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제도

시간을 뜻하는 말에 대해서는 과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한국어: 과거(科擧)
중국어: 科举(kējǔ)
베트남어: Khoa bảng(科榜)
영어: Imperial exa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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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회 과거시험 재현행사

1 개요

옛날의 학자는 벼슬을 구한 것이 아니고 학문이 이루어지면 윗사람이 천거하여 등용되었으며, 대개 벼슬을 한 사람은 남을 위했고 자기를 위하지 아니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가 않고 과거로 사람을 뽑으니,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는 학문이 있고 남보다 썩 뛰어난 행실이 있다 할지라도 과거가 아니면 도를 행할 자리로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그 아들을 가르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는 것이 과거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 선비가 벼슬을 탐내는 풍습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지금 선비된 사람들은 많이들 부모의 희망과 문중의 계책을 위하여 과거 공부에 힘쓰는 일을 벗어날 수 없으나, 또한 마땅히 그 재능을 갈고 닦아서 그 때를 기다리고 성공과 실패를 천명에 맡길 일이지, 벼슬을 탐내어 조급하고 열중하여 이것으로써 그 뜻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이이, <격몽요결>[1]

지금 국가에서는 시속의 글솜씨로 인재를 뽑고 있다. 각종 이권과 녹봉이 이것에 달렸고, 성공과 명예가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 길이 아니면 더불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제가, <과거 제도에 대하여>에서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가지고 있던 한국중국, 베트남 지역의 과거 국가들에서 고위 관직 진출을 위해 치러진 시험. 일본은 일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사실상 고위관료직 나눠먹기로 전락한 구품관인법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한국에는 신라시대에 독서삼품과가 시행됐으며 본격적인 중국식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 들어왔다. 골품제의 벽에 막힌 6두품 이하는 독서삼품과를 통해도 출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빈공과에 응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세한 정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 얻을 수 있다.

2 고려시대 과거

고려의 과거 제도
문과제술과관료
명경과
음서
잡과기술자
승과교종선승관
선종선

중국 후주쌍기를 영입한 후 그의 건의로 들여와서 고려 광종 9년 때 처음 시행되었다. 쌍기 본인은 첫 지공거(시험 감독)를 역임하기도 했는데, 초기에는 중국 귀화인들이 주로 지공거를 맡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가 존재[2]했는데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글짓기, 현대의 논술)[3]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다. 단순히 외우기보다 그걸 이용한 창작을 중요시한 제술과에서 뽑는 인원이 명경과로 뽑는 인원보다 훨씬 많았으며, 명경과보다 제술과를 더 우대했다. 이런 전례는 실제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던 사례다.

쉽게 말해 명경과에서는 '~한 경전에서는 이렇다.'라는 것이 시험 내용이었다면 제술과에서는 '(어떤 정책이나 사상에 대해) 논어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오며 주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내 생각은 이렇고 이런 정책이다.' 라는 것.

물론 양인들도 과거로 등용될 수 있었지만 자급자족하기엔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당장 현대 사회에서도 공무원 시험 치른다고 몇 년간 부모님들이 뒷바라지해주는(특히 돈) 사례가 많은데, 지금이야 떨어지면 다시 보면 된다 치더라도 옛날에는 멀쩡한 청년 한 명이 농사같은 일을 하지 않고 골방에서 책과 씨름하는 기회비용이 매우 컸기에 어지간한 마음과 재력이 없는 이상 거의 불가했다. 따라서 실제로 응시자의 대부분은 중류층의 향리나 귀족들이고, 이들은 대개 진짜 과거라고 볼 수 있는 문과에 응시했다. 따라서 양인들은 대부분 그나마 만만한 기술쪽 잡과를 보고, 가능하면 제술과와 명경과로 몰렸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총 세 가지 단계로 구성된 삼장제를 채택하였다.

  • 향시 - 1차시험. 개경이면 상공, 지방이면 향공, 외국인이 대상이면 빈공[4]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향공의 숫자를 제한하게 하는 시험관이 바로 주요 지역의 지방 수령들인 계수관이었기 때문에 계수관시라고도 부른다.
  • 국자감시 - 2차시험. 상공과 향공 합격자, 3년동안 300일 이상 근무한 현직관리와 12공도생만이 응시가능한 시험이다. 고려시대 학교 국자감을 수료 완료하고 졸업했을 시 일종의 장학생 특전으로 바로 2단계인 국자감시를 볼 수 있게 해줬다. 일명 사마진사과로, 여기에 합격하면 진사라고 불렀다.
  • 예부시 - 3차시험. 일명 동당감시라고 부르며, 여기서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된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자제들이 바로 시험을 보러 오기도 했지만, 덕종 시기에 국자감시가 생기면서 이런 직행코스는 사라지게 된다. 예부시에서는 3장 연권법이라고 해서 경서를 시험보는 초장을 통과해서 중장에, 시와 부를 시험보는 중장을 통과해야 종장의 시험 자격이 주어지고, 마지막으로 일종의 현실문제에 대한 대답인 대책을 시험보는 종장까지 합격하여야 예부시에 합격하게 된다. 이 3장 연권법은 조선시대 대과의 초시와 복시에 그대로 전해진다.
  • 복시 - 특별시험. 다른 국가의 과거제도에 있는 전시에 해당한다. 예부시에 합격한 이들을 대상으로 국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복시는 단순히 급제생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기에 떨어진다고 해서 관직에 못 오르는 건 아니었고, 상설된 것도 아니었다.

