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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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오기 아키라(仰木 彬)
생몰1935년 4월 29일~2005년 12월 15일
출신지일본 후쿠오카 현 나카마 시
포지션2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54년
소속팀니시테츠 라이온즈(1954~1967)
지도자 경력니시테츠 라이온즈 코치(1968~1969)
킨테츠 버팔로즈 코치(1970~1987)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1988~1992)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1994~2001)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2005)
긴테쓰 버팔로즈 역대 감독
오카모토 이사미
(1984 - 1987)
오기 아키라
(1988 - 1992)
스즈키 케이시
(1993 - 1995)
오릭스 블루웨이브 역대 감독
도이 쇼조
(1991 - 1993)
오기 아키라
(1994 - 2001)
이시게 히로미치[1]
(2002 - 2003.4)
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즈 역대 감독
이하라 하루키
(2004)
오기 아키라
(2005)
나카무라 가쓰히로
(2006)
아시아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한 감독

일본의 야구선수, 지도자, 해설가. 1960년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끈 멤버 중의 한 명이며, 은퇴 후에는 니시테츠, 긴테츠, 오릭스의 코치와 감독을 지내며 지도력을 발휘한 명감독이기도 하다.

1 유년 시절

부모님은 학교의 선생님 이었는데, 아버지는 군대에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오기의 어머니는 상당히 엄격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도치쿠 고등학교에 재학 중엔 투수내야수로 뛰었으며, 1953년 고시엔 대회에 진출 하였지만 2회전에서 오사카의 강호 나니와 상고[2]에 패퇴한 바 있다.

2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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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츠 시절의 오기(우측). 왼쪽은 키스톤 콤비를 이루었던 토요다 야스미츠.

1954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 했으나 프리 배팅때 투구하는 오기의 구질이 너무 정직하다는 것을 감독이던 미하라 오사무가 간파하고는, "자네는 투수로서의 소질이 부족한 것 같으니 2루수로 전향하라" 고 지시하면서 오기는 2루수로 프로에 데뷔하게 되었다.[3]

사실 오기는 고교 시절 투수 뿐 아니라 내야수로서도 실력이 좋았던지라, 데뷔 첫해에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찼고, 유격수 토요다 야스미츠와 함께 퍼시픽 리그 최강의 키스톤 콤비를 결성하여 수비에서 맹활약 하면서 니시테츠의 황금 시대를 이끄는 데 한 몫을 거들었다.[4] 한편으로 오기는 덕아웃에 있을 때 스승인 미하라 감독 옆에 앉아서 같이 야구 이론에 대해 항상 의논하고 공부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1967년 시즌을 끝으로 14시즌 통산 800안타, 70홈런, 326타점, 116도루, 타율 0.229의 기록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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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테츠 코치 시절. 가장 오른쪽이 오기.
(옆의 등번호 68번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은퇴 후 오기는 2년 간 니시테츠 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1970년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이던 니시테츠 시절 스승 미하라 오사무의 부름을 받고 킨테츠로 적을 옮겨[5] 수비, 주루 코치 보직을 받았으며 경기 때 주로 3루 주루 코치로 출장했다.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때 에나츠 유타카가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를 시전할 당시 오기가 3루 코치를 맡고 있었고 이 때 스퀴즈 번트로 홈을 노리던 3루 주자가 객사당하는 흑역사도 있었지만, 당시 킨테츠 감독이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그가 전임 미하라 감독의 오른팔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만으로 그를 중용했고 평소 "오기는 벤치의 사인을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라고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주루 코치이기도 했다. 1984~1987년에는 킨테츠의 수석 코치를 맡았다.

4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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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테츠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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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 후.

무려 20년 동안 코치만 하던 오기는 1988년 오카모토 이사미의 후임으로 드디어 킨테츠 1군 감독 자리에 올랐고 감독으로선 초보였지만 코치 시절 쌓은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만년 하위권이던 킨테츠를 퍼시픽 리그 돌풍의 핵으로 상승시켰다.

