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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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1]
불교는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를 개조로 하는 종교다.[2] 또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진리)을 신앙하는 종교다.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와 함께 세계의 대표적인 4대 종교 중 하나. 세계적으로 약 4억 8천만 명에서 5억 3천 500만 명 정도[3]의 신도가 있으며, 종교라는 한자어를 맨 처음 만들어낸 종교이기도 하다. 유교, 도교, 경교 등이 모두 부차적인 가르침이고 불교가 으뜸가는(宗) 가르침(敎)라고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다. 간혹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애초에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다만 '종교'가 '특정한 신을 따르는 교'라는 의미라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특정한 신을 추종하는 교가 아니다. 불을 믿는 종교도 아니다. 단어의 어원이지만 나중에 추가된 의미에는 속하지 않는 케이스.

현재의 불교는 크게 북방의 대승불교와 남방의 상좌부 불교로 구분된다. 핵심적인 교리는 차이가 없지만, 수행법이나 사상면에서 차이가 있다. 대승불교는 인도 북부 지역과 한자문화권에 주로 전래되었고 상좌부 불교는 주로 동남아시아에 전해졌다. 미국이나 유럽에 전해진 불교는 여러지역에서 전래되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불(佛:불타)은 부처라고도 말하며 뜻은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anchor(초기 불교)]

2 초기 불교

초기 불교는 원시 불교라고도 불리며,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교단에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 곧 그의 입멸 후 약 100년까지의 불교를 말한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5부 니까야'라고 하는 팔리어 경전으로 전승되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팔리어는 부처 생존 당시에 부처가 직접 사용한 언어. 이런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의 전통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약 2세기 뒤에야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전해진 것이 팔리어 니까야(대장경)이다.

니까야는 5부 니까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5부 니까야란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쌍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쿳다까니까야를 말한다. 니까야는 다양한 나라의 문자로 번역되었는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초기불전연구원 등에서 한국어로도 번역하고 있으며 다양한 번역자들의 개별 번역본도 존재한다. 인터넷 서점에 '니까야'를 쳐보면 나온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기준 5부 니까야 중 4부 니까야는 번역이 완역되었고 쿳다까니까야는 《숫타니파타》, 《법구경-담마파다》, 《우다나》, 《이띠붓따까》가 번역이 완역되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디가, 맛지마, 상윳따, 앙굿따라 4부 니까야가 번역이 완료되었다.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우선 위의 불경들을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유명 스님들의 책이나 '불교에 대해서 알려줄게'류의 2차 3차 저작들을 읽는 것보다 경전을 직접 읽는게 해당 종교를 접하고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참고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의 번역으로 예전부터 한국에 널리 알려진 《숫타니파타》와 《법구경-담마파다》는 5부 니까야 중에서도 초기의 불경에 속한다.

대승불교의 경전은 《금강경》, 《묘법연화경》, 《화엄경》, 《유마경》, 《아미타경》을 읽어보길 권한다. 위의 5개의 경전들은 대승불교의 경전들 중에서도 초기의 불경에 속한다. 불교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최소한 위에 언급한 경전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2.1 부처

부처, 혹은 '붓다(Buddha:佛)'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참고로 한자 佛은 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다. 붓다에 가까운 발음인 弗에 '사람 인' 변을 더했다. 원래의 한국 한자음은 '붓'이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불'로 음운 변화했다. 보통 부처라고 하면 석가모니(고타마 붓다)를 가리킨다. 그 외에도 불교에는 많은 부처가 존재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2.2 부처가 설한 법(다르마)

부처의 가르침을 불법이라 한다. 석가모니는 진리(다르마)를 최상의 지혜로 통찰한 후,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꼭 알아야 할 것들만을 정리해서 개념화, 언어화 해서 부처의 가르침, 불법(다르마)으로 전수하였다.

다르마의 원류는 부처 이전부터의 '바른 의무나 덕성스러운 길' 의 뜻을 갖는 인도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용어이다. 다르마는 인도철학을 통하여 우주의 진리나 최상의 실체 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불교에서 법(다르마)은 그 뜻이 매우 다양하며, 교법, 최고의 진리, 법칙, 도리, 존재, 실체, 또는 모든 존재(일체법)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르마의 넓은 의미로는 바른 행동, 도덕적 가르침, 우주적인 법칙, 교리, 상태, 도덕적 행위, 현상, 정의, 대상, 개념, 진리, 바른길, 교훈, 성질, 조건, 요소, 본성 등 다양하다. 부처는 이런 다양한 훌륭한 뜻을 지닌 용어인 다르마를 채용하여 본인의 가르침을 표현할 때 '다르마'라고 하였다. 그래서 좁은 의미로는 '부처의 가르침' 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함축적 의미는 이런 다양한 훌륭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가 '사람이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 핵심적으로 요약해서, 명확한 언어로 전달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 불법(다르마)이다. 괴로움을 영원히 종식시키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렇게 핵심만 요약해서 전달한 불법 중의 핵심이 4가지 성스러운 '진리', 사성제(四聖諦). 부처가 최초로 법을 설한 초전법륜의 내용도 사성제의 내용이다.


3 불교의 핵심적 특징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석가모니가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 사성제인 고, 집, 멸, 도(苦, 集, 滅, 道) 4가지 진리를 받아들인다.
  • 팔정도의 수행방법이 있다. 팔정도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의도,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깨어있음, 올바른 집중의 8가지 수행을 뜻한다.
  • 바라밀 수행방법이 있다. 보시,지계,인욕,정신,선정,반야의 6바라밀이 있고 방편, 원, 역, 지의 4가지 바라밀을 추가한 10바라밀이 있다. 6바라밀중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집중으로 팔정도의 올바른 집중(정정)에 해당된다. 마지막 반야바라밀은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원인으로 여긴다.
  •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 그 교의(敎義)는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 힌두교의 일부 종파와 달리, 불교는 고행을 권하지 않는다.[4] 일단 개조인 석가모니부터가 극단적인 단식과 걸행 등의 고행을 그만둔 다음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달음을 이뤘다. 불교는 몸을 해치는 절식(絕食)이나 각종 무모한 고행을 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깨달음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4 타 종교 간의 관계

불교는 타 종교의 신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철학적으로 탄탄한 바탕을 자생적으로 갖추었다.[5] 이러한 철학적 이미지 때문에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양인들은 불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6]

그런 이유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유화적인 게 특징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이들이 석가모니 중심의 다신교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되는 면이 없지는 않다. 냉정히 말해 평신도들의 기복적인 신앙 모습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불자가 아니면 다신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럴 때는 이 부처/보살에게 빌고, 저럴 때는 저런 부처/보살에게 빌고. 다만 이를 크게 탓하기도 뭐한 것이, 불교의 기본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하는 자력 구원이 중심이긴 하지만 초기부터 이미 부처/보살의 가피력으로 구원받는 타력 구원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7] 또한 부처에게 개인적인 복을 빌다가 불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제대로 된 교리를 알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자비를 모토로 삼는 종교라고는 하나, 역사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타 종교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곤 하지만 실은 본지수적. 즉,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환생하거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 불교 외의 모든 종교를 불교의 열화상태, 혹은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의 힌두교를 보면 알겠지만 다신교라고 타 종교나 외국 선진 문물에 융화적인 건 절대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타문화와 적응은 굉장한 수준. 이런 면은 현대 문명과 실시간으로 치고 박으면서 가장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 그리스도교를 능가할 정도. 메이저 종교 중 폭력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적은, 몇 되지 않는 경우 중의 하나다.

물론 역사적으로 불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쿠샨 왕조 같은 경우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주변국들은 정벌하고 먼 나라에서는 고승들을 파견해 전도하는 방법을 썼다. 한반도의 경우, 고려 시대 무신정권 시절 교종 계열 종파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대항해 난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이 건국된 후 일부 고위 승려들이 하급 승려들을 모아서 조선 정부를 타도하고 불교국가의 부흥을 꾀하고자 당취(黨聚)라는 조직을 만들어, 계율을 어겨 타락한 승려를 응징함과 동시에, 주변 절들과 마을에 약탈과 방화, 살인을 벌이기도 했다(여기에서는 땡초를 참고)[8].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엔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승려인 척했던 게 태반인 소헤이처럼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불교 측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부처극락 야소지옥"을 외치며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탄압한 기록도 있고(...) 한편 동남아 상좌부 불교에서는 극단주의가 만연해지고 있는 실상이다 [참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처음 불교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도입될 당시 부처=신이라는 관념 하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토속신앙에서 신과 부처를 혼용/동일시하거나, 삼국유사의 불교 도입 당시 신라 귀족들이나 일본 사서에서 모노노베 씨의 불보살들을 외국의 신으로 부르고, 불교 도입에 찬성한 소가 씨 역시 외국의 신이라는 주장 자체에는 반발하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유달리 두드려져서 그렇지, 동남아권 남방 불교나 인도 본토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미얀마 같은 경우에도 토속신앙인 낫(정령)이 불교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인도 본토에서도 인도의 토속신앙의 신들을 부처/보살, 명왕, 신중, 천인 등의 표현을 붙여서 흡수하기도 했다. 지모신 숭배가 모태가 된 지장보살이나 바라문교의 천신이었던 제석천, 태양신 신앙과 관련있으며 특히 밀교에서 중시하는 대일여래 등이 대표적인 경우.

4.1 힌두교와의 관계

힌두교하고도 사이가 좋지 못해서 힌두 경전을 보면 불교를 비하하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 흔히 사람들에겐 힌두교에서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가 붓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 비슈누가 붓다로 변신해서 악마들을 타락시켜 그들의 힘을 빼앗으려던 것이다. 불법은 정법(正法)이 아니므로 악마들이 불법을 믿게 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힘을 잃게 된다는 논리. 결국 엄청난 불교 모독이자 불교 신자들을 싸그리 악마로 치부해 버리는 광역도발인 셈이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인 신들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차용한 장면이 나온다.

인도 헌법의 아버지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불합리한 카스트 제도의 근원이 힌두교에 있다고 보고 50만명의 불가촉천민들과 합동 개종을 한 적이 있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참고.

4.2 도교와의 관계

도교와의 관계는 지금이야 별다른 마찰이 없지만 한때 잘 나갔을 때는 역사상으로 엄청나게 치고 받았다.[9] 중국 당나라 시절 도교, 경교와 함께 타 종교 배척, 숙청전이 꽤 화려했다. 당송 시기의 도교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어느 정도 불교를 압도하던 시기가 있지만 그 이후엔 이렇다 할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민간이라 철저하게 민간신앙으로 파고들어 민간 도교 시대로 접어든다. 민간도교는 기복신앙이 매우 발달해서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게 함정 안습 지금 와서는 민간 신앙과 도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이리저리 뒤섞여서 구분하기도 힘든 상태다.