국자감시에 사학인 12공도생들의 응시가 가능한 점이나, 후술할 지공거 제도가 유지되는 점,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인 전시가 비상설이었으며 결국 의종 이후에는 거의 시행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그 발전상이 당나라의 제도와 송나라의 제도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고려의 왕권이 후대 조선에 비해 확립되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폐단들에 대해서 공민왕은 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향시-회시-전시의 과거삼층제를 도입하지만, 지공거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결국 실패하였고, 이것을 조선시대의 과거제도가 계승하게 된다.

예부시의 시험 감독은 지공거라고 했는데 이게 단순한 시험 감독이 아니라 채점도 했고, 심지어 수험생이 맘에 들면 붙이고 맘에 안 들면 떨어뜨리는 일도 잦았으며, 나중에 급제하거나 높은 관직에 오를 때도 지공거의 힘이 필요했다. 사료에 의하면 많은 문생들은 지공거를 좌주라고 불렀고 등용문에 오르려면 이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필수였다고 한다. 이 시스템 역시 당나라 때부터 있던 막장 제도이며, 아직 미진했던 고려시대 과거제도의 태생적 한계였다.

고려도 당연히 지공거가 사학의 폐단 중 하나로 떠오르며 과거제가 황폐해졌다. 즉, 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사형제 관계가 지공거와 수험자가 될 경우 꽂아주는 식의 비리는 이때도 이미 문제점이었다. 게다가 새로 뽑은 사람이 이후 지공거가 되고, 먼저 지공거였던 자는 낙향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제자들이 새로운 지공거에게 시험을 보는 등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이클이 완성되어버려 폐단이 끊이질 않는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문벌귀족까지 가세했었고, 이 지공거의 힘을 줄이기 위해서 시행된 것이 앞서 언급한 전시다.

고려 시대에 가장 유명한 지공거라면 그 유명한 최충이 있다. 이 사람은 정년퇴직하자 곧바로 사학사교육을 일으켰고, 그 뒤를 이어서 다른 지공거들이 사학을 덩달아 열어 사학 12도를 이루는 바람에 관학이 망하기 직전까지 가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예종은 일종의 전문학교인 국학 7재[5]장학금인 양현고를 마련하여 학생들을 끌어모았고, 인종은 지방에 향학을 보급했다.

이 과정을 통해 관학과 사학은 비록 고려의 유학을 발달시키긴 했지만, 과거 합격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시대엔 관직의 수가 적었기에 과거에 올라도 관직을 맡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음서로 올라간 사람들은 조금만 구르다가 곧바로 승진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는 무과가 없었다는 오해가 있지만, 있긴 있었다. 1109년(예종 4)부터 1133년(인종 11)까지 딱 24년 동안 실시되었다. 예종때 무과를 강화하기 위한 국왕의 노력으로 관학을 7재로 정비하며 무학재(군사학과)를 설치하고 무과도 시행했던 것. 그러나 곧 폐지됐다. 심지어 이후 고려중기 무신정권 시대에도 잠깐 존재했다가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곧 폐지됐다. 이렇게 흘러가다가 공양왕 때에 제도화되어서 부활했지만, 이때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 상황이라서 무의미했다.

또한 광종 때 승과제도가 창설되었다.

3 조선시대 과거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의 문제점들을 대폭 개선, 지역균형과 능력주의가 매우 절묘하게 섞인 합리적인 제도로 발전했으며 소과에서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대과에서 점수로 줄을 세워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

난이도와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수만 명의 응시자 중에서 소과 복시(최종)에서 200명을 제외하고는 쳐내며 그 200명 중 단 33명만을 대과 복시에서 뽑았다. 명에서는 수십만명 중에서 400명이였으니 조선이 경쟁률에서 낫긴 했지만...

또한 시험 단계도 어마어마하게 빡빡해서 진사시/생원시, 즉 소과를 통과해야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당장 생원/진사시를 통과해 생원이나 진사 타이틀을 따면 그 아래로 4대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생원/진사시의 난이도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렇게 소과를 통과한 사람들이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하루 출석 1점씩, 연 300점 이상을 채워야 대과 응시를 볼 수 있으며 시험도 엄청 많았는데 10일마다 한번씩 보며 한달에 한번 또 보고, 한 단원이 끝날때 또 본다. 월 평균 10회의 모의고사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되며 일정 횟수 이상 최하점을 받으면 낙제.

출석체크 자체는 별다른 게 아니다. 성균관 내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면 그걸 체크해서 그날은 출석한 것으로 친다. 따라서 어디 놀러 안 가고, 밥때 되어 밥먹으면 출석 끝. 물론 나라에서 밥 주는 것이니 맛이 없어 잘 안 먹었다고.

