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케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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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케이시(鈴木 啓示)
생년월일1947년 9월 28일
국적일본
출신지효고현 니시와키 시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65년 드래프트 2위
소속팀긴테쓰 버팔로즈(1966~1985)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영구결번[1]
No.1

1 소개

일본의 전 프로야구선수이자 감독.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300승 투수.

별명이자 인생의 좌우명은 초혼(草魂). 약팀에 있으면서, 공의 위력이 떨어져가는 와중에도 잡초처럼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선수생활을 빗댄 별명이라 하겠다.

2 선수 시절

1965년 드래프트 2위로 긴테쓰에 입단. 원래는 한신이 1순위로 지명하지 않을까 했지만, 한신은 스즈키 대신 이시도코 미키오라는 투수를 지명한다.

입단 2년차인 1967년, 44경기 21승 13패 평균자책 2.77의 성적을 거두고, 탈삼진 222개로 퍼시픽리그 탈삼진왕을 차지하면서 긴테츠의 에이스로 자리매김 했다. 이듬해에도 25승에 무려 305탈삼진을 기록하였고, 그 뒤로도 좌완 파이어볼러로서 1967년부터 5년 연속 20승, 6년 연속 퍼시픽리그 탈삼진왕을 따내며 에이스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동 기간 센트럴리그에도 에나츠 유타카가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을 6연패 하며, '세리그의 에나츠, 파리그의 스즈키'라 불렸다.

그러나 72년부터 갑자기 탈삼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2] 구위가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스즈키는 서서히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처음에는 기교파로의 변신을 위한 니시모토 유키오감독의 지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트레이드도 고민했지만, 75년 시범경기에서 4이닝 4실점으로 털리고 난 다음에야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그러면서 제2의 전성기가 오게 되었다.[3], 스즈키의 커리어하이 시즌도 사실은 이 시기. 1978년 시즌인데, 그 해 성적은 25승(1위) 10패 평균자책 2.02(1위) 178탈삼진(1위)인데,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단일시즌 25승 투수가 된 시즌이다. 그렇게 선수 생활을 이어 오다, 20번째 시즌인 1985년 이후, 노쇠화를 견디지 못하고 은퇴한다. 은퇴 후 그의 등번호 1번은 긴테쓰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된다.[4]

긴테쓰에서만 20년을 보내면서 통산 317승(역대 4위, 마지막 300승), 288선발승(역대 1위[5]) 선발 등판 577번[6](역대 3위), 340완투[7], 71완봉승(둘 다 퍼시픽리그 역대 1위), 20승 이상 시즌 8번(퍼시픽리그 타이기록) 등의 기록을 보유하였다. 또한 통산 3061탈삼진(역대 4위), 무사사구 경기 78경기(역대 1위), 560피홈런(역대 1위) 등의 기록도 있는데, 이는 파이어볼러로서 정면승부를 즐겨 했고, 기교파로 전향한 다음에도 그 성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3 감독 시절

이렇게 영광의 선수시절을 보낸 그이지만, 감독 시절은 영 좋지 못했다. 전체적인 평은 '자신의 생각만 지나치게 고집하는 감독.'[8] 어쩐지 누군가와 많이 비슷한 평이다. 감독으로 처음 부임하자마자 1993년 스프링캠프에서 스파이크를 신고 러닝 훈련을 하라 했지만, 트레이닝 코치였던 타치바나 류지가 겨울에 스파이크를 신고 러닝하면 다리가 다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타치바나와 싸우다가 동년 시즌 종료 후 그가 퇴단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 성적도 4-2-6으로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중간의 1994년 성적인 2도 8월까진 최하위였다가 강력한 타선의 폭발로 겨우 해낸 성적. 그러나 역시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한 결정타는 노모 히데오에 대한 비난. 노모가 긴테츠에서 뛰었을 때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고[9] 스즈키 케이시 본인부터가 긴테츠의 레전드여서 본인의 의견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화를 일으킨 게 문제. 거기다 요시이 마사토 등과도 여러 차례 불화를 일으켜서 노모는 메이저리그로 떠나고, 요시이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스즈키는 그 후로도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인생 최대의 마스터베이션이라는 혹평을 내릴 정도로 노모 등과 다른 선수들을 비난하다 1995년 최하위를 찍으며 감독직에서 잘리고 두 번 다시 감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10] 그 뒤 긴테츠는 나시다 마사타카가 2001년 리그 우승을 할 때까지 내내 하위권에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제일 그런거 없었다. 영원히 왠지 팀의 상징색이 비슷한 모 팀의 레전드로서 감독하다 588 찍고 재계약하려 했지만 여론의 뭇매 맞고 자진사퇴하신 것과 더불어 팀의 암흑기를 부른 모 각동님너무나도 비슷한 행보지만 넘어가자

4 기타

다른 의미로나쌩. 유래는 다음과 같은데, 신인이던 1966년에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같은 좌완 투수이자 대선배이던 가네다 마사이치(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에게 커브를 던지는 방법을 배울려고 하자 ‘배우고 싶으면 돈을 갖고 와라’(...)는 말을 듣고 빡쳐서(...)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고 가네다가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이 되자 그 화를 풀면서(...) 가네다가 감독으로 있던 1973년부터 1978년까지의 6시즌 동안 롯데전 통산 26승 8패의 성적을 남겼다. 이런 것마저 각동님을 닮았던 건가... 아니지 정확히는 각동님이 스즈키를 닮았다고 해야 할 지도

  1. 본래 영구결번이었으나 오릭스와 긴테쓰의 합병으로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영구결번이 무효화 되었다.
  2. 269개 → 180개. 그렇지만 이 해도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6년 연속 탈삼진왕의 마지막 해.
  3. 하지만 탈삼진왕은 그 이후로도 두 번 더 탄다.
  4. 그러나 긴테쓰는 2004년 재정난으로 오릭스와 합병되었고, 스즈키가 오릭스의 영구결번 제의를 거부하면서 영구결번은 무효처리된다.
  5. 통산 400승의 가네다 마사이치는 의외로 통산 3위(268승).
  6. 그 당시로서는 보편적이였던 불펜 알바(...)를 정말로 싫어했다 한다. 구원승은 29승밖에 없으며, 통산 세이브도 달랑 2세이브.
  7. 단일시즌 30완투, 10연속 완투승 기록(1978년, 각각 퍼시픽리그 기록)도 있다.
  8. 본인도 인정했다. "역부족이었다. 내가 공을 던지는 기분으로 했으니까, 선수들을 제대로 사용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위축시킨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반성할 것이 너무 많다. 나시다 마사타카도 코치해서 도와주려 했지만 그게 안 됐다."
  9. 노모는 타치바나 코치와 전임 감독이었던 오기 아키라를 신뢰하는 쪽이였다.
  10. 거기다 1995년 노모가 메이저리그에 가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요시이는 그 해 야쿠르트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나큰 공헌을 했으며 타치바나는 그 해 파리그 막장팀이던 치바 롯데 마린즈바비 발렌타인과 함께 2위로 올려놓은 것까지 겹치는 바람에 스즈키는 최악의 감독으로 찍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