노자의 사망이 불분명한 것을 양측에서 이용했는데 이른바 노자화호설이 화두가 되었다. 불교에선 청정법행경이란 위경까지 쓰면서 노자를 가섭존자의 환생이라 주장했고, 도교측에선 불경을 서쪽으로 떠난 노자의 이론이 되돌아온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노자화호설이 불교에서 창작한 것이란 설도 있어서 미묘. 참고로 <불교의 중국 정복>(에릭 쥐르허 저)이란 연구서에서는 노자화호설의 문헌 등장이 불교에서 먼저 나왔다는 점을 들어 불교 측의 창작이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무튼 이 설은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될 당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에 호응해 불교에 대한 반감을 낮추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고, 이후 양측에서 계속 잘 써먹다가 결국에는 원나라 당시 도교티베트 불교와의 교리논쟁에서 비판받기도 했었다. 지금도 노자화호설은 중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이론이다.

한국에서도 역사적으로 도교와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연개소문이 옛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를 억제하기 위해 도교중국에서 수입하다가, 이것이 상당히 갈등을 일으켜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의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건 도교와 불교의 충돌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사건이다. 연개소문영류왕을 쿠데타로 시해한 것은 당시 불교의 왕즉불 사상에 위배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수많은 불교도들의 반발이 있어왔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선택한 일종의 사상통제책이 바로 도교의 수입이라는 것. 더욱이 연개소문과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기존 정치세력들의 종교는 불교와, 불교랑 결합한 상태인 토착신앙이었다. 그런데 도교와의 충돌에 대해서는 고구려 후기부터 고분벽화에서 불교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다소 비판적인 주장도 있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명나라 때의 서유기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중심적 위치를 반반씩 갖고 있다. 당장 손오공의 스승인 수보리 조사가 불교+도교적인 인물로 나온다. 손오공이 요괴에 홀렸던 왕에게 "삼교(유교까지 합쳐서)를 골고루 신봉하여 도사도 공경하고 스님도 존경하며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르시라"고 훈계하는 장면도 2번 정도 나온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삼교론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에는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삼장법사와 함께 서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도인들은 당나라 시기 도교VS불교의 극한 대립을 반영해서인지 도인이 활개치는 나라에서는 승려들은 부려먹히는 신세인데 사실 그렇게 된게 요괴들이 도인 행세해서인 경우가 많다.

4.3 유교와의 관계

유교와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나쁜 편. 특히 고려 왕조 때 국교 격까지 갔었던 것이 유교조선왕조에 들어서 불교를 밀어내고 국교로 지정되면서, 조선왕조 시절 양반들과 호걸 및 관료들이 불교와 승려를 탄압하고 천시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펴면서 사이가 나빠진 편이다. 게다가 신분제도에 있어서도 승려는 하층민 계통인 천민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왕조 시절에는 유림과 양반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당해왔고 일부 승려들은 노비, 백정, 평민들과 함께 궁궐 복원공사 등에도 동원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다.

얼마나 유교사상이 조선을 지배했냐면, 이런 일도 있었다. 박지원열하일기청나라에 가서 건륭제로부터 불상을 선물로 받은 기록이 나온다. 박지원은 유학자였기에 청나라 저잣거리에다 그 불상을 비싼 가격에 팔아 불상을 판 돈이라고 자신이 가지지 않고는 짐꾼들에게 술이라도 사먹으라고 줬으나 짐꾼들마저 불상을 판 돈이라 받기를 거부하여 마부에게 주었는데 마부조차 받기를 거부했다.

중국 후한 시대에 불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오랑캐의 가르침이라면서 불교 유입에 민감했다. 한대에 융성했던 유교 문화는 현실적, 윤리적인 도덕 철학을 강조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불교 이론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중국 대륙이 쑥대밭이 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이유는 불교의 사상이 민중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어주었고, 윤회론에 입각한 내세관, 방대한 경전체계, 인도 의술에 능통한 승려들의 의약구제, 위정자들에게 부담이 없는 구세이념[10], 전술 지식을 알려주는 신승들의 전술적 가치, 한족 중심적이었던 유교와는 달리 호(胡)족들에게 친화적이었던 이방 이념들이 당시 중국인들의 필요조건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4.4 한국 토속신앙과의 관계

한국은 불교 도입에 상당히 온건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토속신앙을 한꺼번에 묶을 필요가 있던 지배층들은 불교 수용에 긍정적이었고, 덕분에 유달리 한국에서는 불교와 토속신앙 간에 융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토속신앙의 불교화와 불교의 기복적/주술적인 토속신앙의 의례/관념 수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장 현재 한국동남아 불교의 같은 의례를 놓고 비교해도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고 토속신앙이 뵌교와 티베트 불교처럼 완전히 동일화되진 않았다. 현재의 무속이나 민족종교를 봐도 불교를 일부 차용했을 뿐, 불교와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다. 물론 승려보살로 칭하는 무속인들의 경우에는 상당히 불교색이 강하지만, 무당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별/개인별 차이는 크며, 오히려 근래에는 민족종교로서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추세다.

사실 현재 한국불교와 토속신앙의 강한 유착관계는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 섞인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륵 신앙. 기복적인 토착 천신/용신 숭배사상과 완전히 결합하였다. 이러한 문화가 고착화된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영향이 컸다. 숭유억불 정책 하에서 불교와 토착신앙이 살아남기 위해 융합하면서 남사당패, 점이나 굿을 하는 스님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

현재 한국 불교와 무교 양측에서는 예전처럼 꼭 결합해야만 할 일도 없기에 각자 개성을 살리는 쪽이긴 하나, 불교 종파마다 차이가 크다. 일례로 대한불교조계종 같은 경우 순수불교 정신을 내세우며 절에서 하는 천도재, 49재 등도 대폭 간소화한 데 반해, 한국불교태고종 같은 경우 예전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의례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도들이 조계종의 단순한 의례에 만족을 못해, 태고종 스님들을 모셔오거나 의례를 배워와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1].

한국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불교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례나 불교하고 아예 접점이 없는 가택신 신앙(특히 조왕신)이나 북두칠성 신앙, 민간신앙에서 불교를 철저하게 무속신의 일부로 보는 점 등을 근거로 인정하지 않거나,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화된 민속신앙"을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12]. 실제로 현재 국내에 조왕신 신앙의 흔적을 사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일반 민가보다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북두칠성연명경처럼 기복적인 토속신앙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경전도 있다.

다만 토속신앙에 대한 대접엔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절의 중심은 붓다/보살이지 토속신이 아니니까. 그래도 관련된 재와 법회도 정기적으로 지내주고, 불교를 잘 믿고 선행을 하면 복을 주고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징벌을 내리는 강력한 호법신으로 인식하고는 있다. 원광대학교 조용헌 교수는 저서 <조용헌의 사찰기행>에서 이러한 인식을 법(부처)은 멀고 주먹(산신)은 가깝다고 한줄로 요약한 바 있다.(...)

하지만 불교 기준에서는 토속신은 어디까지나 호법선신으로서 절과 불법을 수호하고 신도나 승려들이 필요할 경우 도와주는 존재일 뿐, 부처/보살같은 존숭의 대상은 아니다.

토속신들이 대우받는 것도 불교가 토속신을 위대하게 여겨서는 절대 아니다. 당장 삼성각을 따로 짓지 않는 수준의 작은 절을 보면 대웅전에 합사할 때 토속신을 신중과 마찬가지로 하단에 배치한다. 기복신앙적 불자들이나 무속인들이 시주하는 재물 수입이 쏠쏠하니 그만큼 투자를 하는 것 뿐. 신중신앙이 지금보다 흔했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절에서 신중 법회/재는 고려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했다. 근현대 조계종의 불교개혁운동 이전에는 신중단에도 절을 하였으나, 성철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승려가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중에게 절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구한말~일제강점기부터 불교를 근대화시키자는 승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던 사안이었으나, 해방 후 성철스님을 비롯한 개혁주의 성향의 승려들이 결정타를 내리면서 한국 불교의 신중신앙과 토속신 신앙은 동시에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토속신들은 원래 불교의 요소가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에게 불교 전래 이전부터 오랫동안 친근한 존재였고, 동시에 불교 전래 이후에도 신앙관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개혁주의 성향 승려들이 대부분 입적하면서 다시 한국 불교 내부에서 신앙그리고 한국 절들의 수입원 중 하나의 대상이 되었지만, 정작 원래 불교의 일원이던 신중들은 예전만큼 큰 영향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봉암사에서 결사를 이끌던 시절 비불요소 철폐를 외치며 [토속신 전각은 물론 신장탱조차 없애고 여러 불공을 철폐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성철스님의 생전에는 토속신앙적 기복신앙에 배타적이었던 해인사가 결국 독성각으로 복원한 것도[13], 전술했듯 근본주의 사상이 강한 조계종도 서울 조계사를 제외하면 조계종의 간략화된 불교의례보다 기존의 해오던 재래식 불교의례를 신도들이 원한다고 유지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참고로 성철스님이 결사를 열었던 봉암사는 결사 당시에는 토속신앙 건물을 철거하였으나([참조]), 지금은 [대웅전을 확장하고 산신각을 복원한 지 오래다.] 특정한 기간이 아니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는 사찰인데도 말이다.

때문에 현대불교, 생활불교를 중시하는 종파의 경우 독립된 토속신을 모시는 전각을 찾을 수 없다. 대한불교천태종, 밀교 종단인 대한불교진각종과 여기서 갈라져 나온 총지종은 밀교거나 밀교적 성향이 있음에도 이런 이유로 토속신을 모시는 전각은 물론 밀교에서 중시하는 신중이나 명왕을 위한 전각이 없다. 다만 천태종의 경우 법회/재를 주관하고 신도들을 위해 복을 빌고 기도해주는 부전승이 다른 종파와는 달리 정식으로 교단에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고, 의전국이라는 전담부서도 있다.

천룡팔부같은 원래부터 불교에 있었던 신중의 경우 해방 후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대웅전 내 한 구석에 작게 신중전을 차려놓는 선에서 끝나는 게 일반적이고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은 편. 법회가 열려도 보통은 토속신들과 같이 하단을 차지할 뿐이고, 독립적인 법회나 재는 찾기 힘들다. 당장 우리나라 절에서 산신과 산신재 혹은 산신법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오는데, 과거 밀교가 나름대로 번창하던 때는 삼국유사에도 나오듯이 제석이나 사천왕 같은 경우 토속신앙의 천신/오방신 신앙과 결부되어[14] 해당 위격만을 모시는 절도 있었지만, 나머지 신중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재를 지낸다 해도 대부분 예불 때 신중단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읽는 정도가 고작. 그마저도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읇는 것은 신중을 높이는 의미에서 독경하는 게 아니라, 신중에게 설법을 하는 의미로서 읽는 것이다[15].

토속신앙의 신들이 대부분 독자적인 전각(칠성각, 삼성각 등)을 세워 따로 모신 것에 비하면 큰 차이점이다. 일본에도 사찰 안에 작은 신사를 세운 사례는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 빈도도 웬만한 절이면 거의 토속신앙의 신을 모신 제대로 된 전각이 있는 한국에 비하면 좀 안습인 경우가 많다. 적당한 데 석등만한 가미다나 차리고 끝이라든지.

