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Central League) 퍼시픽 리그(Pacific Le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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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요미우리 자이언츠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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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주니치 드래곤즈오릭스 버팔로즈치바 롯데 마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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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히로시마 도요 카프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과거에 참가했던 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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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엠블럼마스코트
버필리드(バフィリード)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Osaka Kintetsu Buffaloes
大阪近鉄バファローズ
창단1949년
해체2004년
오릭스 버팔로즈에 흡수합병
연고지오사카부(1952~2004)
구단명 변천긴테쓰 펄스(1949~1958)
긴테쓰 버팔로(1959~1961)
긴테쓰 버팔로즈(1962~1998)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1999~2004)
홈구장후지이데라 구장(1950년 시즌 개막~ 1950.8, 1984~1996)
오사카 구장(1950.9~1957)
일본생명구장(1958~1983)
오사카 돔(1997~2004)
기업 명칭㈜오사카 버팔로즈
모기업
(해체 당시)
킨키 일본 철도
일본시리즈 우승
(0회)
-
퍼시픽 리그 우승[1]
(5회[2])
1975 후기리그, 1979 전기리그, 1980 후기리그, 1989, 2001
플레이오프 우승
(2회)
1979, 1980

돔구장버프는 주지 못할 망정 너프도 모자라, 사망 플래그까지 세울 수도 있음을 보여준 팀.
NPB의 영원한 콩라인
근데 공교롭게도 메이저 리그에도 그런 팀이 있었다 카더라. 같은 해에 고별경기를 가진 건 덤. 그나마 그 팀은 역사라도 이어나가고 있지 이 팀은 인수되지 못 하고 오릭스와 합병해 버렸으니...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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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소속이었으며 2004년 시즌 종료 뒤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 해체할 때까지 존재했던 팀. 1950년 양대리그제 시행과 함께 창단되었으며, 모기업은 킨키 일본 철도. 약칭 긴테쓰.

연고지는 오사카였으며, 후지이데라 구장, 일본생명구장, 오사카 구장 등을 홈구장으로 써 왔다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오사카 돔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었다. 팀명이 몇 차례 바뀐 적이 있는데, 창단 당시는 긴테쓰 철도가 경유하는 이세 만의 특산물 진주를 따서 긴테쓰 펄스(1950~1958)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다 치바 시게루 감독이 취임한 이후인 1959년~1961년에 감독의 별명을 따 긴테쓰 버팔로, 그리고 1962년에 본격적으로 긴테쓰 버팔로즈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후 팀의 연고지 정체성을 살리고자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1999~2004)라는 이름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팀 이름 때문에 이 팀의 별칭은 맹우군단(猛牛軍團)이다.

리그 우승 경력은 네 차례 인데, 일본시리즈에서는 단 한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팀이기도 하다(...) 게다가 일본 프로야구 12개 구단 중 가장 늦은 1979년 에서야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3][4]. 그나마 과거 긴테쓰가 잘 나가던 시기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이끌던 1970년대 후반과 오기 아키라 감독 시절인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 니시모토 감독은 1979년과 1980년 긴테쓰를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일본시리즈 에서는 고바 타케시 감독의 히로시마 카프에 발렸고[5], 오기 감독의 경우 198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일본시리즈에서 먼저 3승을 따 놓고도 4연패로 역관광 당하는[6] 안습흑역사를 창조했다(...).

이 시기를 제외하면, 50년에 걸친 팀 역사의 대부분은 안습 그 자체였다. 1961년 36승 1무 103패의 전적으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시즌 100패팀이다.[7] 2005년 전년도 5위인 긴테쓰와 6위인 오릭스 소속 선수들 중에서도 질 낮은 선수들 대부분+그나마 에이스인 소수 선수들을 모아서 만든 라쿠텐이 기록을 경신하리라 예상했지만 간신히 97패에서 스톱. 2000년대 후반 센트럴리그요코하마 베이스타즈거의 매년 100패에 근접한 성적을 찍고 있었으나 이쪽도 아직까지 100패를 찍은 적은 없다. 이런 관계로 한때 같은 리그의 한큐 브레이브스회색 구단 이란 별칭 겸 오명(...)으로 명성(?)을 날리던 것과 함께 긴테쓰는 짐짝 구단 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오죽하면 1979년 긴테쓰를 최초로 우승시킨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은 하위권 팀을 우승시켰다는 공로로 NPB에서 야구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 두 팀은 후일 같은 팀으로 파이널 퓨전했다[8]