그 해 10월 19일 롯데 오리온즈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를 전부 이겨야 우승할 수 있는 상황에서 1차전을 9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터진 대타 나시다 마사타카의 극적인 역전 중전 적시타로 간신히 잡고[6] 2차전에 들어갔다. 8회까지 4대 3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오기는 에이스인 아와노 히데유키[7]를 마무리로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으나, 뜻밖에도 아와노가 하필 8회말 롯데의 타카자와 히데아키 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두들겨 맞는 바람에 연장전에 돌입했고 결국 2차전의 승부는 시간제한 무승부로 마무리 되면서, 친정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에 게임 차 없이 아쉽게 퍼시픽 리그 우승을 내주며 2위에 머물렀다. 참고로 이날 더블헤더는 일본 야구계에서 이른바 "전설의 10월 19일" 로 불리면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로 각인되어 있고 이날 긴급 편성된 더블헤더 2차전의 TV 중계는 시청율 31.4%로 퍼시픽리그 정규시즌 경기 중계로는 역대 최고의 기록을 남겼다.

이듬해인 1989년에도 킨테츠는 오릭스, 세이부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고 시즌 막판 더블헤더가 포함된 세이부 와의 4연전을 4연타석 홈런을 날린 랄프 브라이언트의 맹활약으로 모조리 쓸어담으며 드라마틱 하게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때도 2위 오릭스, 3위 세이부 와의 게임차는 제로. 역관광 한번 제대로 한 셈이다(...). 그 해 기적적인 우승을 계기로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별명미하라 매직을 본따 오기 매직 이라 불리었다. 대신 에이스였던 아와노 히데유키의 팔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일본시리즈 에서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먼저 3승을 따놓고도 내리 4연패로 역관광 당하는 비운을 맛보기도(...).

이후 1992년 까지 팀을 3위-2위-2위로 이끈 오기는 199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킨테츠 감독에서 사퇴하였고, 1년 간 TV 아사히와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로 활약했다. 킨테츠 감독 시절 노모 히데오, 아카호리 모토유키 등 에이스급 투수를 육성한 바 있다.

5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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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감독 시절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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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의 홈경기 중. 옆의 선수는 스즈키 이치로.

199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으로 취임한 오기는 2군을 전전하던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를 스타 플레이어로 키웠고, 유망주 다구치 소 또한 주전으로 도약시키는 등 지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오릭스를[8] 취임 첫해 긴테츠 버팔로즈와 공동 리그 2위로 이끌었다.[9] 이듬해인 1995년 1월 17일 발생한 고베 대지진으로 상처받은 연고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오릭스 선수단은 "힘내자 고베(がんばろうKOBE)" 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유니폼 소매에 붙이고 시즌에 임했으며, 그 해 결국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10] 그리고 15승 27세이브를 거두면서 팀의 마무리 투수로 맹활약 했던 히라이 마사후미의 팔을 또 제물로 바쳤다. 하지만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선 노무라 카츠야가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승 4패로 패퇴하여[11][12] 오기는 콩라인에 머무는 듯 했으나... 그 다음해인 1996년 리그 2연패를 달성, 또다시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여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작년에 당했던 대로 4승1패로 물리치고 기어이 우승을 달성하였다.[13] 오기로서는 감독 데뷔 후 첫 일본 시리즈 제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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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 후 헹가레를 받는 오기.

이후 오기는 두번 다시 일본 시리즈와 연을 맺지 못했지만, 1999년 까지 오릭스를 A클래스(리그 3위 이내)로 이끌었고 킨테츠 감독 시절까지 포함하면 11년 연속 A클래스 라는 기록을 세우며 명감독으로서 부족함 없는 명성을 남겼다. 그러나 중심 타자인 이치로와 다구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팀 전력은 약화되었고 팀은 2000~2001년 시즌 2년 연속 4위에 그쳤다.[14](다만 이때도 승률은 5할 이상이었다.) 결국 오기는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유니폼을 벗었다.