4.5 신토와의 관계

일본의 경우 아스카 시대에선 신토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앙숙으로 지내 왔다. 실제로 불교가 처음 일본으로 도입될 당시 위에서 나온 대로 귀족 정치싸움과 맞물려 친불교파인 소가씨와 반불파인 모노노베씨 간에 엄청난 충돌이 일어난데다,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던 불교 교파는 현세구복과 주술력을 강조하는 진언종 같은 밀교 교파가 주류였다.

당연히 현세구복을 중요시하던 토속신앙인 신토와 이권다툼(?)을 벌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모노노베 씨와 신토가 소가씨/불교 세력에 밀려나 버리고 만다. 이때부터 소위 본지수적에 입각하여 기존 신토의 신들을 모두 불교의 부처/보살의 화신(아바타)로 격하시키고, 나중에는 아예 전원 신중으로까지 눌러댔다.

이후 신토는 지속적으로 불교의 위세 앞에서 큰 힘을 내지 못했다. 에도 막부 중기에 민간의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관습이 등장해 사정이 나아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기복신앙은 대단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순례시 봉건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를 민중들이 저질러도 막부에서 어지간하면 눈감고 넘어갈 정도였다. 이런 시절에도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들은 민중들의 신사 참배를 제지하는 행위를 하다 문제가 생겼을 정도.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신토가 불교를 누른 것은 에도 말~메이지 유신 초기를 거치면서 일본 철학계에서 자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일어나고, 한국에서 넘어간 성리학 사상을 기초로 한 반불교적/국수주의적 국학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는데... 그 결과물은 바로 국가신토. 안습. 물론 형식적으로는 국가신토가 몰락한 지금은 별탈없이 잘 지내는 편이다.

일본메이지 유신 때는 오히려 불교를 억누르고 신토를 분리시키려 하기도 했다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정책이 바로 승려에 대한 도성 개방이었다.

4.6 그리스도교와의 관계

중국에서는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마테오 리치 신부가 명나라에서 선교할 때, "유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와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불교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당시 명나라 사대부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목적 역시도 있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다.

교리적인 이유들도 있다. 그리스도교윤회를 믿지 않으며, 단 한 번의 창조-구원-공심판과 종말이라는 직선적인 세계관을 가진다.

또한 신(神)관, 구원관이 정반대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유일신이며 창조주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 즉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상 수난과 부활, 성령의 활동 등으로 얻어진다고 가르친다. 인간 개개인의 노력과 믿음 역시도 중요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개인의 '응답'이며, 따라서 구원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값 없는' 은총이라 가르친다. 반면 불교는 그러한 의미를 지닌 신(유일신,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종교이며,[16] 개인의 수행과 노력으로 해탈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물론 불교 역시 파고들면 아미타불 같은 케이스가 있는 만큼, 이렇다 저렇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역량이 상당히 강조된다.[17]

물론 두 종교 모두 교리상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중시하는 등의 공통점도 많지만, 앞에서 말한 차이점 등으로 인해 교리적으로는 호환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 신부는 저서 <천주실의>에서도 불교를 매우 디스했다.[18] 그러나 중국에서는 기독교 자체가 흥하지 못했던지라[19] 신자들끼리의 이렇다 할 분쟁은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초기 조선 천주교나 불교나 세트로 국가로부터 탄압당하던 처지라 동병상련의 심정이 있었는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0] 천주교를 공부하는 수많은 신자들을 받아들여 집회를 보게 하였다. 천주교의 성지들 중 그래서 은근히 절 터가 많다. 신자들끼리는 그럭저럭 우호적인 편이었다. 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에게 승려가 명복을 빌어주는 사례도 있었다. 물론 교리적으로 볼 때 가톨릭과 불교는 다른 점이 많았으나, 신자 개개인 단위에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도 불교 승려성당에서, 가톨릭 신부에서 강연을 하는 사례가 있으며,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도 한몫 해서 성탄절석가탄신일에 서로 축하 메세지도 보내곤 한다. 참고로 이 두 날이 모두 공휴일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하지만 개신교와의 관계는 아무래도 가톨릭 쪽보다는 살벌하다. 다만 개신교 자체는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여러 종파들의 묶음이다 보니, 관계를 요약하기는 어렵다. 일부 극단적 개신교 종파들이 사찰이나 불상에 준테러급의 짓거리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들의 종교 갈등 사례에 비한다면 대규모 폭력 사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다만 신자들 간의 감정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살벌한 게 사실이다. 나이 지긋하신 개신교 신자가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경우는 결코 적지 않으며, 더 큰 문제는 그 개신교 신자가 교육한 어린아이들이 불교를 믿는 친척집에 가서 "지옥 간다"는 소리를 하여 친척들 간 종교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광역 어그로 이는 불교쪽도 마찬가지로 예수 불자설이나 '묵주염주에서 유래되었다'라는 황당한 헛소리주장을 하는 불교 신자들이 있다.

개신교도 무리가 사찰 등에 단체 관광을 가서 땅밟기 같은 걸 하는 사례도 있어서, 다른 종교 신자들이나 같은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당하기도 한다.[21]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 초기에 키리시탄 탄압 때 제일 먼저 나선 종교가 불교였고, 상당수의 승려들이 앞장서서 후미에를 실시했다. 그 이유는 오다 노부나가가 원래 무신론자에 반불교 성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교 세력들이 많아, 이 불교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가톨릭을 지원한 데에 있다. 그러니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 반하는 입장인 도쿠가와 막부에선 키리시탄들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으며[22], 이 때 일본 불교는 더더욱 반기독교 성향이었다.

가톨릭 신앙 금지령을 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도가 되길 바랄 정도로 독실한 불교도였지만, 당시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일본 사회에 맞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가톨릭 자체가 유일신 신앙이라 불교와 다신교신토를 부정할 수 밖에 없으며[23], 생명을 중시했기 때문에 할복을 금지시켰고, 일부다처제도 부정하기까지 했으니 가톨릭의 확산은 당시 근세 일본 사회에 있어 위협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카쿠레키리시탄 참조.

한편 스리랑카에서는 불교인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전 당시에는 힌두계 타밀족에 대한 핍박을 주로 했으나, 내전이 끝나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핍박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한테 반감이 있는 이유도 과거 유럽 식민주의 팽창 당시 가톨릭이 불교 승려를 처형하거나 핍박하였고, 개신교는 처형은 안 했다만 불교인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4.7 이슬람과의 관계

인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그라 든 것은 [24] 바로 이슬람교 때문이다. 비단 인도 뿐만 아니라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사그라 든 것도 이슬람교의 확산과 맞물린 일이다. 즉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인도의 이슬람교도 확산은 불교의 축소와 연관되어 있다.

태국에서는 태국 남부에 이슬람을 믿는 지역에 불교도를 이주시키고 승병도 나타나는 일도 있었다. 현재는 충돌이 많이 약해졌지만, 불교급진파가 늘면서 힌두교 말고도 소수 이슬람이나 기독교에 대해서도 굉장한 거부감을 보이고, 교회나 마스지드를 불교성지에 지었기에 불교도 시위대가 가서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소수 이슬람과 갈등으로 이슬람 급진파 공격을 받자 승려들이 무장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다만 태국 문서나 스리랑카 문서를 참고하면 좀 복잡한 면이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라족 불교 근본주의 단체인 부두발라세나의 영향이 크다. 스리랑카 내에 반이슬람 여론을 강력히 이끌어가고 있으며,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정치의 영역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으며, [미얀마의 극단주의 불교세력인 969과도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할 것.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한 적이 있었지만 이슬람, 기독교와는 상당히 악연으로서 이들의 우상파괴 논리에 의해 수많은 미술품이 파괴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25]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종교는 [전부 이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불교는 이슬람교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인도아라비아 반도는 매우 가깝고, 인도 불자들이 아라비아로 가서 불교를 전하기도 했으며 메카는 이슬람 이전 불교도들도 꽤 많았다. 무함마드가 불교 교리를 받아들인 것이 카르마(업)와 염불의 일종인 지크르와 아잔, 그리고 염주의 사용 등이 있다. 실제로 이슬람의 아잔은 불경 독경과 비슷한 분위기로 들린다.

4.8 왕즉불 사상

동아시아 지배계층에서 불교가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왕즉불 사상을 이용한 것이다. 이는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지배계층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왜곡이었다.[26]

백제 성왕(이름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따옴),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불교식 왕호를 사용했고, 진흥왕의 경우엔 전륜성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부처처럼 만들거나 고려사 악지에 임금을 제불(海東天子當今帝佛)이라 칭하기도 했다.

5 한국 내에서의 불교의 위치

대한민국의 7대 종단(한국종교인평화회의)
불교개신교천주교유교원불교천도교한국민족종교협의회
대한민국/종교

5.1 전근대 시기의 불교

한국 불교는 굉장히 재밌는 성향을 가졌는데, 바로 현세구복적, 호국적이라는 점이다.[27] 이는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종교나 학문으로써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고대에 각 토속신앙으로 분열되어 있던 민심과 지배층을 한꺼번에 불교란 고등종교를 이용해 사상적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시대 등 고대국가의 군주들은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개발해 왕이 곧 부처님이라고 선전했고, 따라서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은 왕의 병사가 됐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상징인 사찰을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이렇게 승려가 지배층의 친위세력이 되면서 호국불교란 개념이 생겼는데, 박노자 같은 극단적 평화주의자는 한국의 호국불교 전통에 대해 '평화의 종교인 불교가 그 성직자가 살인을 하도록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째서 칭송받을 일이냐'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도올 김용옥호국불교는 지배권력과의 야합이라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김용옥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본격 불교 비평서적에서 이차돈순교자가 아니라 쿠데타에 동원된 행동대장에 불과하며, 불교 공인은 권력에 의한 보상이라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불교계는 단순한 종교집단에서 벗어나 지배계층으로 대두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고려시대까지의 불교계의 위상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는 얘기다. 광종 때 이미 승과제도를 도입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해 불교계의 권위를 상징적으로나마 왕권보다 위에 두었다. 또한 국가로부터 토지와 면역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받아 경제적인 성장의 발판도 마련했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 등 상업활동에 관여하자 사원의 세속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종파적 분열의 양상까지 보여 불교계 내외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해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불교계의 경제적 폐단과 정치권에 대한 관여를 비판했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비판은 고려 내에서 개혁운동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제기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불교의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고려 시대까지는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 불교의 사상이 도전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 차례 결사운동이 일어나, 의천천태종을 통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고 지눌은 무신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상을 타파하기 위해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해 갔다. 의천의 방식은 불행히도 사상적인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28]의 통합이였기에 의천 사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 지눌의 혁신운동은 사상적인 통합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지눌 이후에도 지속되며 상당한 성과를 보았고 사상적으로도 그 제자인 혜심의 유불일치설로 이어져 성리학이 수용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간섭기가 되자 몽골의 영향으로 불교계는 점차 사대적인 귀족불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법상종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되었고, 사원은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 관여하는 등 부패가 심화되었다. 고려 말 대두하기 시작한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불교계의 폐단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들은 과거의 유학자들이 불교의 폐단만 비판했던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사상 자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진사대부가 건국한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계의 위상은 점차 추락하여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 윤리사상을 유교 윤리사상으로 전환시켜 국가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고, 경제적으로도 사원에 예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가재정으로 환속했다. 일시적인 숭불책이 수 차례 있었으나 숭유억불의 조류는 꾸준히 지속되었고 불교계는 경제적 기반과 인적 자원을 상실하여 사회적 위상을 잃었다. 그러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잃었을 뿐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궁중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신봉되었고 교리의 발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교계가 보여준 호국적인 양상 또한 역사가 깊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 당시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해치운 사람도 승장 김윤후였다.[29]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당시 사명당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 궐기를 촉구했고, 그렇게 결성된 승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사명당은 이들 승군을 통솔하는 명목상 직책인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이전에 비해 억압적인 면모가 꽤 줄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가서 성리학이 쇠퇴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져, 한때 불교 억제정책을 강화했던 정조마저 나중에는 이를 사실상 철회하고 수원용주사를 건립했으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승려 자체는 계속 낮은 신분이었기에, 사찰의 재물을 노리고 공격을 당하거나 아예 절을 빼앗아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주장이 나왔는데, 조선시대의 호국불교는 당시 불교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 정부의 전형적인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서 여러가지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극히 반조선적 성향을 띠었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속칭 말하는 '이렇게 우리가 도와주고 나면 우리의 사정도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물심양면으로 조선 정부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 정부 측에서는 '오! 이런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나?' 하면서 승려들을 부역에 더더욱 많이 동원했다는 후새드한 후일담이 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등으로 공납할 장인들이 모자라자 등에 공납의 의무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낮에는 예불 밤에는 공작