한신 타이거즈 만큼의 인기는 아니였지만, 역사적으로 강팀이 아니었던 것에 비해 관서지방에 팬들은 꽤 있었다고 한다.[9] 특히 투수력이나 수비력보다는 공격력, 특히 장타력을 중심으로 하는 화끈한 야구와 한번 분위기를 타면 팀의 상징 그대로 그야말로 초원을 질주하는 들소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팀 컬러를 특징으로 해서[10] 오사카 현지에 있던 이 팀의 팬들은 이러한 점이 오사카답다면서 좋아했었다. 특히 7월까지 최하위를 기록하다가 7월에서 8월 중순까지 38경기에서 32승 6패를 기록하면서 우승전선에 뛰어든 1994년 시즌(이 해엔 결국 오릭스와 공동 2위)과 딱히 타고투저 시즌도 아니었는데 5점대의 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진을 화끈한 공격야구로 메워 우승까지 차지했던 2001년 시즌[11]이 이러한 팀 컬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시즌이었다.

또한 이 팀은 극적인 승부가 많아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명승부는 이 팀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고, 팀의 인기는 없지만 팬들에게 준 임팩트는 큰 팀이었다. 대표적인 명승부만 해도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9회말의 에나츠의 21구, 1988년 전설의 10월 19일 카와사키 더블헤더[12], 1989년 랄프 브라이언트의 4연타수 홈런[13], 1989년 일본시리즈의 3연승 후 4연패[14], 2001년 시즌[15]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12년 만의 우승을 결정짓는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16] 등등.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긴테쓰가 명승부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이었다. 역사에 남을 명승부에서도 안습안습(...!!). 이런 이유로 당연히 일본시리즈 우승이 없다. 콩의 전설 호시노 센이치가 일본시리즈를 도전한 지 40년 만에 우승하면서 이제 긴테쓰는 영원한 콩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라쿠텐조차 창단 10년도 안 돼서 우승을 했는데...

이 구단 출신의 유명한 선수로는 1988년 드래프트때 8구단에서 지명을 받은[17] 노모 히데오와 08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다가 09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를 거쳐 현재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뛰고 있는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이 있다.. 그리고 찰리 매뉴얼, 랄프 브라이언트, 터피 로즈 등 수준높은 용병들도 이 팀에서 뛰었다.

스즈키 케이시는 긴테쓰 버팔로즈 최초의 영구결번이자 유일한 영구결번(1번)의 소유자였으나 오릭스와 긴테츠의 합병으로 무효화가 되었다. 사족으로 스즈키 케이시 이후로 일본야구에서는 현재까지 300승 이상을 한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경영난으로 인한 긴테쓰의 해체로 인해 2004년 일본프로야구계는 리그 재편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선수회 회장이었던 후루타 아츠야, 긴테쓰의 주력 선수였던 이와쿠마 히사시 등과 팬들 주도로 거센 반발이 일어나 일본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선수회 파업이 일어나는 등 파란이 있었다. 결국 오릭스 블루웨이브긴테쓰 버팔로즈가 합병된 후 선수들은 분배 드래프트를 통해 오릭스 버팔로즈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로 나눠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2004년 마지막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당시 감독이었던 나시다 마사타카[18]가 선수들에게 했던 "모두 당당하게 시합해라. 너희는 모두 긴테쓰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라는 말은 야구계의 명언으로 자리잡았다.