이걸 이용해서 조선시대 성균관 학생들의 동맹휴학인 권당이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당장 권당에 참여한 날짜들만큼 출석일수가 부족해지고 과거 시험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때 단순한 학생들의 휴학이 아니라 국가의 인재들이 단체로 스스로 자살하겠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과에 응시한다고 해도 위에서 언급했듯 33명 커트라인이 있다. 덤으로 한번 시험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대과 초시에서 240명, 대과 복시에서 33명을 끊는다. 마지막으로 이 33인의 순위를 가리는 시험이 하나 더 있는데 이를 전시라 한다. 전시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이다. 장원 급제자는 종 6품, 나머지 갑과에 해당하는 2명은 정 7품, 을과 7명은 정 8품, 병과 23명은 정 9품부터 시작하게 되며 장원 급제자와 병과 합격자의 차이는 겨우 3품이 아니다. 정상 루트로 이 격차를 따라잡으려면 최소한 몇 년, 심하면 십년 이상이 그냥 날아간다. 설상가상으로 조선시대는 품계에 정(正)과 종(從)의 차이를 두었으므로 종9품 → 정9품 → 종8품 → 정8품 → ... 종1품 → 정1품 같은 식으로 진급해 나갔기에 사실상 6계단 차이가 나는 셈이니, 장원과 병과의 차이는 지금의 5급 고시 합격자과 7급 공무원 시험 합격자의 10년 차이와 비슷할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에 여기서 미끄러지면 과거를 다시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난이도, 과정, 경쟁률 어느 면에서도 만만한 게 없었으니 수십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인천지역에서의 연구 결과 확인된 소과 합격자 288명 중 단 18명만 대과의 관문을 뚫었고 최고령 합격자 기록은 85세라고 한다. 이쯤 되면 벼슬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공부하는 수준이다.

당장 기본적으로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4대 내에 조그마한 벼슬이라도 해야했는데 그게 아니면 양반 신분이 박탈된다. 하지만 조선 역사상 최악의 시대였던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 시기에도 과거가 양반들만의 잔치판은 아니었다. 서울대의 연구에 따르면 순조 시기의 과거합격자 중에 평민은 54%, 헌종조는 50.9% , 철종조에는 48.1%에 달했다. 고종 시기에는 60%가 평민이었다. 오히려 평민 비율이 제일 낮았던 시기는 연산군과 숙종 시절이지만 그때도 30% 정도는 평민이었다.

그러나 그 평민 중에는 상술된 4대가 과거에 불합격하여 양반집안이지만 신분이 평민이 된 경우도 포함하기 때문에 그걸 제외하여야 의미가 있는데 쉽지 않다. 실제로 조선시대 야사에서 4대 불합격으로 양반자격을 잃은 경우 부모가 자식이 제발 과거에 합격하길 바라며 압력을 주며 힘들게 성장시킨 경우가 굉장히 많다. 조선은 반상제가 아닌 양천제고 4대가 과거에 합격을 못하면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냥 땅 좀 있는 평민이나 다를바 없다. 양반이라고 세금이 없는것도 아니고 공납이 면제됐을 뿐이다. 당연히 4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공납을 낸다. 현재 평민인데도 불구하고 조상중에 양반이 있었다고 반쯤 양반으로 치고 계산에서 제외한다는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보면 시험에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 같아도 보통은 30대 중반 정도면 합격한다. 또 젊은 나이에 합격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최연소 장원급제 기록은 17세이며, 최연소 합격자 기록은 고종 때 13세로 되어 있다. 고종 때 지나치게 많이 뽑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최연소 합격자 기록은 15세다.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는 만 18세로 되어 있다. 이 당시 고등고시 사법과는 한 해에 40명 뽑던 시절이다.

아주 가끔은 왕의 권한으로 특별히 합격시켜주는 일도 있었으며 이런 경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를 직부전시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잡다한 절차를 다 건너 뛰고 한 방에 전시를 보는 것이어서 시험을 한 번도 안 치고 관직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직부전시는 사실상 초시 전체 장원이나 성균관에서 특별한 시험을 칠 때 1등에게 내리는 일종의 비정기 특권으로 쓰였고 이것도 세도정치로 가면 악용된다. 흥인군의 아들도 13세의 나이로 직부전시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되어 흥인군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경우는 흥선대원군이 종친들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서 종친들만 대상으로 뽑은 것인데, 흥인군과 사이가 나빴던 흥선대원군은 흥인군의 아들을 제외해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종친들은 이후 흥선대원군의 파벌이 되었고, 여기서 제외된 흥인군 계열만 고종 파벌에 들어간다.

이렇게 과거에 합격하는 일은 빡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과거에 합격하는 상민들 비율이 높았다.#

4 조선의 과거시험 종류

4.1 문과

문과는 유교적 지식을 중심으로 고급 인재를 뽑기 위한 시험이었다. 그래서 그냥 과거라고 하면 문과를 의미하며, 무과등 다른 과거는 무과같이 따로 명칭을 부른다.

