로 번역하기도 했고, 실제로 DC 코믹스의 슈퍼맨의 모티브가 니체의 초인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니체에게 슈퍼맨 타이즈를 입히는 등의 유머가 있지만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편. overman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원어 그대로 Übermensch라고 쓰는게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