여하튼 불교에 대한 조선 왕조의 자세가 다소 완화된건 임진왜란 전후라는건 확실하다. 우선 상기한 대로 불교계가 조선 왕조 수호에 한 몫을 한 것도 있고, 전후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는데는 전란을 피해 멀리 도망가 있던 양반들의 전유물인 성리학보다 전란에도 대중의 곁을 지키며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불교가 더 유리했고, 전쟁으로 조선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이 죄다 갈아엎어지면서[30] 다른 최중요 과제들[31]이 잔뜩 늘어난데다가, 이후 인조반정, 양대호란 등을 위시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발등에 수차례 떨어진 불 끄기도 바쁜 조선 왕조가 불교 탄압에 예전만큼 신경 쓸 겨를이 줄어들었기 떄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조선 왕조에게 억압받은 시기 때문에 한국 불교에서는 수도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행정이나 대외 부역참여 등에 무게를 두는 사판승의 이원론적 체계가 생겨났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한국 불교에서는 각 절의 관리자가 2명씩 있다. 행정업을 맡는 주지와, 종교적 업무/승려 교육을 전담하는 방장. 종교 지도자도 마찬가지라 조계종의 경우 행정업 전담인 총무원장과 종교적 업무 전담인 종정이 따로 있다. (타 종파의 사례는 추가바람)

일단 전조인 고려시대에 불교가 행했던 영향력과 악행들도 있고,[32] 유교의 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택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호국 불교에도 불구하고 불교 자체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취급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 예로 도첩제가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 거액의 포를 바치거나[33] 부역에 몇 개월 동안 무보수로 일해야 도첩을 얻을 수 있었다.[34] 이는 숭유억불 정책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도첩제 자체가 양인의 승려화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승려세금을 안내니까.

대한제국 이전까지 승려는 천민계급 중 하나였다. 신량역천도 아니고 법제적인 천민도 아니지만, 성리학적 규범과 양반 사회가 확립되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도성 출입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왕실의 원찰이나 승려가 도성에 들어온다고 승려 도성출입 금령을 자주 내린 걸 보면 잘 지켜지긴 했는지 의문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구한말 시기로서, 일본 불교인 일련종의 일본인 승려 사노가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통한 적극적인 로비로 출입 허가를 받아냈다. 물론 이렇게 사노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본 불교의 종지로 한국 불교를 개종시켜(일본 불교의 교리를 한국에 심어),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 일련종이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정부는 봉원사의 승려인 이동인의 건의로 이미 종교 자유의 일환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를 논의중이었다. 그런데 공로는 다 사노에게 넘어갔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 셈. 그러게 진작에 논의를 끝냈어야지? 그런데 애초에 이 이동인이라는 승려부터가 일본식 불교승려[35]로, 개화파 중에서 골수 친일파였다. 또한 최초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로 일본 이름은 아사노 도진(淺野 東仁).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밑밥깔기에 가까웠다고 하겠다.

이후 1898년 고종황제원구단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겁도 없이 주위를 둘러 친 장막의 틈새를 열고 들어와 초능력으로 황제의 운명을 점치겠다고 난동을 피운 일이 발생했다. 잡아서 문초를 하니 개운사 출신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 외는 미상. 이런 흠좀무한 사건이 일어나 3년만에 다시 승려 출입이 금지되었고, 실질적으로 완전히 승려 출입이 자유롭게 된 것은 1905년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은 흔히 잘 모르고 넘어가지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부터가 숭유억불을 내세웠으며 불교를 논리적으로 공박한 불씨잡변을 쓰기도 했다. 태종은 특히 불교를 혐오하여 불교 종단의 해체, 파괴를 시도했다. 많은 절이 폐쇄되었으며, 심지어 유학 양반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산 속에 숨어있는 절까지 올라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불태웠다(...) 태조 이성계가 기거했던 회암사조차 고의적인 테러로 불태워졌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 시대에 불교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왕실 뿐이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손이 귀해지자 왕실은 불교에 기대었고, 신하들도 강력히 반대하지 못했다. 영조의 경우 아들이 안 태어나자 신하들이 불사를 권하기도 했다. 왕실의 여성이나 몇몇 임금의 개인적인 신앙심이 불교를 유지해주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불교를 믿었던 태조세조, 많은 왕후들의 비호 아래 암암리에 왕족들은 불교를 믿어왔으나, 문정왕후를 마지막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왕릉 근처에서 왕실의 제사를 지내고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원찰이 딸려 있었다. 선비들이 평범한 절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데 들어가서 행패를 부렸다가는 "니놈이 감히 왕실을 능멸하느냐?!"고 불호령을 당하고 곤장을 얻어맞았다.(…) 비슷한 것으로 조포사라는 절도 있었는데, 왕릉 근처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며 제사가 있을 때 제수용품으로 쓸 두부를 마련하는 사찰이라 해서 두부 포 자를 써서 조포사라고 불렸다. 이 역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기에 선비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수원시에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고 보관하는 수호사찰이 있었다. 봉화(奉化)의 각화사(覺華寺),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 강화(江華)의 전등사(傳燈寺),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를 말한다. 이 수호사찰의 경우 주지승에게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직책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병부를 갖고 있어 유사시 실록 수호를 위해 지역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실무직이었다. 깽판쳤다간 코로 고춧가루 탄 곡차 한사발

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찰들이 유생들의 탄압을 피하는 일종의 편법으로 태조 이성계를 절에 모시고 공양을 올리기도 했다. 유생들이 멋도 모르고 절에서 행패를 부렸다가 승려들이 "아이고오 태조 즈어어어언하아아아아~~~~~"하면서 어진이나 위패 앞에서 향피우고 통곡하면 유생들은 그저 데꿀멍+상소가 올라가면 왕실 능멸로 처벌크리(...) 이게 생각보다 잘 먹혀서 나중에는 태조 이성계를 사찰이 모시는 사찰이 지나치게 늘어나 나라에서 제제를 가하기도 했지만,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모신다는 점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도 다 쓸어버리자니 께름직하기도 하고 알아서 건국자를 모시고 받들어 주니 나름 기특하기도 한지라 작은 절 몇군데 시범 케이스로 조금 단속하는 선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았다.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유학자 입장에서 불교에 비판적이었으나 한글로 불경을 많이 지었다.(심지어 2번째 한글 작품은 불은(佛恩)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또 세종대왕 당시에는 효령대군이 불교를 많이 후원하였다.

세조는 드물게 불심이 깊었던 왕으로 불교를 많이 밀어줬다. 하지만 성종 때 한 번 날아갔다. 연산군은 딱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다 괴롭혔기 때문에(…) 불교도 된서리를 맞았다. 원각사를 헐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예. 문제는 연산군 이후에 유학자들의 입김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게 복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몽둥이로 패서 내쫓고 7~8명의 젊은 비구니를 겁탈한 이야기도 있다. 겁탈의 배경이 되는 정업원(淨業院)이란 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남편을 일찍 잃은 왕족 부인들이 비구니가 되어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연산군의 일은 한마디로 자기 친인척을 겁탈했다는 이야기.

명종수렴첨정을 했던 문정왕후보우무학대사 이래로 비어 있었던 국사 자리에 임명하는 등 강력한 불교 진흥책을 펼쳤다. 그러나 문정왕후 개인에게 의지한 불교 진흥은 한계가 있어서 문정왕후 사후에는 오히려 강한 역풍을 맞았다.

정조 같은 경우 초기에는 억불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강하게 장기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수원에 조포사인 용주사를 지을 때는 오히려 앞장서서 후원하였고, 부모은중경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사찰이 어느 정도 늘어갔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완전히 쫓겨났지만 민간 신앙적으로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셈이다.

그리고 부녀자들 측에서도 불교에 대한 신앙은 깊었으며, 이는 심지어 사대부 부녀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던 규방소설 같은 작품들을 보면 사대부 남성들은 기를 쓰고 불교를 반대하지만, 여성들은 그 신앙을 존중하거나 직접 믿는 한편 절에 불을 지르려 들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대부들을 그리는 등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정치제도상으론 열심히 억제하려 했어도 실제로는 여전히 신자가 많았던 셈.

하지만 이전 시대와 달리 유력 귀족이나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조선후기의 큰 절들은 절의 유지와 확장 등을 위한 돈을 주로 신자들의 시주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찰에서 기복신앙 행위의 증가와 무속과의 결합이 커지는 것도 이 시기의 영향이다.

5.2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숭유억불의 조선이 사라지자 친일과 결합하여 주변을 착취하는 경우도 적잖이 나타났다. 사실 철저한 유교 국가를 지향한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사회적 취급은 국가의 노비 취급, 도성 출입금지 등 말 그대로 개차반이라 오히려 일제강점기의 대접이 훨씬 나았다. 물론 일제에 적극 협력한 승려들에 한해서만.

하지만 인과관계를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인들을 이간질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던 일제의 계책이긴 해도 어쨌든 일제는 불교계를 대접해 줬으며, 그 결과 수많은 승려들이 친일로 변절하고 결국 당시의 한국불교는 거의 일본화되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시절엔 친일 승려들이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비행기 등 군수품을 만들기 위한 위문 헌납금 모집 운동을 벌여나갔다.

친일 승려의 악행은 임혜봉 스님의 저서인「친일불교론」과 「친일 승려 108인」에서 낱낱히 고발되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때문에 해당 책에 실렸던 최범술 스님의 유족들에게 너 고소를 당했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효당 최범술 스님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정치가였는데, 불령선인회에서 덴노 암살을 모의했으며, 불교 계열 항일비밀단체 '만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가로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다이쇼 대학에서 불교를 배워온 대처승이란 이유로 같은 불교 내에서 평가절하되었는데,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서 활동해서 친일 논란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뿐만 아니라 대놓고「최범술 : 불령선인회와 만당에서 활동 그리고 친일」이란 저서에서 최범술 스님의 친일행각을 고발하였다. [「친일 승려 108인」에 대한 소개.]