4.2 소과

조선의 과거 제도
소과초시복시
소과 합격자 200명은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에서 학점 300점 이상자 대과 지원 가능.
대과초시복시전시[6]
대과 복시 합격자 33명
정계 진출

소과에서 진사를 뽑는 시험과 생원을 뽑는 시험이 따로 있었는데 각각 제술과와 명경과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 소과의 합격자들은 제대로 된 선비이자 양반으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고, 시험을 치기 싫으면 종9품직(현 7~9급)을 얻을 수 있었다.

생원과는 사서오경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고, 진사과는 나 부로 문예창작 능력을 테스트하고, 각각 통과하면 생원이나 진사라는 칭호가 붙여진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전에 대한 암기보다 문장능력이 더욱 중시되었고, 이 때문에 생원보다 진사가 존경받게 되었다.

진사와 생원별로 1차시험인 초시는 한성시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에서 500명[7]을 뽑아 각각 700명을 선발했으며, 이 중 2차시험인 복시를 통해 다시 각각100명을 선발해 그 진사와 생원 합 200명을 소과합격자라 불렀다.

4.3 대과

대과의 시험 과정
초시관시
(50명)

(240명)
복시
(33명)
전시갑과
(상위 3명. 1위:장원(壯元), 2위:방안(榜眼), 3위:탐화(探花))
정 7품
.† 장원은 종6품.
한성시
(40명)
을과
(차순위 7명, 4~10위)
정 8품
향시
(150명)
병과
(하위 23명, 11~33위)
정 9품

유교경전 실력, 문예창작 능력, 대책같은 논술 능력을 시험하였다. 원래는 성균관에서 자격을 갖춰야만 칠 수 있는 시험인데 성균관이 꽤나 잘 안 돌아갔나보다.

1차시험인 초시는 총 240명을 선발했으며 관시, 한성시, 향시로 나뉘어졌다. 관시는 성균관 유생 중 우수한 사람만이 응시하여 50명을 선발했으며, 한성시는 서울에서 40명, 향시는 지방에서 150명을 선발하였다. 비중은 경기도 20명, 강원도 15명, 황해도 10명, 충청도 25명, 경상도 30명, 전라도 25명, 평안도 15명, 함경도 10명이었다. 비율은 다음과 같다. 서울20%, 경기도 10%, 강원도 8%, 황해도 5%, 충청도 13%, 경상도 16%, 전라도 13%, 평안도 8%, 함경도 5%.

2차 시험인 복시는 총 33명을 선발했으며 여기서 합격하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3차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왕이 직접 주관했으며 성적순으로 갑과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배정했다.

등수에 따라서 받는 품계가 달랐는데 장원급제는 종6품, 꼴찌는 종9품으로 최대 3품의 차이가 났다. 당연히 장원급제는 고위직 승진이 용이했고, 꼴찌의 경우 지금의 7급 공무원과 같다. 이는 중앙부처의 말단 공무원이므로 7급 공무원과 유사하며 지방의 최하급 공무원들인 향리나 아전 등은 세습으로 임용되었다.

문제는 현재의 7급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행정고시를 통과한 경우 5급 사무관이 되는데, 이들을 일명 고시사무관이라고 해서 현실적으로 7급 혹은 9급에서 시험 혹은 인사고과로 승진한 사무관과는 승진에 있어서 비교를 불허한다. 평생을 일해도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어 전시의 등수가 낮으면 여러번 응시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구도장원공으로 유명한 이이는, 말 그대로 과거시험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를 했다. 여기서 9번은 정말 과거시험 자체를 9번 본게 아니라 1회 치러지는 과거시험의 여러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아울러 9회 장원을 했다는 말이다. 나중가서는 후배들 자리 빼먹는다는 소리도 들었고.

당연히 과거 합격자가 많은 가문은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은 문과 합격자(866명)를 냈고, 그 다음으로 안동 권씨(367명), 파평 윤씨(346명)남양 홍씨(331명), 안동 김씨(320명) 순서다. 참고 [1] 덕수 이씨인 이순신의 후손들은 단 한 명만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과에서는 26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순신 항목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직계인 '충무공파'에 국한된 얘기.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어서 문과 쪽인 문성공파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4.4 전시

왕이 친람하는 전시에서는 복시 합격자들이 대책에 대해 써 올렸는데, 그것은 현실문제나 시국문제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왕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면, 장원이었던 셈이다.

  • 세종 -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여라.
  • 중종 -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해야 하는지를 논하여라.
  • 중종 - 술의 폐해는 오래되었다. (중략) 우리 조선의 여러 훌륭한 임금님들께서도 대대로 술을 경계하셨다. (중략) 그런데도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더욱 심해져,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술에 중독되어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 흉년을 만나 금주령을 내려도, 민간에서 끊임없이 술을 빚어 곡식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 명종 - 근래에 와서 학교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이를 개선할 방책을 논하여라.
  • 광해군 - 공납품을 토산물 대신 쌀로 바꾸는 것에 대해 논하여라.

물론 진지한 문제만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 광해군 -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 이치에 관련된 대책도 출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종 13년(1558년)에 출제된 대책으로, 여기서 이이의 그 유명한 '천도책'이 나왔다. 당시 대책을 간략하게 얘기하면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성리학적 이치에 따라 설명하라"는 내용.

