僧科
고려초기부터 시작해 조선전기까지 실시한 승려들의 과거시험
1 교종과
교종과은 예비고시인 성복선과 최종 고시인 대선으로 구분하였다.
교종과은 주로 왕륜사에서 실시되었는데, 고시관은 고승이 선발되었지만 근신이 뽑히는 경우도 있었다. 시험과목은 『화엄경』이 주가 되었고, 공개 토론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승려가 구족계를 받은 뒤 몇 년 동안의 수학기를 지나면 성복선에 응시하게 되었고, 성복선 합격자는 대선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대선에 합격하면 승계를 주었는데 교종의 승계는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승통의 순서로 되어 있었다. 승과에 급제한 대덕에게는 50결의 별사전이 지급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승과의 쇠퇴와 더불어 교종과도 침체되었다.
고려에서 승과를 실시한 최후의 기록으로는 1370년 광명사에서 혜근이 주관했던 공부선이 보인다. 모든 종파를 망라하여 불교계의 통합을 꾀한 것이었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선 전기의 승과도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3년마다 선시를 실시하고, 『화엄경』 및 『십지경』으로 시험하여 30명을 뽑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교종선에 합격하면 중덕-대덕-대사-도대사의 순서로 승진하였으며, 대선에 합격한 자만이 주지가 될 수 있었다. 1504년 승과제도가 폐지된 뒤 1552년에 부활되었다가 1563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2 선종과
선종과의 예비고시는 총석·총림·담선법회 등으로 최종고시는 대선·선선·조계종선·구산선 등으로 불리었다.
일반 과거의 중시에 비견되는 태선·변사과 등도 시행되었던 예가 있다. 수계한 승려는 몇 년 동안 수학하고 예비시험인 총림에 응시 이에 선발되면 대선에 나아갈 자격이 있었다.
고시관은 대개 선종의 고승이 담당하였다. 원응국사 학일이 1123년 대선을 주관하였던 예와 1370년 나옹이 공부선을 주관하였던 예가 있다.
무신집권 이후에는 근신 중에서 문에 능한 자가 고시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171년 내시 정중호가 선종대선의 고시관을 맡았고, 고종 초에는 한광연 유승단 등이 조계종선의 고시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시험방법은 대개 공개토론 형식의 담선이었다. 학일이 대선을 주관할 때 당시의 고승들이 이종자기에 대해 성담하였던 예나 승형이 광명사 대선에 임하여 문제에 답할 때 시냇물이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고 한 예 나옹이 공부선을 주관할 때 입문삼구·공부삼절·삼관등에 대해 물었다는 예 등이 있다.
선종선에 합격하면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선사·대선사 등의 법계로 승진할 수 있었고, 대덕에게는 별사전 50결이 지급되었다.
수행이 높은 고승의 경우, 왕사 및 국사에 봉해질 수 있었다. 몽고간섭시기 이후부터 승과는 침체되었다. 승려에 대한 인사행정인 승비가 변칙적으로 운영되는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초기에는 선종선이 시행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승과는 3년마다 실시하되, ≪경덕전등록≫ 및 ≪선문염송≫으로 시험하고, 30명을 뽑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1504년 폐지 후 1552년에 부활되었지만, 1566년 다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