물론 그 와중에 불심 깊은 촌부들을 꼬셔서 전 재산과 같은 논, 밭 등을 헌납하게 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36] 그 동안 조선이라는 왕조 하에서 수백 년을 억눌려 있었으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하며 사리사욕을 탐한 점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의 예와 같이 일본과 일본의 불교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과 한국의 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훌륭한 승려들도 있었다. 당시 외국 교민들의 불교계는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5.3 현대에 들어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한국 불교는 사찰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사찰령은 이른바 승려들의 활동부터 주지 임명까지 전부 총독이 관리하고 "기혼자"에게 절의 주지 역할을 맡기도록 하는 것. 이때 임명된 주지들은 전부 일본인 아니면 결혼한 대처승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민중의 꾸준한 지원으로 각 사찰이 소유한 토지 및 재산은 적지 않았는데, 여기에 주목한 자유당측에 의해 사단(불교 정화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불교 정화운동의 명분은 일본의 잔재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참 목적은 기존 사찰 보유 자산을 활용한 "정치자금 확보" 및 휘하 단체 지원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의식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오늘날 대도심의 시내에 있는 보이스카웃, YMCA 건물 중 연혁이 오래된 곳은 본래 사찰 소유 건물 혹은 토지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본래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타협을 보아 "송광사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우선 돌려받고 나머지는 추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으로 전환한다"는 요지의 결론까지 내려진 상태였던 것.

실제로, 2004년 세수 91세(법랍 77세)로 입적한 [서옹 스님]의 生前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후 백양사에는 17세인 서옹스님(당시는 동자승)만 비구승이고 다른 분들은 모두 대처승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 때는 서옹 스님만 법당 안에 들어가고 다른 분들은 법석을 깔고 밖에서 예불을 드렸으며, 더이상 대처승의 상좌(제자, 후계자 개념)를 들이지 않는 등 철저하게 타협안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인규 내무부 장관 측이 불교성지순례 등 타협에 참가한 조계종 지도층의 공백기를 이용해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들을 부추겼고, 일부 사찰에는 지원을 명목으로 "머리 깎은 주먹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보냄으로써 비구승VS대처승 간에 큰 충돌이 나는 사단이 난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정부 측의 여론몰이까지 겹쳐 결국 대처승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으며 오늘날 좌선수행 및 출가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불교의 기본 형태가 다시 조성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조계사 문서를 참조할 것. 태고종 자체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에 전해져 계속 법맥이 이어졌지만 한국불교태고종이란 종단은 불교정화운동에 밀려나 잔존한 대처승들이 1970년대에 고려시대 명승 보우대사를 종조로, 박대륜을 종정으로 삼아 창시되었다. 태고종은 현재도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삼고 있어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대중불교주의는 만해 한용운이 주장한 것이니 태고종 자체를 친일의 잔재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현대의 한국 태고종은 더이상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출가하기 전 아내와 자식을 둔 가장이 출가해서 스님이 될 경우 가족과 함께 살며 부양할 것을 허가한다지 이미 스님이 된 사람이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조계종에서 태고종을 언급할 때는 아직도 태고종의 이런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편견을 듣게 된다면 적당히 가려서 듣는것이 좋다. 단, 이 때문에 결혼을 위해 잠시 승적을 파계한 뒤, 다시 승적을 회복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이것만은 태고종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1980년에는 10.27 법난이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라의 지원금을 제일 많이 받는 종교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요 문화재 중 불교계에 예속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유지/보수를 끝마치고 나면 오히려 불교계는 가난한 편이다. 전통사찰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조계종 1년 예산이 200억 정도다. 국가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작은 절 같은 경우는 시주도 뜸해 그야말로 황폐화되는 경우도 있는 듯. 사실 절마다 형편이 큰 절은 웬만한 교회보다 잘 살고 작은 절은 못 사는 부익부 빈익빈. 오히려 큰 사찰은 불교 TV에 CF를 찍기도 한다.

불교가 한국의 주요 산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돈 많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보이는데 도심지와 산지의 땅값 차이만 고려해봐도 이게 얼마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알 수 있다 그래도 땅을 대상으로 정부와 지자체와 법적 분쟁을 일으킨 적은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지율 스님 도롱뇽 사건이나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 혹자는 삶의 터전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율스님 같은 경우엔 환경단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님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은 한 예수쟁이가 성전암 주지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불을 질러 암자 건물이 전소된 탓에 진주시에서 복구하는 상황에서 임야지를 불법적으로 썼다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딱히 삶의 터전이라 보긴 어렵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난한 종교이기 때문에[37] 비교적 높은 액수의 기도비 걷기, 대규모 재 봉행, 기왓장 불사, 사찰 근처의 전통찻집이나 불교용품점, 식당 운영 등의 행동을 보인다. 도심과 좀 떨어져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가격이 꽤나 높아서 폭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신도들의 신앙심에 맡기는 자율행위인데다 구속력도 없다. 다만 오히려 그런 구속력이 없어도 폭리가 잘 이루어지는 환경이다.

절 인심이 좋지 않으면 다른 절로 옮기기 쉽다는 불교도의 주장이 있었고 이는 신앙적으로 본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직자의 신성과 같은 성도와의 관계도 중요시 여기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특히 기독교) 불교는 소승이든 대승이든 신앙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이기 때문. 또한 도시 곳곳에 있는 교회와는 달리 절은 머나먼 산간벽지에 많은 편이라 절쪽에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으나,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석가탄신일이나 중요한 불사가 있는 날엔 차를 돌려서 다른 절로 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49일, 100일, 1,000일 등등의 신앙심이나 기복을 위한 장기 기도에 들었을 땐 절이 신도를 붙잡아두는 역할도 있다[38]. 때문에 이런 경우엔 이사 등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쉽게 다른 절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평시라면 몰라도 어느 절에 기도비 내고 100일 기도를 하다 중도에 다른 절로 옮겨서 승계하는게 절 입장에서 봐줄만한 일이 아니고, 신도 입장에서도 힘들기 때문.

불교 내부적으로도 신도들의 신앙심이 타 종교에 비해 낮다는 점을 [지적]하며, [올곧은 재가신도를 양성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조계종에서는 주도적으로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한 학습서/수행서적들을 발간하고 있지만, 덧글에 지적하듯 스님들부터 문제라며 신도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링크한 불교 언론사가 친 종단적 언론임에도 이 정도.

근래에는 포교당(혹은 도심 선원)이라고 해서 산중이 아니라 도심이나 마을에 위치한 암자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큰 수준의 절도 있다. 평은 극과 극. 같은 조계종 소속인데도 불교 욕먹인다는 소리를 듣는 [마애사 포교당]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한마음선원]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 곳이 있다. 한마음선원의 경우 아예 자체적 네크워크가 있어 각 지역/외국의 사원들과 본원이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포교당과는 달리 개신교보다는 천주교나 주류 종단의 일반적인 사찰 관리 구조와 비슷한 모습.

반면 무속인이 사찰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속인은 애초에 불교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다. 무속인이 불교 공부를 해서 정식 법사 자격증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다만 일반인 법사가 운영하는 포교당이나 선원은 의외로 흔하다. 태고종이나 여타 군소종단의 경우에는 아예 도심이나 마을 안에 정식으로 절을 짓는 경우가 많아서 신도들이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고 간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해놓았다. 물론 조계종의 경우에도 도심에 사찰이나 불교문화원을 지어 포교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교도 비율이 높은 지방은 영남(경상도)지방으로, 말 그대로 타 지역을 압도할 정도로 불교 신앙이 깊은 곳이다. 아마 한국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 국가였던 신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영남의 위력[#]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천주교+개신교)도 비율이 가장 낮은 곳도 영남이다. 반대로 호남(전라도)지방은 불교도 비율이 가장 낮고 기독교도 비율은 가장 높다. 사실 수도권충청도의 기독교 신자 비율과 큰 차이는 없긴 하다. 그리고 불교-기독교 신자 비율의 차이가 호남보다는 영남이 압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사실 개신교 비중이 가장 큰 도인 전라북도에서도 농촌 및 산간 지역은 불교세가 꽤 강한 것에 비해, 영남 지방은 대도시 지역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2012년 5월 들어와서 석가탄신일 얼마 안 남겨두고 몇몇 사찰에서 승려들의 도박 및 온갖 추태들이 드러나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가운데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불교도였으며{2012년에 기독교(개신교)로 개종},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에서 백담사에 은거하면서 감금당하면서 불교로 개종한 사례다.[39]

흔히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도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박정희 본인종교가 없었다. (대신 육영수 여사이후락이 불교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가톨릭계 미션스쿨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를 졸업했고 본인도 가톨릭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 싶지만, 두루 여러 종교들을 믿었던 편이라 '기불천교(기독교·불교·천주교)'라는 이야기도 나왔다.[40] 때문에 딱히 불교도라 할 수도 없다. 사실 전두환도 비록 퇴임 후 백담사에서 불교로 개종했다지만 그다지 독실한 불교도라 보기는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사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의 절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는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다지 신앙심을 갖고 활동했던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親 불교적인 활동을 몇번 벌인 적은 있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3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현재 불교를 포함한 종교계 90%이상이 변질되었다고 비판여론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인들과 종교신도들은 매우 불쾌해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한국 주요 불교 종단은 다음과 같다.

  • 대한불교 조계종 : 사찰 735개 (81%)
  • 대한불교천태종 : 사찰 144개 (16%)
  • 한국불교태고종 : 사찰 102개 (11%)
  • 대한불교법화종 : 사찰 22개 (2%)
  • 선학원 : 16개 (2%)
  • 대한불교원효종 : 5개 (1%)
  • 기타 : 27개 (3%)

5.4 탁발승 문제

탁발이란 승려가 먹고 입는 것을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받은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하며, 초기불교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일본과 남방불교계에서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탁발을 중단한 이후로, 대부분의 종단에서 탁발을 중단한 상태다. 물론 종단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행사를 겸해 탁발을 한 적]은 있지만, 원칙적으로 승려 개개인의 탁발은 지금도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승려를 사칭하는 가짜들이 무리한 탁발을 요구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불교의 위상을 저하시켰기 때문. 그러나 이 사실을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지금도 이나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곧잘 불전함이나 바릿대를 놓고 목탁을 두들기거나, 가게에 불쑥 들어와 목탁을 두들기며 시주를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승려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2번째의 경우 손님이 있으면 일부러 더욱 목청높여 독경을 하며 돈을 줄 때까지 안 나가거나, 대놓고 들어오자마자 돈을 요구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다. 독경하는 것도 잘 들어보면 불교상에서 파는 불자보감이나 얇은 독경용 불경에 실린 일반 불자들도 자주 읽는 경전들로, 가장 많이 읽는 것은 천수경이다.