4.5 무과

문을 중시한 조선에서 무과는 상대적으로 하대받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무과가 사실상 없던 고려시대에 비해 정기적으로 실시한 무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발전된 모습이었으며 기본적인 신분보장은 문과와 동일했다. 또한 잡과보단 위상이 높은지라 꽤 많은 양반 자제들이 무과에 응시했으며 개중에는 양민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규정이 크게 완화되면서 몰락 양반이나 서자들, 한량들이 무과에 몰리면서 무과 위상도 많이 떨어지게 된다.

조선 초까지 한량은 놀고 먹는 하급 양반이나 부유한 평민 등 유산계층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나, 조선 후기에 이들에게 무과 응시자격을 주면서 정조 시기에는 무과 응시자나 무과 합격자이지만 아직 직역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변한다.

무과는 문과에 비해 소과가 없다는 점, 대과의 초시와 복시 선발인원이 50, 5명씩 감소한다는 점, 전시[8]에서 장원을 뽑지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초시, 복시, 전시 3단계 대과로 구성된다는 점, 전시의 갑, 을, 병과의 존재, 대과 합격자에게 홍패를 준다는 점은 동일했다. 시험과목은 다음과 같다.

  • 초시 - 목전(나무로 만든 화살로 240보 거리에서 3발 채점)·철전(육량전, 아량전, 장전등을 쏘기)·편전·기사(말타며 활쏘기)·기창(말타며 창 다루기)·격구(말을 타거나 직접 뛰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이 시험과목이었다. 이중 격구같은 공놀이가 왜 시험 과목으로 있나 싶겠지만 말을 타고 하는 기마 격구는 전투적인 성향이 강하고 경기를 하면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나중에 마상 무예를 배우는데 유용하게 쓸 수 있어서 시험과목에 포함되었다.
속대전 편찬 이후에는 목전·철전·편전·기사·유엽전(버드나무 모양 화살촉을 단 실전용 화살)·조총·편곤으로 시험과목이 바뀌었다.
  • 복시 - 병법서, 유교경전등이 시험과목이었다. 무예와 관련성이 적은 유교 경전이 들어간 이유는 원래 무신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들어간 것이며, 당연히 문과에 비해 난이도가 크게 낮았다. 하지만 무과에 급제해도 어찌되었든 벼슬을 한 셈이니 양반자리가 유지된다는 점을 알아챈 양반들이 너무 무과로 몰리는 폐단이 발생해서 유교 경전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시험과목은 병법은 손자.오자.육도삼략.삼십육계 등 중 1권과 사서(대학.중용.논어.맹자) 중 1권을 선택해 주관식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 전시 - 기격구와 보격구, 즉 마상 격구랑 보행 격구가 시험과목이다.

원칙적으로 초시에서는 원시(훈련원시) 70명, 향시 120명 등 190명을 뽑았고, 복시에서 28명을 선발한다...였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변란시 마구 뽑는 바람에 몇백 명은 기본에 천 명까지 뽑는 경우도 있었다. 인조때는 수천명을 뽑았으며, 1676년에는 1만 8251인을 뽑았다(!). 흠많무. 이 때문에 만과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4.6 잡과

오늘날로 치면 소수직렬 고시라고 볼 수 있다. 과목으로는 역과(어문계열), 의과(한의학), 율과(법학), 음양과(천문학+지리학+점술가)가 있었다.

역과는 초시에서 한학 45명(중국어), 몽학(몽골어) 4명, 왜학(일본어) 4명, 여진학(만주어) 4명을 선발했으며 최종적으로 한학 13명, 몽학 2명, 왜학 2명, 여진학 2명을 선발했다. 역과의 인기는 높은 편이었다. 다른 잡과와 달리 역과는 부를 쌓을 수 있는 루트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으로 갈 때 이들도 일행에 포함되어 통역관으로서 참여했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이 현지에서 무역을 통해 경비를 조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역관들은 인삼 등을 팔아 경비를 조달하고 남겨 개인 재산으로 축적했으며, 역관만으로 몇 대를 이어가는 집안도 줄줄이 나왔다.

의과는 초시에서 18명을 선발했으며 최종적으로 9명을 선발했다.

음양과는 초시에서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역학자) 8명을 선발했으며 최종적으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2명을 선발했다.

율과는 초시에서 18명을 선발했으며 최종적으로 9명을 선발했다.