오기는 2002~2004년 TV 아사히와 스포츠 닛폰 해설가로 복귀하여 활동하였고, 2004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그 해 연말 열린 명예의 전당 입성 기념 파티에서 오기는 "오늘은 파티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전장(生前葬) 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라고 좌중들에게 말했는데, 사실 오기는 그 해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하지만 오기는 자신의 투병 사실을 현역 시절 팀 동료이자 킨테츠 시절 수석코치로 함께 한 나카니시 후토시 등 몇명 외에는 비밀로 하고자 했다.

6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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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돌아온 오기. 허나 저 미소짓는 얼굴을 한 해가 가기도 전에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폐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오기는 2005년 킨테츠 버팔로즈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통합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초대 감독 제의를 받아들여 4시즌 만에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감독 취임 이었다.[15] 오기는 "그라운드 에서 쓰러지는 것이 소망이다" 라는 심정으로 감독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암 치료와 동시에 고령의 나이로 감독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시합 도중임에도 덕아웃에서 피곤을 못이기고 꾸벅꾸벅 존다던가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등 체력이 떨어져 외야의 대규모 장비 출입구를 통해 그라운드로 들어와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오기는 최선을 다해 지휘하여 3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을 리그 4위로 이끄는 성과를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감독직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오기는 고령과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결국 감독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오기의 그라운드 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기의 감독 통산 성적은 988승 815패 53무 승률 0.548 이다. 덧붙이자면 오기는 킨테츠 시절 감독으로 보필한 니시모토 유키오 처럼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전부 퍼시픽 리그 에서 영위했다. 그리고 선수와 지도자 캐리어를 전부 대형 사철과 관련된 팀에서 쌓은 바 있다.[16]

7 현장을 떠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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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아키라 환송회 때 덕아웃에 걸린 오기의 유니폼과 꽃다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난 오기는 오릭스 구단의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취임 하였으나, 2개월 만인 2005년 12월 15일, 결국 지병인 폐암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오기의 사망 소식을 접한 프로입단 동기인 노무라 카츠야"한번 더 감독으로서 그 녀석과 붙어보고 싶었다" 며 애통해 했고,[17] 그 외의 많은 야구인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오기의 장례식은 생전 그의 바람대로 조용히 치루어 졌는데, 오기의 지인들은 별도로 2006년 1월 21일 오기 아키라 환송회를 개최하여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8 에피소드