이 경우 위 사실을 말해주면 바로 나가니 이런 가짜 중들에게 시달리는 위키러가 있다면 참고할 것. 하지만 나가면서 투덜거리거나 욕하는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이런 가짜 중들의 불법탁발(?)은 조선 시대부터 이미 사회문제였으며, 심지어 1900년대에는 아예 [탁발을 하려면 공인증서를 갖추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타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점을 기억해두어서 유사시 가짜에게 속지 말도록 하자.

물론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탁발을 부탁하는 스님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조계종에서 금지한 이래 현재는 과거 악명을 떨친 두타스님처럼 가짜 중들이 탁발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고, 특히 남의 가게에 들어와 민폐를 끼친다면 그건 누가 봐도 승려라 볼 수 없다. 애초에 승려 시험은 아무나 쉽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자체 조리시설을 갖추고, 스님과 신도에게 공급되는 식사를 자체 조리하여 공양한다. 신도들에게 보시받은 돈을 가지고 식재료를 자체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신도들이 보시한 쌀과 식재료 등을 가지고 조리하는 경우도 있다. 장이나 김치의 경우 대부분 자체적으로 담그거나 관련 업체에서 구입해 충당하며, 일부 대형사찰이나 단체에서는 팔기도 한다.

5.5 훈민정음 불교 관여설

일단 이름부터가 흠좀무한 이 주장은 현재 한국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식 인가를 받은 서적에도 실려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펴낸 '한국불교사-조계종사를 중심으로'라는 책(2011년 2월 28일 1판 1쇄본 기준)에 실려있다. 대략 구성을 보면 이렇다.

  • 통념과는 달리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 세조 시절 불서 변역/간행에 깊이 관여하여 원각경, 선종영가집, 수심결을 직접 번역한 사람은 신미대사로, 이는 훈민정음을 잘 몰랐다면 불가능하다[41].
  • 더욱이 신미대사는 세종 당시 왕의 침전에서 법문을 하기도 하였다.
  • 세종은 한글 창제 후에도 활용/배포에 승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것은 다양한 불경 간행으로 나타났다.
  • 신미대사는 어학에 능해, 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에 능했다[42].
  • 그런데 공적기록은 없고 어용승이라는 비난 기록만 있는 것은 왜냐고? 그건 세종의 밀약으로 자신의 행적을 다 감춘 거라능! 물론 이를 증명할 근거는 없다. 정황상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사관들이 승려인 신미를 곱게 보지 않아서 그랬으리라는 추측만 있을 뿐. 한글 창제의 과정이나 그 주역이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은 지금, 신미 대사의 역할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 (결론이자 이 책 모든 내용의 핵심) 그런고로 훈민정음 창제에는 한국 불교의 지원이 크며,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은 정통 한국 민족종단이다! 기승전조계종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를 주장하는 법회. 2014년 10월 4일 정각원 토요법회. 2014년 10월 4일 조계종 정각원 토요법회다.

[자세한 내용은 이쪽에서 확인], 물론 신미대사가 불경 언해에 깊숙히 관련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왕실에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인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한글본 불경의 간행기에서 빠짐없이 신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사실이다. 다만 훈민정음이 배우기 쉽다고 하더라도 불경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 용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은 신미가 집현전 학자만큼이나 훈민정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예 불교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자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건 분명히 엄청난 논리 비약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에서도 환빠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한국에 고유문자 자체는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조선시대 실학자인 신경준도 저서인 '훈민정음운해'에서 한글 창제 이전에도 민간에서 쓰던 속용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훈민정음 창제 시 이를 참고했다거나 가림토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속용문자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쓰기 불편하다고 기록했다. 이 외에 1910년대까지 5진법에 기초한 결승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결승문자는 소수의 관념 이상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두의 경우 사실상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문자 기록법이긴 하지만.

불교 서적에 쓰였던 각필문자가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세종이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각필문자의 형태가 자형모양에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창제원리가 이미 상세히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문자가 기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각필기원설], [각필기원 반박])

5.6 신분제도 속의 불교

고려왕조 때까지는 공식 국교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고려왕이나 왕족 및 호족들 못지않은 우대를 받았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사(國師) 및 국승(國僧)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후에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된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로 알려진 무학대사도 고려왕조부터 승려로 지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 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져서 유림을 위시한 양반들에게 기득권이 넘어가고, 불교는 유교에 밀려 국교지위까지 상실하였고 승려들은 천민층으로 분류되어서 궁궐, 양반댁, 관료댁 등은 들릴 수 없고 포교활동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양반 및 유림들은 대부분 유교사상에 숭상한 영향 때문에 불교와 승려를 매우 적대시하거나 천시하는 편이어서 이들에게 포교전래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 및 유림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일반평민과 천민층으로부터는 신앙대상이 되어서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다. 국교지위를 상실하고 승려들의 신분도 천민으로 내려갔지만 평민과 천민층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때 신분제도의 폐지화와 함께 유교에 자리를 내주었던 국교지위를 되찾았으며 오늘날에는 가톨릭, 개신교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꼽힌다.

6 분파


6.1 티베트 불교

티베트로 전파된 불교. 자세한 점은 티베트 불교 문서 참고.

티베트의 불교는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밀교를 시대별로 차례차례 받아들인 북전 불교와는 달리 인도를 통해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으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밀교가 강하긴 하지만…

티베트뿐 아니라 몽골청나라 등에도 전파되었다.

정작 본산지인 티베트에서는 크게 억압당하고 있지만 서양으로 전파되어 서양에서 가장 대중화된 불교 종파가 되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불교도의 수가 서구 국가 중에서는 많이 늘었다지만 그렇다고 이전 서술처럼 개신교 신자의 수를 넘어 섰다는 식의 말은 과장이다. 현재 프랑스 인구 중 개신교의 인구 비율은 8% 정도고 불교도는 0.625%다. 이민자 중에서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이민자 중 약 3%정도. [[1]]

서양의 유명인들이 믿는 불교 역시 대부분 티베트 불교다.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7 관련 용어

7.1 부처, 승려 등을 뜻하는 용어

7.2 교리 관련

8 관련 인물

8.1 석가모니와 불제자

  • 석가모니
  • 데바닷타
  • 라훌라 - 십대제자에도 속하지만, 석가모니의 친아들이란 부분도 있으므로 따로 분류.
  • 십대제자
  • 앙굴리말라 - 1000명을 채우게 되면 득도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999명을 살해하고 손가락을 전리품으로 삼았다고 한다. 막판에 석가모니를 만나 아라한이 되었다.
  • 출라판타카 - 간단한 계율도 외우지 못하던 그에게 석가모니가 성전을 빗질하라고 한다. 그리고 '쓸고 닦으라'고 외우면서 쓸라고 한다. 그러한 일종의 수행법으로 아라한이 되었다.

8.2 고승 및 불교 사상가


9 부처들과 보살들, 그 외의 신들

9.1 불·여래

  • 대일여래= 비로자나불, 치성광여래
  • 아미타불 - 보신불(報身佛)
  • 미륵 -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해당 문서 참조.
  • 주동방가모니불 主東方迦牟尼佛, 임진왜란일본에 잡혀갔던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 나오는 부처. 저자 강항이 일본에 잡혀 있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너무나 화가 나서 하루는 일본을 저주하는 글을 써서 한 성에 붙였는데, 그 내용을 대략 보자면 "너희들이 죄없는 나라(조선)을 그렇게 괴롭히고도 무사할 거 같으냐? 석가도 내가 내려보냈다. 살생하지 말고 생명을 소중히 여겨 살리라는 뜻을 널리 펴기 위해 내가 석가를 보냈는데 쌓으라는 덕은 안 쌓고 그렇게 만행이나 저지르다니! 바다 안팎을 통틀어 내 소관 아닌 데가 없는데 나 주동방가모니불이 너희에게 경고하나니 당장 그만두어라. 난 두번 말 안한다." 참고로 간양록에 따르면 이 글을 써 붙인 때가 5월 하순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월 초부터 병을 앓아 골골거리다 가을바람 불자 죽었다고 좋아하는 기록이 나온다. 흠좀무.
  • 약사여래


9.2 보살

  • 관세음보살
  • 지장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미륵보살
  • 담무갈보살(법기보살) - 당나라 때 중국에서 편찬된 화엄경에 등장하는 보살로, 금강산에 머물며 설법한다고 한다. 실제로 금강산에는 이 보살이 현신했다거나, 만났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9.3 명왕

9.4 그 외

10 불교와 국가

본토인 인도에서는 6세기경까지 전성기를 이루다가 이후 힌두교에 점점 밀려 교세가 약해지더니 14세기 이후로는 인도를 강타한 이슬람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 공화국에서는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이때 수많은 인도 북동부의 불교 사원과 유적이 파괴됨으로서 거의 소생불가의 치명타를 받고 말았다. 일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하층 계급,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교 신도가 느는 현상은 있다. 가장 유명한 경우가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불교 개종. 마하라슈트라주에는 불교 정당이 있을 정도.

그 외에도 근래에 인도에 병합된 시킴은 원래부터 불교 왕국이었고 아루나찰프라데시미얀마, 티베트와 접경 지역인 인도 동북부 지역에도 토착 불교 신자가 꽤 있다.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포교도 인도 불교 신자 수 증가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그래봤자 인도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청나라의 사실상 국교이기도 했으며(티베트 불교), 한국의 경우에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에 밀려 차별당하고 박해받기도 했다.[45] 20세기 들어 태국타이완을 제외한 중국동남아 등지 상당수 불교권에(몽골,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 버린 이후로는 공산당에 의해 앞장서서 두들겨맞고 탄압받기도 한 역사가 있다. 그래도 현재는 공산주의 정권 시기의 가혹한 탄압은 거진 사라진 상황.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 세력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고, 미얀마 등지에서는 군부정권이 극단적 불교를 버마족의 민족적, 국가 정체성으로 밀어 21세기 들어 불교 근본주의와 로힝야족 탄압 등을 초래하기도 한 현재진행형 흑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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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대비 불자 수가 많은 나라들은 스리랑카를 제외하면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 있다. 티베트, 몽골, 일본 등도 전통적인 불교 다수 지역이다. 세계구급으로 골고루 퍼진 기독교, 이슬람과는 달리 불교는 중국과 불교권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소규모로 퍼져있으며 서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중동, 중남미 등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교세가 없다시피 하다. 본고장 인도 공화국에서도 교세가 매우 약해서, 1% 수준으로 시크교기독교 인구보다도 적다안습 또 특이하게 이슬람권인 오만, 카타르, 쿠웨이트 등지에도 신자가 있는데, 아시아계 외국인 노동자의 영향이다. 그래도 프랑스에 불자가 있다는 건 대단히 특이하다.

아프리카에도 불교 신자가 별로 없다.([네이버 지식iN 베스트에도 선정된 내용이다]) 아직까지는. 종교 분포에서조차 표시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불자가 제일 많은 곳이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전체 불자 수로 보나 인구대비 불자 수로 보나 [Atlas of religions 아직까지는 세계에서 순위권에 들지 못하고 있다.] 위키백과의 [세계의 불교(영어)] 내용에 따르면 10억여 명의 인구가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불자 수도 10만여 명에 불과하고 인구에서 불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0.012%로 가장 낮다.