4.7 음서

고려시대까지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문벌귀족의 초필살기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고위 공무원이면 아버지 빽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고 합법적인 수단이었으며 쪽팔려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선 이전까지는 음서제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좋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관료제가 보다 세련되어지고 과거제도가 발전하면서 음서로 진출하는 것은 쪽팔리게 여기게 되었다. 당장 문음이라고 명칭도 바뀌었을 뿐더러,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료 자녀만 음서가 가능했으며, 그나마 음서로 관직에 들어온 자녀들은 그 사실을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쪽팔리게 여기고, 과거로 들어온 관료들은 음서직을 개무시하였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한명회는 할아버지가 조선 국호를 받아온 한상질에 작은 할아버지는 개국 3등공신인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서로 등용되자 개성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말단관직을 전전했고 개성 관료사이에서도 개무시를 당했다. 관직에 들어오고 나서도 다시 공부해서 과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어차피 조선시대에는 음서로 관직에 들어온 자는 높은 품계로 승진이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3품 당상관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예외적인 사례가 바로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다. 8대 옥당이라 하여 8대가 내리 홍문관 관원을 지냈던 후덜덜한 문벌의 덕을 받아 음서로 관직에 올랐는데, 영조가 과거에 다시 응시하여 고관으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권유했지만 '이미 은혜를 입어 음서로 출사했는데 높은 관직을 구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광주목사까지 역임했으니 꽤 고위직까지 진출했다고 할 수 있다.

예외적인 사례로 영조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있는데, 이 쪽은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과거급제 없이 종2품까지 오르게 된다. 이유는 왕의 그림스승이라서.

이렇게 된 이유는 음서로 들어온 경우는 고려시대부터 외교문서 작성이나 대간 직, 지공거 등에 제한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에 나서는 것이 근본적으로 막혔다.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통과하지 않으면 고위직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음서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통과한 이들이 당당하게 관료생활을 할 수 있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다시 분위기가 역행하여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음서로 관직에 나가려는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지만 이 시기에조차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과거였으며, 바로 이것이 조선 말엽에 과거제의 폐단이 대두되며 과거 시험이 막장이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5 부정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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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게 아래에서 언급할 중국의 부정행위 속옷 협대이며 현대 중국에서도 부활한 적이 있다.

이렇게 중요한 시험이다보니 각종 부정행위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 후기같은 상황이 되면 난장판으로 표현할 수준이었다. 이런 난장판을 잘 묘사한 것이 네이버 웹툰 가운데 호랭총각중 과거편[9], 글로는 엽기조선왕조실록 중에서 과거에 대해서 다룬 항목이다. 실제로 이런 부정행위들은 조선후기 신분제가 동요하는 과정에서 더욱 문제시 되었고 심각해졌는데, 해당 글들이 모두 그 시대의 과거풍경을 다루고 있다.

사실 부정행위 정도가 아니라 과거제 자체가 막장이 되어버렸다. 일단 조선 후기쯤 되면 이야기에서 흔히 보듯 '혼자 공부해서 한양 올라가 단번에 장원급제해 벼슬 시작'은 말 그대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기본적으로 과거에 1차라도 붙고 싶다면 선접군, 사수, 거벽 등 몇 명이서 서로 역할을 나눠 단체전으로 움직여야 했다. 당시 과거장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아주 파라솔까지 펴놓고 느긋하게 모여앉아 다과회라도 나누는 듯한 풍경이다.

게다가 아래도 나오듯이 부정행위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과장 내에 막걸리 장사들이 판을 펴기까지 했으며, 세도가들의 경우에는 아예 답이 주어져 있었고, 답안을 제출하는 방식도 집에 가서 답안지를 가져온다든지, 아예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포졸들이 완성된 답안지를 가져다 주던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나중에 가면 명문가 자손이 낙방을 하면, 그게 덕성이 높은 증거라고 찬양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근래 경외 유생들이 대소 과장에서 대개 구차한 일을 면치 못하여 간혹 의심스럽다는 시비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김수증만은 상국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 『공사견문록』

김수증은 김상헌의 손자로 동생들이 정승 자리에 오른 반면에 그 자신은 과거를 계속 봤는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이런 부정행위 중에서 숙종시기 언급된 대표적인 과거의 폐단인 과거 팔폐(科擧八弊)를 강조해서 작성했으며 실제로는 더 막장인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조선시대 구한말 때는 이런 행위를 감인고(堪忍苦)라고 했으며 이런 폐단은 KBS 스펀지 79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

