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감독) | |||
세리그 감독 | 파리그 감독 | |||
70px | 나시다 마사타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65px | 츠지 하츠히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
65px | 후쿠라 준이치 (오릭스 버팔로즈) | 70px | 이토 쓰토무 (치바 롯데 마린즈) |
65px | 쿠리야마 히데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65px |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현역 시절.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최후의 감독.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의 사진.(2010년)
2015년 10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취임회견 때.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No.99 | |
나시다 마사타카 (梨田昌孝)[1]) | |
생년월일 | 1953년 8월 4일 |
국적 | 일본 |
출생지 | 시마네 현 하마다 시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학력 | 시마네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
프로입단 | 1971년 드래프트 2순위 |
소속팀 | 긴테츠 버팔로즈 (1972~1988) |
지도자 | 긴테츠 버팔로즈 코치 (1993~1995)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2군 감독 (1996~1999)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감독[2] (2000~200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2008~2011)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6~) |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역대 감독 | ||||
사사키 쿄스케 (1996 - 1999) | → | 나시다 마사타카 (2000 - 2004) | → |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합병되면서 팀 해산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 ||||
트레이 힐만 (2003 - 2007) | → | 나시다 마사타카 (2008 - 2011) | → | 쿠리야마 히데키 (2012 - 현재)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역대 감독 | ||||
오쿠보 히로모토 (2015) | → | 나시다 마사타카 (2016 - 현재) | → | 현임 감독 |
1 개요
前 프로야구 선수로 긴테쓰 버팔로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포지션은 포수.
前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코치/감독. 그리고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기도 하다.
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본명은 나시다 마사타카(梨田 昌崇)로 발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참고로 입단한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이 등록명을 썼다. 현재 이름 한자인 梨田 昌孝 는 1984년부터 사용.
2 현역 시절
시마네 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시절인 3학년 때 춘계·하계 고시엔 대회에 연속으로 출전(제43회 선발 대회, 제53회 선수권 대회)했지만 모두 1차전에서 패했다. 그 뒤 1971년 드래프트 2순위로 긴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했다.
그 뒤 1972~1988년까지 긴테츠 버팔로즈에서 현역 선수로 뛰며 포수로 활약했다. 현역 시절 땐 공수를 겸비한 리그 최고의 포수로 인정받았다.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지휘 아래 상승기에 있던 긴테츠의 주축 선수로서 스즈키 케이시 등과 함께 1979년 일본시리즈와 같은 큰 무대에서 뛰기도 했다. 같은 팀에서 뛰던 동료 포수 아리타 슈조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아리나시 콤비'라 불리기도 했다.[3] 골든글러브 4회, 베스트나인 3회 수상.
양팔을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폼인 일명 곤약 타법(コンニャク打法)으로도 유명했다.
이것이 그 곤약 타법. 뭔가 부왁과 닮은 듯 하지만 기분탓이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인 1989년 NHK에서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일하다가[4] 1993년 긴테츠 버팔로즈의 코치, 1996년 2군감독을 거쳐 2000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1999년 이름을 변경)의 감독이 되었다.
감독 첫 해엔 퍼시픽 리그 꼴찌를 차지했으나 이듬해인 2001년,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이 포진한 막강타선의 힘이 리그 최악의 투수진[5]의 멱살을 잡고 하드캐리했다으로 리그 우승을 하며 긴테츠의 4번째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 에선 이시이 카즈히사, 타카츠 신고 등의 투수진에게 강타자들이 꽁꽁 틀어막히면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긴테츠는 그 후 영원히 일본시리즈 우승을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감독직을 맡으며 2위-3위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2004년에 오사카 돔 사용 등으로 인한 연 15억엔 가량의 막대한 적자를 감당 못한 긴테쓰 버팔로즈의 모기업 킨키 일본 철도가 팀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하기로 하면서 그로 인한 혼란 등으로 인해 5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리고 긴테츠의 2004년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긴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경기 전날 그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는데...[6]
모두들 가슴을 펴고 플레이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 번호는, 모두 긴테츠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みんな胸を張ってプレーしろ。お前たちが付けている背番号は、すべて近鉄バファローズの永久欠番だ). |
정말 간지폭풍이 담긴 이 말은 일본프로야구의 명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말은 명언/야구 항목에 적혀 있기도 하다. 다만 마지막 경기에선 패배하고 말았다는 게 흠이지만(...)[7]
그 마지막 경기 뒤, 팀은 결국 2004년을 끝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나시다는 그렇게 긴테츠의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 근데 이게 좀 슬픈게.. 이 해 퍼시픽리그에서 1973년~1982년에 있던 플레이오프를 다시 도입해 리그 3위까지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부여해 플레이오프 승리팀에게 경기 진출권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였는데,(참고로 1973~1982년 플레이오프는 전/후기리그 1위끼리 겨뤄서 한쪽이 이기면 일본시리즈 진출. 전후기리그 전부 1팀이 우승시 일본시리즈 직행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즉 긴테츠가 만약 3위 이내에만 들어갔어도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해 일본시리즈 진출해서 우승할 수도 있었다. 근데 하위권 성적으로 내려앉으면서... 참 안습하기 짝이 없다.(참고로 이 제도는 나중에 [[[.센트럴리그]]에서도 도입해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되었다.)]