2 이 팀 출신 OB

괄호 안은 재적 연도, 굵은 글씨는 오릭스와의 합병 당시에 재적 중이었던 팀 최후의 멤버

2.1 투수

창단 초기 지하철 야구단(...)이라고 조롱당하던 긴테쓰를 투타 양면에서 혼자 먹여살리던 좌완 에이스. 훗날 어깨 통증으로 인해 야수로 전향했는데, 투수와 외야수로 한 차례씩 올스타전 베스트 9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선수생활 마지막 해인 196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의 기쁨을 맛본 뒤 은퇴했고,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 취임 의사를 밝히면 언제든지 용퇴한다"(...)는 조건 하에 다이요 훼일즈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300승 투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마도 일본프로야구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최후의 300승 투수로 남을 확률이 크다. 이제는 일본프로야구에서 300승을 거둘만한 실력이면 8~9년 뛰고 메이저리그로 가버릴테니... 그러나 선수시절의 명성보다는 1994년 무렵 감독을 맡으면서 당시 에이스였던 노모 히데오와의 갈등[19]과 그 후 메이저리그에서의 노모의 성공만이 더 부각되어 선수로서는 레전드였지만 감독으로서는 자기의 아집 때문에 훌륭한 선수와 갈등만 빚은 무능한 감독이라는 이미지만 남고 말았다. 각동님?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피홈런 1위(586개)에 랭크되어 있으며 긴테쓰 구단이 존재할 당시 유일한 팀내 영구결번이었으나 팀이 오릭스와 합병되면서 영구결번도 사라지고 말았다. 안습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공은 느리지만 수비력이 뛰어나 후쿠모토 유타카가 스즈키 케이시 다음으로 까다롭게 생각했던 투수였다고 한다.
노모 히데오 입단 직전까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던 좌완투수. 신인이던 1987시즌 닛폰햄 파이터즈의 니시자키 유키히로와 치열한 신인왕 경쟁을 벌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락부락한 마초적인 이미지가 대세였던 일본 프로야구에 니시자키와 더불어 TV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같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미남형의 얼굴로 얼빠 여성팬들을 양산하면서 라이벌 니시자키와 더불어 「트렌디 에이스」라고 불렸다. 1989년 우승에 공헌했지만 그 때의 무리로 부상을 입으면서 당초 기대치에 못미치는 통산 75승에 머물고 말았다.
90년대 퍼시픽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
등록명 J.P.

2.2 포수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여기서 보냈으나 아리나시 콤비 등에게 밀려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위장오더용 미끼 정도(...) 등에나 쓰였다. 은퇴 후엔 알다시피 삼성 라이온즈에서 포수생활을 했고 그 뒤 돌아와 이 팀에서 해산 때까지 코치로 활약했다. 사족이지만 1980년 일본시리즈 당시 7차전 9회 초[20]병살타를 날려 팀의 패배를 결정지었다(...) 당시 영상
선수시절에는 팀을 대표하던 프랜차이즈 포수이자 팀 최후의 감독. 팀 최후의 우승감독이기도 하다. 팀이 오릭스에 합병된 후 해설자 생활을 하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9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2016년부터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
한화 이글스 배터리 코치, 현 라쿠텐 1군 배터리 코치.
재일교포 3세. 한국명은 김영화(金英和). 노모 히데오의 전담포수였고 한때 삼성 라이온즈에서 영입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저니맨이 되었고, 선수생활 말년인 2003년에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언어불통과 유리몸 속성 때문에 시즌 중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고 은퇴한다.

2.3 내야수

긴테쓰를 대표하는 공격형 2루수. 1983년 후쿠모토 유타카의 14년 연속 도루왕 기록을 저지한 것을 포함해 통산 4차례 도루왕에 올랐고, 20-20도 두번이나 기록했다. 은퇴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수석코치와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을 역임했다.
재일교포 3세로 한국명은 김의명(金義明). 고3시절 에이스 겸 4번타자로 모교인 호토쿠가쿠엔 고교를 고시엔 우승으로 이끈뒤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되어 장기간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했다.
팀의 마지막 4번타자. 호쾌한 풀스윙과 견고한 3루수비로 유명했으나, 메이저 도전에 실패한 후 오릭스, 주니치, 라쿠텐, 요코하마 4팀을 전전한 일본프로야구의 풍운아가 된다.
위에서 언급된 ①9회말 3점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②팀의 우승을 결정짓는 ③대타 ④역전 ④끝내기 ⑤만루 홈런을 친 주인공

