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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티븐 루이스 달코스키(Steven Louis Dalkowski ) |
생년월일 | 1938년 6월 3일 |
출신지 | 뉴 브리튼, 코네티컷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57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자유입단 |
소속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1957~1969) |
(공이 너무 빨라)[1]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아무도 그처럼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Nobody could bring it like he could.
ㅡ 더그 하비. 당시 마이너리그 주심
아마 115마일은 될 걸? 내가 패드를 3개를 끼지 않으면 받지 못하니까 말이야.ㅡ 칼 립켄 시니어[3]
놀란 라이언? 샌디 코팩스? 속도에 있어서는 달코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되지.
1 소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이너리거중 1명. 신이 내린 어깨. 그러나 저주받은 제구력. 별명은 달코 혹은 하얀번개.
가끔 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면 VS놀이중에 흔히 있는 "제구가 하나도 안 되는 170km이상을 던질 수 있는 야구 선수와 제구가 완벽한 130km를 던지는 야구선수중 누가 더 가치가 높음?" 같은 질문을 했을때 실제로 존재했던 170km이상을 언제나 던지는 야구선수.
2 생애
1938년에 태어난 그는 야구를 시작하고 나서 뉴 브리튼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와 야구를 병행했다. 야구는 투수, 미식축구는 쿼터백을 했었다고 하는데, 야구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18삼진 18볼넷으로 노히트 게임을 기록하기도 했고 2경기에서 총 40k를 기록하는등 엄청난 탈삼진 능력을 보여준 그는 195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4천 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후 불안전완 제구력으로 마이너리그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63년 3월 3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스프링캠프에 초대, 3월 23일 뉴욕 양키스와의 시범경기에서 필 린츠를 상대로 구원 등판했다. 그러나 왼쪽 팔 인대가 끊어지면서 이후 구속은 145km/h까지 떨어졌고 결국 1966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후 캘리포니아에서 오렌지와 레몬 따는 일꾼으로 30년을 보내는데 원래부터 알콜중독자였기에 인생까지 완전히 망가져서 오래 못 살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2013년)도 생존해 있으며 2009년 7월 19일 Shrine of the Eternals에 헌정된다.
마이너리그 9시즌 동안 거둔 성적은 995이닝 46승 80패, 1394개의 탈삼진과 1354개의 볼넷. 그리고 5.57의 방어율이었다.
3 초고속광속구 투수
그의 공을 본 누구나 160km는 기본으로 넘길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호프먼 제러드(Hoffman Jerrod) 같은 기자는 "아니, 125, 120마일은 되는 것 같다(각각201,190km)"는 말을 했다. 측정기술이 없던 시대라고는 해도 그를 타석에서 상대해본 수많은 타자들과, 그의 투구를 왼손을 걸고받은 포수들의 한결같은 증언이 그러하다. 자기가 상대해본 최고의 파이어볼러.
그런데 왜 기네스 기록은 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당시에 속도를 잴 수 있는 레이더 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공을 보고 궁금해진 사람들은 속도를 재기 위해 군대에서 개발한 비행물체의 속도를 재기 위한 곳으로 가서 측정을 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속도는 겨우 93.5마일(대략 150.5km). 뭐야 위의 말들은 다 옛날 일들이 미화된 것인가 싶겠지만 다 이유가 있다.
- 전날 선발등판해서 150구 이상을 던지고 왔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투수는 제구가 하나도 안 되기 때문에 던지는 공의 숫자가 언제나 많았다.
- 평평한 땅에서 운동화를 신고 던졌다. 야구장에서 투수는 타석보다 높은 마운드 위에서 낮은 방향으로 공을 던진다. 거기다 스파이크가 없는 운동화는 투수가 전력투구하기 위해 뻗는 긴 스트라이드를 지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백이면 99가 미끄러질 수 밖에 없다.
- 위에서 말했다시피 제구력이 헬이라서 홈 플레이트 만한 기계에 통과시키는 것에 계속 실패했다. 40분 동안 시도하다(…) 결국 속도를 늦춰서라도 집어넣기라도 하자고 해서 겨우 저 속도가 나왔던 것.
이 사람의 기준으로야 겨우지 다른 사람들은..
3.1 달코의 전설
그의 똥 제구와 관련된 일화들도 엄청나다.
-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고교시절 18삼진, 18볼넷으로 노히트 노런 달성.
- 1957년 8월31일 킹스포트에서 열린 경기에서 달코는 블루필드를 상대로 24개의 삼진을 하나 4-8로 패. 볼넷 18개와 몸에 맞은 공 4개, 그리고 6개의 폭투가 있었다.
- 1957년 그는 62이닝 잡은 삼진은 121개. 9이닝 당 18개의 탈삼진이니 전성기 랜디 존슨보다 좋은 수준
물론 마이너리그긴 하지만. 하지만 그 시즌 승은 1승. 볼넷이 129개라 K/BB는 1보다 낮고 39개의 폭투가 있었기 때문. 만난 타자의 3/4가 볼넷이나 삼진 그냥 타자로서 건드릴 수 없는 공을 던졌다.위치도 칠 수 없는 위치고 말이지 - 녹스빌에서 경기를 하던 때에는 상대방 타자 머리위로 공이 날라가자 타자가 겁에 질려 오줌을 지른 나머지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바지를 갈아입고 오는 사태가 발생.
- 1960년 위에서 말했던 얼 위버가 어차피 이 녀석 공은 못 치니 그냥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 좀 더 느리게 던지라고 해서 그게 큰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제구는 결국 개선이 되지 않았다.
- 캘리포니아 스탁턴에서는 위에서 말한 더그 하비가 주심을 보고 있었는데 달코가 던진 공이 하비 주심의 마스크를 맞추자 그 마스크는 세 조각이 나 흩어지고 주심은 5m 뒤로 날랐갔으며 뇌진탕 때문에 삼 일 동안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5]
- 5달러 내기 때문에 5m앞에서 공을 던져 나무재질 외야펜스에 구멍을 뚫었다.
- 10달러 내기에서는 정 가운데 외야펜스에서 공을 던져 포수 뒤쪽의 12m 관객 보호석을 넘겼다.
- 한 경기에서는 하루에 포수 뒤쪽의 철조망을 세개의 투구가 뚫었다. 관객들은 혼비백산.
- 마이애미 마두로 스타디움에서는 관중석 뒤쪽에서 핫도그를 살려고 줄 서 있던 사람의 등을 투구해서 맞춘다.
이미 제구 수준의 문제를 벗어난 것 같다. - 또 다시 스탁턴에서는 던진 공이 관중석 위쪽 중계석의 캐스터의 머리를 강타한 적도 있었다.
고의였다는 말도 있다. - 이스턴 리그 시절에는 27삼진 16볼넷을 기록하며 투구수 286개 달성.
- 2회 강판 경기에서는 이미 투구수가 120개
- ↑ Fastest ever
- ↑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때 딱 한타석 상대해본적이 있다.
- ↑ 칼 립켄 주니어의 아버지로 마이너리스 시절에 달코스키와 배터리를 이뤘다.
- ↑ 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감독으로 감독이지만 원 클럽에서만 활동했다. 1968~1982년, 1985년~1986년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1970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이후 1996년에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1962년에 댈코스키가 뛴 Elmira Pioneers의 감독이었고 이해 댈코스키가 생애 최고의 성적(160이닝 114볼넷 192탈삼진. 댈코스키는 이전까지 이닝당 1.5개 이하의 볼넷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을 올리는 데에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 ↑ 1950년도 당시의 마스크이다. 지금의 그 철제 마스크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