그 뒤 나시다는 다시 NHK 등의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일하다가,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이 되었다. 닛폰햄 시절엔 4년 간 퍼시픽리그 3위-우승-5위-2위의 성적을 기록했고 2009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승리해 팀을 일본시리즈 진출로 이끌었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8]
그 뒤 2011년 감독직을 사임. 또다시 야구 해설가/평론가로 일하다가 2015년 시즌의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임한 오쿠보 히로모토의 뒤를 이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라쿠텐이 긴테츠의 해산으로 인해 생기게 된 구단이란 걸 생각하면 좀 아이러니하고 묘하다. [9]
4 기타
- 여담이지만 2016년 2월 6일 기준으로 일본프로야구팀 감독을 맡은 인물 중 가장 늦게 항목이 생성되었다(...)
- 전설의 10.19 더블헤더 1차전에서 3:3으로 맞선, 자신이 안타를 치지 못하면 그 상황에서 팀의 우승이 좌절되는 9회초 2사 2루에 대타로 나와 극적인 역전 적시타를 쳤다. 그것이 나시다의 현역 마지막 타석이자 마지막 안타였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우승의 가능성을 살려놨는데, 우승여부가 결정되는 2차전에서 요시이 마사토와 아와노 히데유키가 한블두를 시전하면서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고 긴테쓰는 우승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경기가 나시다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10]
긴테쓰 감독으로서만 마지막 경기가 안습이 아니라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도 안습이었다.
- "구단의 OB 출신이 감독을 하면 팀이 막장화되거나 기똥찬 흑역사를 기록한다든가 뭔가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징크스"가 있는 한신 타이거스 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독후보이기도 했다. 긴테쓰 소멸 후
실업자해설가 생활을 하던 2000년대 후반 이후로 한신에서 감독 경질설만 나오면 가장 먼저 유력한 감독후보로 물망에 오르는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 포수 출신에 긴테쓰와 닛폰햄의 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실적과 지도력, 그리고 오사카에 본거지를 뒀던 간사이 지역 팀 출신인 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신에 적을 둔 적이 없는 다른 팀 선수 출신이라는 점이 한신 팬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결국 나시다는 라쿠텐行. 그리고 한신 감독엔 역시나(?) OB 출신인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취임했다(...)이제 한신극장 시즌2를 만드느냐 아니면 외야수도 명감독이 될 수 있다 한신 버전을 만드느냐만 남았다
-
2013년부로 탈출한호시노 센이치나 니시모토 유키오 등에 가려지긴 하나 이 분도 꽤 콩라인. 감독을 맡은 팀(긴테츠, 닛폰햄)에서 리그 우승을 거두긴 했으나, 일본시리즈 우승은 1번도 거두지 못했다(...) 더 웃긴 게 선수/감독 생활 때도 리그 우승만 2번 했다(...)완벽한 콩나이도 이제 꽤 넘었으니(환갑이 꽤 지났다) 라쿠텐에서 콩라인을 탈출할지 아니면 영원히 콩라인으로 남을지가 정해질듯..?호시노도 여기서 탈출했으니 아마 기대는 할 수 있을 거다. 아마
- 일본어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말장난 개그(다자레)가 주특기로 기자들과의 인터뷰 때도 종종 활용하고 기자들도 좋아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재개그가 돼버리는 일이 많아서 젊은 선수들은 썰렁하다는 반응 일색.
- ↑ 1972~1983년까진 나시다 마사타카(梨田 昌崇) 란 이름을 사용. 발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 ↑ 참고로 아래에 나오다시피 긴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기도 하다.
- ↑ 두 포수가 거의 출장시간을 반으로 나눠 뛰면서도 동시에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해가 많을 정도였다. 다른 구단으로부터 "킨테츠에는 주전 포수가 두 명 있다."라는 부러움을 받았다.
- ↑ 1989년 월드 시리즈를 취재하러 갔다가 그 때 갑자기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문에 졸지에 재난 취재 특파원이 된 일화도 있다.
- ↑ 팀 방어율이 5점대에서 놀았다. 2001년 당시 긴테츠 소속이었던 카도쿠라 켄도 8승 5패의 성적을 거뒀지만 6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 시기 두각을 나타내면서 선발진의 신예로 등장한 선수가 이와쿠마 히사시.
- ↑ 공교롭게도 최후의 경기 상대 팀이 흡수합병 대상이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 ↑ 그 날 승리투수가 바로 구대성이었다. 즉 오릭스 블루웨이브 최후의 승리투수인 셈.
- ↑ 여담으로 닛폰햄 파이터즈는 도쿄 시절 교진군의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도쿄돔을 거의 세들다시피 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일본시리즈는 집주인 VS 옛날 세입자 戰 이 되었다(...) 특히 도쿄돔에선(...) 이것은 2012년 한 번 더 재현된다.
- ↑ 실제로 라쿠텐 감독으로의 취임이 결정되고 나서 한 인터뷰에서 "긴테쓰 소멸이후 라쿠텐을 긴테쓰의 후신처럼 생각해 왔다"고 밝혔다.
사생아는 취급 안한다그러나 라쿠텐 감독 취임 전 오릭스 버팔로즈 측에서 개최한 긴테츠 OB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는지라, 그냥 감독 취임을 한 겸 말한 립서비스인 듯 하다. - ↑ 참고로 9회말에 대수비로 들어왔고 타석이 돌아오지 않아서 타석은 1차전 9회초의 타석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