2.4 외야수

1978년 타격왕. 은퇴 이 후 1996년부터 99년까지 긴테쓰의 감독을 역임했으나, 4-3-5-6의 부진한 성적만을 남긴 채 물러났다. 참고로 에나쓰의 21구 당시 무사 만루의 역전찬스에서 대타로 나와서 삼진을 당하면서 기적의 명승부의 조연역할을 했다. 안습
1980년 아메리칸리그 홈런왕.
1988년 입단해 74경기에서 34홈런을 기록하며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을 일약 우승 경쟁에 끼워넣는 활약을 보였다. 10.19에서도 홈런을 때렸다. 다음 해인 1989년에는 49홈런을 치며 홈런왕을 차지했는데 특히 우승을 다투던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시즌 마지막 더블헤더 경기에서 두 경기에 걸쳐 4연타석 홈런을 때려내는 하드캐리를 선보이며 킨테츠를 일본시리즈까지 끌고 간다. 이후에도 1993, 1994년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킨테츠의 주포로서 오랜 기간 활약했다. 도쿄돔 천장 스피커를 맞추는 타구를 때려낼 정도의 파워와 한 시즌 200삼진에 육박하는 호쾌한 선풍기 스윙으로 유명했다.
팀 최후의 주장.

2.5 감독

「펄스(Pearls)」라는 닉네임이 나약하다면서 부임하자마자 팀 명칭을 선수시절 자기 별명을 따서 「버팔로」[21]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반대로 위에서 나온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의 시즌 100패의 흑역사를 기록한 감독이다. 결국 그 해를 끝으로 퇴임.

3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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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에 착용했던 유니폼.

에나츠의 21구로 유명한 1979년 일본시리즈에서 통한의 패배를 할 때 입었다. 아울러, 3연승을 하고 1승만 남겨둔 상태에서 당시 긴테쓰의 에이스 투수가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자극받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4연승을 하며 역스윕을 달성했던 1989년 일본시리즈 때도 입었던 흑역사 유니폼이다. 오사카돔 이전 전 후지이데라 구장을 쓰던 마지막 해인 1996년 시즌까지 착용했다.

모자의 경우 78년 전기리그 때까진 검은 바탕, 빨간 챙에 앞부분에 빨간 B 마크가 들어간 모자를 썼지만 근데 한큐 브레이브스랑 비슷하게 생긴 건 함정 후기리그 때부터 빨강, 검정색이 섞인 바탕, 빨간 챙에 앞부분이 하얀 바탕에 버팔로즈 로고와 함께 영어로 된 구단명이 파란색 글씨로 KINTETSU BUFFALOES 고 써져 있던 모자를 쎴다. 지금도 야구팬들에겐 유명한 디자인.

KBO 태평양 돌핀스의 유니폼이 이 유니폼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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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오사카 돔의 개장과 함께 유니폼을 변경하였으며, 오릭스에 합병되기 직전인 2004년 시즌까지 착용했던 홈 유니폼이다. 모자에 적힌 팀 글씨는 지워졌고, 엠블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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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홈 유니폼의 새 디자인 적용과 함께 원정 유니폼도 변경 되었다. 1999년에 연고지인 오사카를 팀 명에 반영해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즈가 되면서, KINTETSU라 적혀있던 유니폼의 상의 로고도 OSAKA로 바뀌었다.[22]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5 관련항목