  • 감독 시절 육성했던 노모 히데오,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하세가와 시게토시 모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이 4명의 선수는 입을 모아 오기를 사부님으로 존경하고 있다.
  • 1996년 올스타전 당시 퍼시픽 리그 감독이던 오기는 경기 막판 우익수 스즈키 이치로투수로 등판시켰다. 팬 서비스 차원의 깜짝 이벤트였지만 센트럴 리그 감독 노무라 카츠야는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라고 반발하며 항의의 뜻으로 마쓰이 히데키 대신 투수타카츠 신고대타로 타석에 들여보냈다.[18] 결과는 내야 땅볼로 이치로의 승리(...).
  • 승리를 위해서라면 투수 운용을 다소 무리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위에 얘기했듯이 아와노 히데유키와 히라이 마사후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 때문에 킨테츠 감독 시절 곤도 히로시 투수 코치, 요시이 마사토와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고, 오릭스 감독 재임 중에도 투수 코치이던 야마다 히사시와 종종 대립하곤 했다.
  • 스즈키 이치로의 성이 평범하다며 특징을 주기 위해 등록명을 이치로로 할 것을 제안한 이가 오기 감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타격 코치이던 아라이 히로마사의 아이디어 였다고 한다. 오기는 아라이 코치의 제안을 허가한 인물이었다.
  • 오기가 사망한 날은 2005년 12월 15일. 그런데 오기는 그 해 12월 20일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스즈키 이치로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는데 날이 갈 수록 상태가 안 좋아진 오기는 주치의를 붙잡고 "20일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게 해 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오기의 폐암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설령 그 때까지 살아 있었더라도 식사 도중 안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 때 이치로의 기분은;;; 덧붙여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고 퇴단하여 오릭스 버팔로즈로 이적 예정이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도 별도로 저녁 약속을 잡았지만 마찬가지로 오기의 죽음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1. 시즌 도중 해임
  2. 장훈의 모교이기도 하다. 참고로 장훈은 1956년 전학생으로 입학했다.
  3. 당시 니시테츠의 주전 2루수이던 미야자키 카나메가 37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는 점을 고려한 것도 있다.
  4. 게다가 항상 파이팅 넘치는 허슬 플레이를 펼치던 나카니시 후토시도 3루수로서 철옹성 같은 니시테츠 내야진의 일원으로 맹 활약했다.
  5. 그러나 미하라는 1970년을 끝으로 킨테츠 감독에서 사임. 이듬해인 1971년 야쿠르트 아톰즈 감독으로 이적했다.
  6. 규정상 더블헤더 첫 게임은 9회까지만 진행하며 9회말까지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무승부 처리. 이 상황에서 첫 경기를 무승부로 끝냈다면 그 시점에서 킨테츠의 우승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7. 1987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 수상자이며, 노모 히데오 입단 이전의 킨테츠의 에이스 투수였다. 그런데 아와노는 이날 1차전 9회말에 등판하여 1이닝을 던졌고, 그 이틀 전엔 무려 128개의 투구수로 9회까지 완투했던 상태였다!! 그러니 팔꿈치가 무사했을 리 없다(...)
  8. 근데 사실 침체라기엔 뭔가 애매한 게, 창단(구단명 변경)해인 1991년부터 오기 부임 직전해인 1993년까지 3년연속 3위로 A클래스를 찍었다.
  9. 다만 덕분에 4위가 된 다이에보다 승리수가 딸리고(오릭스와 긴테츠는 68승, 다이에는 69승) 1위 세이부와의 게임차가 다이에와 동일한데다(7.5게임차) 다이에와의 승률차가 불과 0.0006밖에 안 나는(오릭스와 긴테츠는 0.5354, 다이에는 0.5348) 애매한 2위를 만들어냈다(...) 승률계산 때 무승부는 제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
  10. 1989년 오릭스에 팀이 인수된 후 첫 리그 우승.
  11. 3연패 후 1승, 그 뒤 또다시 패배하며 우승실패(...)
  12. 그것도 1차전, 승리한 4차전을 제외하면 패배한 경기가 전부 역전패였다!!(...) 이분 어째 역전당하는 것엔 전문이었던 듯
  13. 참고로 나가시마는 오릭스가 한큐 브레이브스였던 시절에도 일본시리즈에서 우에다 토시하루가 이끌던 한큐에게 1976년~1977년 2년 연속으로 패퇴한 이력이 있다(...) 오릭스 한정 콩라인?
  14. 거기다 2001년 시즌엔 9월 26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와의 최종전에서 8회까지 5-2로 앞서있다가 9회 말 마무리 투수 오쿠보 마사노부아웃 하나도 못 잡고 안타-2루타-볼넷 크리로 만루를 허용했다가 대타 키타가와 히로토시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아, NPB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대타 역전 끝내기 리그우승 홈런 을 선사했다(...) 심지어 당시 긴테쓰 감독은 오기의 제자였던 나시다 마사타카였다!(...) 역시 역전당하는 것의 달인이신 듯..
  15. 이듬해인 2006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에 취임한 동갑내기 노무라 카츠야가 바로 기록을 경신했지만...
  16. 니시테츠 라이온즈(모기업이 니시테츠), 긴테츠 버팔로즈(모기업이 킨테츠), 오릭스 블루웨이브~오릭스 버팔로즈(옛 모기업이 한큐)
  17. 아이러니하게도 오기가 죽은 이듬해 노무라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만약은 없다지만 오기가 2005년에 죽지 않고 그 후에도 감독직을 했다면 다시 한번 싸울 수 있었을지도..?
  18. 전업 투수도 아닌 야수한테 타자가 범타라도 친다면 그게 더 망신이라고 판단한 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