20세기 후반 이후로 서양에서 불교의 가치가 크게 평가되어 유럽, 미국 등지에서도 꽤 소수종교로서 교세가 있다. 예전에는 티베트 불교나 일본 불교(젠 부디즘)이 중심이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에서 출가한 서양인 승려들이나 불자 교민들의 불사와 노력을 통해 한국 불교도 점차 퍼져나가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힌두교 신자(10억 정도)가 많은가 불교 신자가 많은가에 대해서는 보통은 힌두교 인구가 2배가량 많다고 보는게 통념이지만 중국의 불자 수 집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이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불자 수는 최소 1억 명에서 최대 12억 명까지 들쑥날쑥하기에 이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공식적인 통계에서의 세계 불자 수는 약 4~5억 명 정도라고 본다.

중국 불교의 경우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현재 중국 내 불교 신자는 최소 2억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의 증가세를 감안하면 최소 몇 년 내에 4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국을 제외한 세계 불교 신자가 3~4억 명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향후 국제 사회에서 중국 불교의 위상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중국 불교는 중국불교협회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잃어버린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동남아는 물론 세계 불교계에서의 주도권 쟁취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불교포럼을 주최하면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중국/문화 참조.

유럽에서는 칼미크 공화국(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이 유일한 불교 국가다. 이유는 칼미크 공화국은 몽골계 민족 칼미크인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약 5만명의 오이라트 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칼미크 족의 기원으로 이들이 불교를 믿고 있어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칼미크 남쪽은 다게스탄 공화국, 체첸 공화국 등 무슬림이 많고, 칼미크 북쪽은 정교회가 지배적이라 이슬람정교회 사이에 불교가 끼어있는 오묘한 상태. 일찍이 러시아옐리자베타 여제 시절에 불교를 러시아 제국의 종교들 중 하나로 인정하였고 칼미크뿐 아니라 동시베리아의 투바부랴티아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남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불자가 많은 섬이 하나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크리스마스 섬. 아마도 이 섬의 인구 중 약 70% 정도가 중국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1 불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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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석가모니에 의해 교의가 전해져 내려왔다. 북인도에서 남방경로를 통해 기원 전후에 인도 ·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북방경로를 통해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한국 불교의 역사 문서 참조),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북방경로를 통해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가 주류가 되었고, 동남아시아로 전파된 불교는 상좌부 불교이다. 단, 베트남동남아시아지만 한자문화권으로 중국을 통해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가 전파되어 주류가 되었다. 흔히 동남아시아상좌부 불교를 소승불교(hinayana buddhism)로 부르기도 하지만 멸칭적인 성격때문에 현재는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상좌부 불교는 원시불교의 승단이 분열되었을 때 있었던 부파 불교 시대의 한 부류였다. 부파불교의 다른 부류로는 대중부가 있다. 대승 불교가 발전되었을 시기에는 대승불경을 읽지 않는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소승불교는 상좌부와 대중부를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이다. 현재의 스리랑카의 테라바다 교단은 상좌부 불교의 일종이다.


12 종단 목록

12.1 유관 단체

13 불교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사상(가)

13.1 종교

사실상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종교들은 작건 크건 다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 손바닥(...)

  • 자이나교
  • 힌두교 - 브라만 교 때는 영향을 주었다가, 불교가 크게 성장하자 역으로 흡수하였다.
  • 마니교
  • 무속신앙/사머니즘 - 불교 자체의 영향력도 있고, 몽골이나 부리야트 지역에는 불교와 사머니즘을 융합시켜 만든 종교도 있다.
  • 도교
  • 동학(천도교)
  • 선종
  • 증산법종교 - 현재의 증산 계열 종교 분화와 관계없이, 강일순은 저서인 현무경에서 불佛을 형체(佛之形體)로 정의한 바 있다. 흔히 상제님이라고도 칭하며 증산법종교는 이를 모태로 미륵의 출세를 서원한다고 한다.
  • 원불교
  • 유교 - 초기 유교는 당연히 영향이 없다. 그러나 중세시기 송나라 때 등장하는 신유학은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특히 심학 계통은 선불교의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를 지배하고 불교를 배척한 신유학(주자학)이 이 불교의 영향력 하에서 생성되었다는건 꽤나 아이러니하다. 싫어하거나 까고 싶은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 슈겐도
  • 신토
  • 선교 - 과거 이름은 선(仙)불교. 선종(禪宗)과 다르다. 원불교와 비슷하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다른 종교이다. 원불교처럼 선불교도 불교의 한 갈래가 아니다. 1994년 11월 교주이자 창시자 만월 도주가 출가하였으며, 이 때를 선불교가 만들어진 날이라 해서 창교일로 잡는다. 한국 토속신앙의 하느님을 신앙하며, 단군을 불광선인이라 부르면서 성인으로 받들어 모신다. [공식 홈페이지] 교리의 유사성 등을 들어 단월드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있지만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어서 확인되지 않았다. [공식 홈피의 주요 연혁]을 따르면, 선교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2016년.

13.2 사상(가)

  • 헤르만 헤세 - 싯다르타란 저서를 쓴 적이 있다.
  • 쇼펜하우어 - 사상이 불교의 일체개고랑 비슷하며, 실제 불교를 공부해본 결과 불교가 기독교를 대신하여 유럽을 지배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다만 염세주의 때문에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다는 평가도 있다. [참고]
  • 스피노자[47]
  • 이색[48]
  • 추사 김정희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죽기 얼마 전 출가했다. 당시 국내 간화선의 대가라 불렸던 백파긍선과 선불교의 정통성을 놓고 논쟁을 벌였을 때 백파긍선이 전전긍긍했을 정도.[49]


14 불교/인물

문서 참조.


15 과학과 불교

불교의 사상들은 추상적인 개념이라 그냥 들으면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그에 반해 과학은 이론과 실험을 기반으로 하므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 서로 병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태동한 이후로는 이전의 방식대로는 광전효과나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 등 일반 상식(고전역학에 기반한 결정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물리 현상들이 발견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고전역학을 다루던 때와 달리 이런 물리 현상들에 대해 속 시원하게 설명할 길이 없었던 탓이다. 이후 여러 과학자들이 이런 물리현상을 갖고 긴 시간 동안 갑론을박을 벌였고, 급기야 불교의 사상들이 과학 실험대로 오르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물질파)을 갖고도 여러 과학자들이 오랜 시간 상호 난타전을 벌인 끝에 겨우 받아들여졌다. 물질의 파동-입자 이중성[50]은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증되었지만[51],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딱히 설명할 길이 없어[52]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이 이에 비판적인 학자들의 사고 실험도 나왔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연출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과학계 인사들이 직접 종교, 철학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 철학계. 특히 불교의 가르침이 양자역학의 실험에 참고가 되었다. 그렇게 되어서 실험에 새로운 시각이 나오게 되었는데, 결국 당초 파동-입자 이중성을 설명하는 코펜하겐 해석은 '관찰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짐으로서 중첩 상태에 있는 입자가 어느 하나의 상태로 고정된다'고 보았는데, 풀러렌의 파동성을 입증하는 실험 이후에는 '어느 한 계가 다른 계와 상호작용을 일으켜 결 어긋남 상태[53]를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다. 쉽게 말해 한 입자가 다른 입자와 충돌하는 순간 서로의 정보를 주고 받게 되므로 관찰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누가 보아야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우주'가 원리적으로 알게 되면 그것이 곧 '관찰'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풀러렌의 파동성을 밝히는 실험에서 실험장치 내부에 공기 분자가 혼입되어 풀러렌 분자와 충돌했을 경우 그 풀러렌 분자는 입자처럼 행동하였다. [참고] [참고]

다만, 이런 일 때문에 달라이라마 등 '불교는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불교도들도 생겨났지만 그냥 자기 종교부심일 뿐 딱히 과학적 근거가 없다. 애초에 불교 교리 자체가 철학적인 체계가 있다고 해도, 종교에 불과하지 자연과학과 거리가 멀다. 위의 실험은 연기설이 힌트가 되었을 뿐이지 양자 역학으로 연기설을 증명했다는 주장은 지적설계와 하등 다를 바 없이 과학을 종교의 틀 안에 억지로 끼워넣는 행위다. 종교의 교리를 과학적 실험에 참고하는 것은 접근 방식은 굉장히 비과학적이라 과학계 내에서 당연히 주먹을 부르는 행위다. 나머지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참고.

한편 이런 접근 방식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54],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계 내에서도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을 위시한 논리 싸움이 일어났다. 제5차 솔베이 회의 당시 일어난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시간이 흐를 수록 격렬해지면서 회의장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아인슈타인 진영이 마지못해(?) 백기를 들고 만다.[55] 다만, 아인슈타인은 닐스 보어와 같이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 접근 방식은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살아 생전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하고, 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링크]

The religion of the future will be a cosmic religion. It should transcend personal God and avoid dogma and theology. Covering both the natural and the spiritual, it should be based on a religious sense arising from the experience of all things natural and spiritual as a meaningful unity. Buddhism answers this description. If there is any religion that could cope with modern scientific needs it would be Buddhism.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이다. 만일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16 사족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시리즈 중 하나인 《문명 4》에선 종교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종교 중 제일 먼저 등장한다. 이는 신비주의 → 명상을 통해 곧바로 창시되기 때문. 《문명 5》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던 나라들은 불교를 만든다. 문제는 시스템상 불교를 만드는 문명이 시암밖에 없다... 따라서 게임을 하다보면 불교는 주로 시암이나 기독교를 창시하지 못한 유럽 문명이 창시하게 된다.

서양에선 동양에 대한 환상편견에 영향을 받아 불교에 왜곡된 긍정적인 관점을 지닌 사례도 있다. 공격적인 독설로 유명한 이탈리아 유명 여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는《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이라는 책에서 불교를 가장 평화로운 종교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가톨릭)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대교 같은 종교는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던 걸 그리도 혐오하는 그녀에게 종교 자체를 들이대며 학살이란 걸 저질러본 적이 없는 불교는 위대하다고 엄청나게 불교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정작 역사 속 ~ 현대 불교도들의 모순과 폭력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는 무식한 발언이다. 실제로 유럽 역사학자들은 이런 팔라치의 편견에 맞서 일본 승병을 반론의 근거로 든 적이 있다. 그야말로 동양에 대한 환상과 편견으로 점철된 시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불교를 공부했다는 기록도 없다(...) 사실 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서양 지성인(?)들의 편견은 니체의 '안티크리스트'같은 서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리차드 도킨스는 비난의 대상인 종교를 칭할 때에 불교는 예외라는 의견을 밝혔다.

불교 광신도 세력도 상당히 있는데, 대표적으로 몽골 역사 속의 운게른 슈테른베르크, 미얀마의 아신 위라투, 스리랑카의 보두발리세나 정당 등이 있다. 근래 불교에서도 근본주의적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한국 불교계가 무아마르 알 카다피에게 인권상(...)을 수여한 적이 있다. [참고] 하지만 카다피의 초기 집권은 나쁘다고만을 볼 수 없다. 남녀평등을 위해 여성에게도 교육을 실시, 대규모의 문맹 추방, 그리고 석유회사 국유화로 남는 이익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러다보니 그의 부정적인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불교계에서도 이를 잘 모르고 수여했던 걸로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영화)의 주제도 불교사상과 관련이 있다.