  1. 이 팀은 퍼시픽 리그 소속이였으며, 양대리그 개편 이후 퍼시픽 리그의 총 우승횟수가 센트럴 리그에 비해 딱 세 개 부족한 것은 이 팀의 기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4회의 기록이 연결되는 팀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개 아니냐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센트럴 리그 최초 우승팀 쇼치쿠 로빈스가 1952년에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2.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
  3. 2위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1978년, 3위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975년. 참고로 2위인 야쿠르트와 1위인 긴테쓰 이 두 구단에서 우승을 이끈 주역이 있으니 그가 바로 前 만패 필라델피아 필리스 감독인 찰리 매뉴얼. 특히 매뉴얼은 1979년에 양대리그 출범 이후 외국인선수 최초로 MVP를 수상했다.
  4. 정확히는 1975년 후기리그 우승을 하긴 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했다.
  5. 특히 1979년 일본시리즈는 7차전 9회말에 벌어진 이른바 에나츠의 21구로 인해 아깝게 놓쳤고, 1980년에도 3승 4패로 히로시마에 우승컵을 내 주었다(...) 심지어 2번 다 먼저 3승 쌓았다가 무너졌다(...)
  6. 거기다 리버스 스윕이 결정된 7차전이 홈구장이었던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열렸다!(...)
  7. 참고로 시즌 100승팀은 아직 안 나왔다. 1955년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이 지휘하던 난카이 호크스가 100승에 단 1승 모자란 99승을 거둔 것이 최고 기록이다. 근데 일본시리즈에서 교진군에 패배
  8. 남코의 고전 야구 게임인 패미스타 초기작에서는 용량 문제로 이 두 구단에 난카이 호크스를 합해 '레일웨이즈'라는 철도 구단으로 퉁쳐서 수록되기도 하였다. 식품 회사가 모기업이었던 롯데 오리온즈닛폰햄 파이터즈는 '푸즈푸즈'로 통합.(...) 퍼시픽리그 구단 중 제대로 수록된 팀은 일본시리즈의 단골손님이었던 세이부 라이온즈(라이오넬즈)한 팀 뿐. 당시 퍼시픽리그가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안습한 일화이다.
  9. 하지만 거대하고 비싼 오사카 돔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인기는 아니었다. 오사카 돔 항목 참조.
  10. 한번 발동이 걸리면 당시 황금시대를 보내고 있던 세이부 라이온즈조차 라이온 킹 초반부에 들소떼에 치어서 사망하는 무파사 꼴이 나곤 했다. 그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당시 세이부가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팀이기도 했다.
  11. 이 해가 얼마다 대단했냐하면 팀 ERA가 4.98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게 리그 우승팀의 ERA이다. 그것도 거의 시즌 내내 5점대를 유지하다가 시즌 막판 분전으로 간신히 4점대로 끌어내린 ERA이다. 선발로테이션을 담당한 6명의 투수 중에 션 버그만 한명을 제외한 5명이 전부 ERA 4.90을 넘어갔으며 로테이션 투수 중 3명이 5점대 ERA을 기록했다. 특히 카도쿠라 켄6.48의 ERA로 로테이션의 제3선발 역할을 했다(...) 그에 비해 타선은 20홈런 이상이 4명, 특히 3번 로즈와 4번 나카무라 단 두명이서 101홈런, 263타점을 합작해냈으며 5번 이소베는 홈런은 17개였지만 95타점을 뽑아냈다. 3번부터 6번까지 모두 타율 .315를 넘겼으며 7번타자인 요시오카가 26홈런을 쳐낼 정도였다. 이 해의 긴테쓰는 78승 2무 60패의 성적이었지만 피타고라스 승률은 고작 71승 67패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타선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뒷받침하는 증거.
  12. 더블헤더 전까지 0.5게임차로 세이부에게 뒤져 있었는데 두 경기를 모두 이기면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1차전은 이겼지만 2차전은 4시간을 넘으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당시 규정 때문에 무승부로 우승 실패(...) 게다가 시간 지연의 주된 원인은 경기 중간에 주루사 판정을 놓고 당시 롯데 감독 아리토 미치요가 격하게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퍼시픽리그만 따져서는 역대 공식전(정규시즌) TV중계 시청률 1위이다(30.9%). 일본시리즈, 플레이오프를 포함하면 1981년 일본시리즈 최종전이었던 6차전 시청률이 1위(41.2%).