  • 고반(顧盼) - 고개를 돌려서 옆의 답안지 베끼기. 부정행위의 기본중의 기본.
  • 낙지(落地) -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하는 것. 응시자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매수된 시험관이 행하기도 한다.
  • 설화(說話) - 옆사람과 의견을 나누어서 답을 작성하는 것.
  • 수종협책(隨從挾冊) - 커닝 페이퍼. 커닝의 기본인 커닝 페이퍼는 과거의 역사와 함께 했다. 수종협책은 책 자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콧구멍 속에 숨기는 의영고(義盈庫), 붓 속에 숨기는 협서(狹書) 등 다양하게 존재했다. 참고로 각각 방안에 집어넣어서 시험을 쳤던 청나라 시대에는 커닝페이퍼 속옷까지 등장했다.
  • 암표(暗標) - 응시자가 시험관과 미리 정해놓은 표시를 시험지에 해서 자신을 알리는 방법. 답안지에 적힌 응시자의 이름은 합격여부가 밝혀진 뒤에나 시험관들이 볼 수 있었기에 만들어진 방식이다. 시험관을 매수했다면 반드시 나오는 방법중 하나다. 이 암표와 필적을 통한 부정 행위를 막기 위해서 서리들이 모든 시험지를 다시 작성해서 시험관이 검사하게 하는 과장역서법(科場易書法)이 고려말부터 시행되었다. 물론 촉박한 시간에 대량의 문서를 수필로 다시 작성해야 하며, 서리를 매수하는 등의 문제점이 있는 등 과정역서법 자체는 폐단이 많아서 폐지가 검토되었지만 결국 과거가 없어지는 고종시기까지 꾸준히 행해졌으므로 암표는 그리 흔하게 행해지지는 않았다.
  • 외장서입(外場書入) - 시험지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 말 그대로 외부와 짜고 모범 답안지가 과거장 안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는데 이를 대술(代述)이라고 하며, 이를 위해서 대나무 관을 사전에 매설한 방법을 시도했다가 들통난 케이스가 숙종실록에 실려있다. 응시자가 밖에 나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후 다시 들어와서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정도 되면 말그대로 명문가문으로 시험관 등의 전체 매수는 기본이다.
  • 음아(吟哦) - 서로 짠 옆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웅얼거려서 말해주는 방법. 앞서 언급된 설화와 다른 점은 설화가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라면, 이 쪽은 한 쪽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독백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설화는 A↔B, 음아는 A→B 형식이다. 때문에 옆 사람에게 답을 알려주는 용도부터 시작해서, 라이벌 방해목적까지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 이석(移席) - 자리 옮기기. 시험치는 도중에 차를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의 이유로 한번 자리를 뜰 수 있었는데 그걸 이용한 방법이다. 작게는 매수한 사람 근처로 옮기는 것부터, 크게는 다른 사람과 자리 바꿔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 시험장을 경비하는 이졸을 미리 매수한 사람으로 교체해서 하는 부정행위.
  • 입문유린(入門蹂躪) - 과거 시험장에 응시자가 아닌 사람이 출입하는 것. 잡상인 등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한명을 위한 태스크 포스. 명문대가 정도 되면 일개 중대에서 대대규모가 움직였다. 다른 부정행위의 기본이 되는 부정행위.
  •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 말 그대로 엉터리 시험지를 낸 다음에, 그 답안지를 이리 저리 손봐서 합격하는 행위. 부정행위라기 보다는 이미 과거제도를 엿먹이는 문제점 그 자체다.
  • 절과(竊科) - 합격자의 답안지에서 이름부분만 미리 정해진 사람과 바꿔붙인다. 이 경우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은 합격자 하나가 확실하게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시간차 부정행위이기 때문에 일정시기까지는 답안지 자체를 제출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허락을 받고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기술하는 선착순의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꾸준히 문제시 되었다.
  • 정권분답(呈券分遝) - 시험지 바꿔치기. 옆사람과 바꾸면 환권(換券)이라고 한다.
  • 차술자작(借述借作) -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쓰는 것. 넓게는 대리시험까지 포함하지만, 좁게는 여러 사람을 미리 데리고 들어간 다음에 각각 답안지를 작성하게 하고 그중에서 잘된 것을 답안지로 제출한다.
  • 혁제(赫蹄) - 시험관 매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몇몇 부정행위는 이 혁제가 필수이기 때문에 다른 부정행위를 위한 부정행위로 이용되었다.
  • 혁제공행(赫蹄公行) - 과거 제목을 미리 아는 것. 시험관 매수인 혁제를 배경으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부정행위가 이뤄지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중간단계의 부정행위.
  • 시험지 빨리 내기 - 역시 조선후기에 성행한 방법으로, 응시자수의 증가로 채점할 시간이 부족해지자 채점을 대충대충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방법이다. 날이 갈수록 응시자수가 폭증해서 첫줄만 읽고 대충 채점하거나 아예 선착순으로 하는 일이 생겨났다. 게다가 선착순의 숫자도 대충 300명 선에서 끊어졌는데, 응시자숫자는 많으면 만명 단위였다. 이건 과거 합격자가 당일에 발표되었는데, 시험관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즉일방방(卽日放榜)이라 해서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단어다. 따라서 시험지를 빨리 내지 못하면 아예 채점도 받지 못하므로 필사적으로 시험지를 빨리 제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리잡기, 제출과정의 몸싸움으로 인한 선접군이라는 전문 싸움꾼의 등장 등 폐단이 많았다.
  • 답안지 훔치기 - 나중에는 아예 시험장을 습격(해서 시험관을 구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조선 후기, 과거제가 완전히 난장판[10]이 되면서 장내에 막걸리를 팔러온 상인들이 자리잡는 일도 행해졌다. 이렇게 단체전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접'이라고 한다. 대개 접은 사수, 거벽, 선접군으로 나뉜다.
  • 선접군 -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 과거제는 시험문제를 나눠주는게 아니라 써 붙여둔걸 수험자들이 와서 보고 답을 작성하기때문에 자리가 나쁘면 문제를 굉장히 늦게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선접군들의 자리다툼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목숨도 걸린 일이다. 아침에 선접군들의 자리쟁탈전에서 밀려나 쓰러진 사람은 그대로 세상 하직, 뒤에 몰려올 일만에 가까운 인파에 그대로 깔려버리기 때문이다. 더불어 선접군은 답안지 제출시에도 용맹을 발휘하여 어떻게든 자기 접의 시험지를 300장 안쪽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는 엽기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에 나오기도 했다.
  • 사수 - 글을 베끼는 사람. 답안의 내용만 보는게 아니라 얼마나 서체가 바르고 곧은가도 점수가 되기 때문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거벽이 만들어낸 답을 간지나게 써내기만 하면 된다.
  • 거벽 -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 적당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맡으며 접의 다른 사람들의 답안까지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수종협책(커닝)기술이 있으니 박터지게 공부하는 놈은 거의 없었다. 엽기조선왕조실록 '천국으로가는 마지막 비상구' 파트를 읽어보면 확 와닿는다.