승려의 육식에 관해서 말이 많으나,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삼정육에 해당한다면 먹어도 상관없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님 문서 참조.


17 관련 문서


18 관련 밈(?)

  1.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남겼던 마지막 유언
  2. 붓다는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샤캬족의 성자'라는 의미인 '샤캬무니(Shakyamuni)'를 한자로 음역한 말이다.
  3. 미국 Pew reserch center 통계.
  4. 당시의 인도의 세태에 대해 일본의 모 작가는 "인도인 자체가, 원래 어딘가 맛간 고행 진짜 좋아하는 초 M민족이야!!"이라고 비판했을 정도.(...) 인도인에게 사과해야 할 정도로 모욕적인 내용이긴 한데, 당시엔 저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종교적인 고행의 전통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었다.
  5. 유대교가 본래 가나안 지방의 토속 신앙으로 시작하여 외부에서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것과 비교하면 꽤 흥미로운 비교가 될 수 있다.
  6. 그러나 불교가 철학적인 토대를 탄탄한 배경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종교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나름의 논리를 갖추었지만 종교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당장 신약의 복음서들만 하더라도(특히 요한 복음서) 그리스 철학적 색채가 강한 편이다. 물론 고대에는 철학과 종교가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았기에 철학과 종교 둘 다에 해당할 수는 있지만, 종교라는 특성이 부정되기는 어렵다.
  7. 초기경전인 아함경 중 증일아함경에도 염불수행에 대해 [나온다].
  8. 여기서 당취는 땡추중, 즉 땡중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일설에 따르면 이 당취는 임진왜란승병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정에서 불교의 대우를 개선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거병케 했고,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개선이 이루어져 많은 당취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승려들을 무시했으며 큰 개선은 없었다. 금강산 당취의 잔재세력인 운부(雲浮)는 조정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장길산과 손을 잡아 1696년(숙종 22)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국초보다 불교에 대한 실질적 상황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지어진 '법주사 팔상전'을 보면 새롭게 힘을 얻게 된 부농층과 상인계층이 공사에 크게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대부들 중에서도 남들 앞에서는 불교 엄청 까대면서도 정작 본인 죽고 난 뒤에는 49재를 반드시 올리도록 지시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데 이건 불교의 상황이 좋아진 게 아니라 그냥 보험취급 아닌가요? 일단 왕실부터가 불교 신도들이 많았으니...
  9. 특히 원나라 몽케 칸 시절에는 아주 크게 대판 싸워 도교의 도사들이 절을 빈번히 약탈하자 몽케 칸이 쿠빌라이에게 두 종교의 분쟁을 풀도록 시켰는데, 1258년 쿠빌라이는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 입배틀을 시켰다. 도사들이 승려들에게 지자 쿠빌라이는 강제로 237개 도장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 경전을 불태웠다
  10. 말그대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치세'의 이념과는 다르다. 군주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에 비해서 위정자들에겐 상대적으로는 널널한 것이었을 듯
  11. 구미래,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민속원, 2009. 참조
  12. 홍윤식, <불교문화와 민속>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참조
  13. 원래는 독성, 용왕, 산신을 같이 모신 삼성각이었으나, 삼성각의 토속신 중 그나마 불교 영향이 강한 독성만 다시 모셨다.
  14. 사천왕사에 토속신인 오방신을 모셨다고 나오고, 통도사에는 불사에 사용하던 오방신 탱화가 지금도 보관중이다.
  15. 최준식, <조선의 도인들> 소나무, 2012. 참조
  16. 불교 역시도 천룡팔부 등 신 개념이 존재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17. 여담으로 여신전생 시리즈에서 LAW광신자의 상징인 메시아교는 그리스도교 계열인데, 그와 대치하는 CHAOS인 가이아교는 상당히 불교색이 짙은 경향이 있는것이 이런 점 때문이다.
  18. 다만 마테오 리치 신부의 불교 비판은 오늘날 가톨릭 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좀 과한 면도 있다. 이를테면 불상을 보고 못생겼다고 깐다던지(…)
  19. 아래에서 설명할 일본도 기독교가 흥하지 못한 국가 중 하나이지만, 센코쿠 시대~에도 막부 초기에는 그래도 꽤 교세가 있었다.
  20. 사대부들은 그 둘이 같다고 생각한 듯한데, 채제공은 천주교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천주교를 불교의 별파로 봤다.
  21. 하긴 땅밟기는 해당 문서 가서 보면 알겠지만 한국 무속신앙과 개신교가 기묘하게 결합된 형태의 짓거리로 명확하게 분류하면 이단이 맞긴 하다. 예리코의 전투 운운하지만 가톨릭이나 정교회는 물론이고 미국 청교도영국 성공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근본 없는 짓거리다. 다만 2000년대만 해도 땅밟기를 하는 부류가 개신교 주류를 차지하고 있어서 불교와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든 적이 있다. 땅밟기의 폐단이 개신교 내부에도 알려지고 이단으로 확정난 건 2008년 이후의 이야기.
  22. 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인들의 횡포 때문에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는 등 가톨릭 신앙에 압박을 가했지만 이것은 치안 유지의 차원이었지, 에도 막부 시절같은 탄압은 없었다. 이때 일본은 불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갈등이 심했고 심지어 영주들 간에도 종교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앙숙 관계인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도, 가토의 영지에서 탄압받던 가톨릭 신자들을 고니시가 두둔한 일로 서로 날을 세운 적이 있다. 물론 이 둘이 싸운 이유가 종교 때문만은 아니지만
  23. 신토 부정은 덴노 부정이고 일본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24. 현재 인도의 불교신자 수는 기독교신자보다도 더 적다.
  25. 이와는 반대로 동남아미얀마 등지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모스크를 불태우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26. 정치적 왜곡 수준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사상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언제나 있어왔으니...
  27. 반대로 서양 전근대의 그리스도교는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가 같은 하느님을 믿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호국적인 면보다는 신앙 그 자체를 지키는데 의의를 두었다.
  28. 쉽게 말해 절 하나에 스님들을 싹 몰아넣었다. 진짜 그런건 아니고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
  29. 김윤후 본인은 자신이 살리타이를 죽인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겸양인지 아닌지는 추가바람.
  30. 중국의 명나라의 몰락과 청나라의 대두,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 파의 종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의 부흥 등
  31. 국가 복구, 외교 정비 등
  32. 나라에서 빠른 공무 전달을 위해 배치한 역을 승려들이 멋대로 이용하거나, 가난한 농민들에게 살인적인 이자의 고리대를 걸거나, 심지어 불교에서 엄금하는 오신채를 재배해 팔기도 했다.
  33. 세조 때는 승과에 합격한 자도 30필이나 되는 포를 바쳐야 했다. 그냥 100~200필보다는 적지만 당시엔 30필도 거액에 해당되었다.
  34. 당시엔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서 부역 중에 죽은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35. 조선식 승려로 귀의를 했지만 1879년부터 일본 진종(眞宗)의 승려로 법계를 받았다.
  36. 사실 이것이 꼭 불교 세력이 강했던 고려나 친일승려가 판치던 일제강점기만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판소리에서도 나올 정도로 조선 시대에조차 치부(治富)하는 엉터리 땡초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김정한사하촌에서 이런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있다.
  37. 기독교의 십일조처럼 교리적으로 헌금 납부가 정해진 것이 없다.
  38. 기독교도 불교의 XXX일 기도를 따라해서 신도들을 붙잡아두기도 한다.
  39. 해외신문에서는 한국의 고대국가에서 왕들을 처벌할 때 쓰던 방법을 현대에 재현했다는 기사를 냈다.
  40. 사실 박근혜의 공식 종교는 무교지만,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각 종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대자행(大慈行), 선덕화(善德華)라는 불교 법명까지 받았다.
  41. 훈민정음을 익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다. 훈민정음은 창제 원리와 목적상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다.
  42. 그런데 한글은 범어/티베트어 모방이 아니라 세종의 순수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43. 남방불교의 기록에 의거함. 북방불교의 기록인 세우의 부집이론은 대중부로 분류하고 있다. ([부집이론 소승20부])
  44.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만든 맹세로 알려져 있다.
  45. 다만 태조 이성계 등 몆몆 역대 군주들은 불교를 믿기도 했다.
  46. 본래 한국에서 종단 순위 중 2위였으나 2015년 12월 15일부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비 미납, 폭력 사태로 인한 총무원장 구속 등으로 회원 자격이 [정지]된 상황이었다가 2016년 7월 12일 자격이 [회복되었다].
  47. 그의 범신론은 불교 및 도교 사상과 유사하다는 설이 있지만, 정작 그가 불교를 공부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48. 불교 신자이긴 하나 그 신앙이 사상에 영향을 준 사실은 없으며, 억불 정책을 쓰라는 상소를 쓴 것으로 보아 불교도이기 이전에 성리학자로 보는게 옳다.
  49. 과거 일각에선 이를 놓고 유학자의 관점에 입각한 불교 비판이라 폄하하기도 했으나, 동국역경원 역경의원을 역임한 박건주 능가선연구소장이 저술한 책 '선종사상 왜곡의 역사와 간화선'에서 전모를 밝히고 있다. 보면 간화선 제일주의와 선종 문헌에만 빠져있던 당시 선승들의 문제를 추사가 청나라 옹정제의 교서까지 인용하며(추사 본인은 옹정제의 교서라는 걸 숨겼다) 비판한 것이다. 참고로 이 논쟁에서 밀린 백파긍선은 논박당하자 아몰랑을 시전한다(...).
  50. 광전효과에 근거하여 드브로이가 주창하였다. 현재는 분자 단위까지 입증되었고, 단백질 단위까지 입증하기 위해 실험중이다.
  51.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관측장비를 켜 놓으면 입자성을, 관측장비를 꺼 놓으면 파동성을 나타낸다. 나아가 전자를 대포알 쏘듯 한발씩 쏘았을 때에도 같은 결과를 나타내었다.
  52. 코펜하겐 해석과 같은 여러 해석들이 나왔지만, 코펜하겐 해석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통설이 아니었다. 코펜하겐 해석은 관찰자 효과라고도 한다.
  53. 파동의 결이 어긋나 버리게 되면 파동끼리 서로 간섭할 수 없게 되므로 이런 파동은 입자나 다름 없다. 그냥 빛과 레이저 광선을 놓고 간섭무늬를 만드는 실험에 비유한다면, 레이저 광선은 간섭무늬가 잘 만들어지지만 그냥 빛으로는 간섭무늬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54.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발표한 '상보성 이론'의 바탕은 주역과 도교의 음양론이다. 닐스 보어는 젊은 시절부터 이런 부분에도 조예가 깊었다.
  55. 아인슈타인 본인도 결국 말년에는 닐스 보어처럼 주역 등의 동양철학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닐스 보어가 발표했던 상보성 이론처럼 구체적인 이론으로 녹여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