  13.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용병 중 하나로 꼽히는 랄프 브라이언트(도쿄돔에서 천장을 맞춰 그라운드룰로 인정홈런을 날린 일화가 있는 거포.)가 세이부 라이온즈 와의 더블헤더 원정경기에서 4연타수 홈런을 날렸다. 이 4연타수 홈런으로 선두경쟁을 벌이던 오릭스와 세이부를 단 1경기차 내로 따돌리고 선두경쟁에서 이겼다. 왜 4연타수 홈런이냐 하면 중간에 고의사구가 끼어있었기 때문에 4연타석이 아니다. 더블헤더 1경기에서 3개, 2경기에서 하나인데, 1경기에선 0:5로 지고 있다가 브라이언트 홈런 3발(솔로,만루,솔로)로 6:5로 뒤집어서 승리했고, 2경기에선 2:2 동점에서 결승 솔로. 이 경기가 10월 12일에 있었고 이 경기를 제외하곤 잔여경기가 2경기뿐이었다. 그야말로 필요한 순간에 나온 엄청난 임팩트.
  14. 시리즈 3연승으로 스윕시리즈 직전까지 갔으나, 3차전 승리 투수였던 카토 테츠로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요미우리 타자들 박력이 모자르네요. 차라리 롯데 타자들이 더 무섭네요."라 조롱해 요미우리 타자들의 기를 되려 살려줬다. 참고로 1989 시즌 파리그 최하위가 롯데 오리온즈(...) 한편 이 인터뷰는 공개된 장소도 아닌 라커룸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행해진 인터뷰였고 3연패로 몰리던 요미우리의 기를 살리기 위해 요미우리빠 기자들에 의해 발언의 취지가 왜곡되어 기사화되었다는 진실이 숨어있었다. 가토는 롯데는 언급도 안 했고 기자들이 낚시성으로 "요미우리의 타선이 롯데보다 더 약해보이지 않냐?"는 질문에 "거인은 투수력으로 우승한 팀이라서 그런지 타선은 좀..."이라고 대답했는데 이 대답을 들은 기레기들이 얼씨구나 하고 가토가 위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기사로 쓴 것. 어쨌든 그 때문에 거인 선수단의 눈이 뒤집힌 것은 사실이고 이 시리즈 5차전에서 하라 타츠노리가 부진을 씻는 홈런으로 시리즈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다. 그리고 그 후는...
  15. 이 때 긴테쓰의 타선은 '이테마에 타선'(いてまえ打線, 오사카 사투리로 '박살내라'라는 뜻의 속어라고 한다)이라 불리면서, 팀 방어율 꼴찌의 안습한 투수진에도 불구하고 팀타율 .280, 팀홈런 211개의 무지막지한 타선의 힘으로 퍼시픽리그 정상에 올랐다. 101홈런을 합작한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의 클린업을 중심으로 이소베 코이치, 요시오카 유지, 가와구치 켄시 등 3할-20홈런급의 쟁쟁한 타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16. 당시 3년 연속 리그 우승에 도전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격전 끝에 2.5게임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혹자에 의하면 나온 홈런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다 붙은 홈런이라고도 한다. 투아웃에 볼카운트 2-3가 빠지기는 했지만... 이 때 홈런을 친 선수가 2012년 한때 이대호와 클린업 트리오를 맡기도 했던 키타가와 히로토시 였다(키타가와는 201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나 오릭스 버팔로즈의 2군 타격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잘 보면 우승 축하 세레머니에서 카도쿠라 켄, 오츠카 아키노리, 제레미 파웰, 이와쿠마 히사시등도 보인다. 기구하게도, 마지막 리그 우승의 제물이 된 상대는 몇 년 뒤 그 비참하게 제물이 된 곳의 새 주인이 되었다.
  17. 아직도 일본 프로야구 기록...마쓰자카도 다르비슈도 8개구단의 지명을 받지는 못했다. 이와쿠마야 드래프트 4순위니...
  18. 1970년대~80년대 포수로 빛냈던 긴테쓰 버팔로즈 프랜차이즈 스타. 긴테쓰 해체 이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도 2번 리그 우승을 이룩하는 등 감독으로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는다.일본시리즈 우승을 못 해서 그렇지...
  19. 이 갈등이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20. 짝수 해에 치뤘으니 당연히 7차전 개최 구장은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다.
  21. 단수형이다. 이후 치바 감독이 퇴임한 후 명칭을 복수형인 버팔로즈로 바꾼다.
  22. 이는 한신에게 밀리는 입지를 타파하고자 낸 고육지책에 가까웠으나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에서는 기업명이 있더라도 지역명을 우선시 하면서 지역팬들을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는 기업명을 우선시한다면서 팬들이 비판을 하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참고로 2016년 기준 이렇게 하는 팀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그리고 모기업이 축구만 보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