6 폐지

과거 제도는 1894년 제 1차 갑오개혁 시행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 뒤 1894년 7월 12일 '선거조례'와 '전고국관제'를 제정해 시험과목으로 국문, 한문, 사자(寫字. 글씨를 똑같이 베껴쓰는 것), 산술, 내국정략, 외국사정 등 정치 해정과 실무, 국제정치 등을 시험해 관리를 선발했다. 그 외에 '향공법'(鄕貢法)이라고 하여 각 지방에서 일정 인원을 추천받아 인재를 선발하는 천거 방식의 임용제도도 함께 시행되었다.

오늘날에는 고시로 대표되는 공무원 시험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과거시험보다 뽑는 사람은 좀 더 많지만 난이도 역시 더 높아졌다.

7 평가

7.1 비판

시험 만능주의입시위주 교육의 시초.

『일중비교교육사(日中比較教育史)』에서 중국의 근대화가 늦은 이유의 하나로 '과거 제도의 영향'을 꼽았다. 중국에서 서구의 학문 도입이 지연되었는가에 대해서, 이 책은 그 이유로 과거에서 중국의 학문 교육이 경직화 되었고, 에도 시대의 일본 학문과는 유연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지적하였다.

과거 제도의 확립으로 중국은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관직을 얻어 권력을 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권의 중추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교육의 중심은 과거가 되었고 사회 전체의 지식 강화보다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학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출세에 필요한 유학 이외의 학문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중국의 학습자는 지위와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되었으며, 권위와 권력에 밀접하여 논쟁적, 창조적인 학문은 배제되었다. 또한 과거 시험을 보는데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으므로 돈이 많은 사람만이 과거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이후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의 고시 제도에도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서 수많은 고시 낭인들을 배출한다.

이 책에 따르면, 에도 시대의 일본에도 공적 시험은 있었지만, 과거와 같은 선발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료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교양을 위한 것이었다. 관립 학교가 설립된 중국과는 달리 대부분의 학교가 사숙이며, 따라서 다양한 학문이 도입되고 새로운 학문의 도입도 쉽고 적극적이었다. 학문이 취미로서 출세의 절대적인 도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령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학습자가 서민까지 퍼지고, 실용적 합리적인 학문을 존중했기 때문에 서양 학문에 도입에도 이해가 있었다고 서술했다.

일중비교교육사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에도 널리 퍼진 과거 제도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일 것이다. 다만 이 이론에는 몇가지 지적할 점이 있다.

  • 과거 합격에 필요한 재산 규모와 과거로 형성되는 대대로 이어지는 문벌에 대한 주장은 과거제도 비판자들에 의하여 과장되고, 그것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측면이 많다. 현대의 연구는 이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도 적지 않다.
  • 실제로 중국의 사숙이 일본보다 덜 발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에서 태학, 국자감 같은 국가 교육 시설이 활발했던 것은 오히려 과거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이고, 과거 제도가 제대로 운용된 이후에는 동림서원 같은 유서깊은 사학이 발달했고 태학이나 국자감은 형식적인 기관으로 몰락했다. 국가 교육 시설은 과거 제도의 '대중적 기풍'보다는 세습제의 '귀족적 기풍'과 더 밀접한 연결이 있었던 것이다.
  • 과거 제도의 도입이 이 같은 부작용을 가져온다면, 메이지 유신은 과거 제도와 같은 형식의 제도인 고시를 도입함으로서, 에도 시대에 있었던 자율적 학문과 다양성을 파괴하여 논쟁적, 창조적인 학문을 배제하도록 만들고, 국가가 지식인에게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하여 결국 국가 전체가 '경직화' 되도록 만들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버린다. 실제로 말도 안되게 경직화 된 걸 보니 사실일지도.

이러한 점 외에도 어느 제도나 제도를 사용하는 자가 공정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다. 시험 잘봐야 담당관이 멋대로 조작해버리면 합격하지 못하며 시험을 개차반으로 봐도 담당관이 뒤를 보면 합격할 수 도 있으며 과거제 역시 저러한 맹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폐지의 길을 걸었다.

또한 과거제뿐 아니라 시험에 의한 인재 선발의 전체적인 문제로 바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별하지 못한다. 시험을 통과할 수 만 있다면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점이 최악의 문제점. 사람의 됨됨이가 인재 선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나오는 최악의 케이스가 현대에도 있다. 바로 정치검사/판사들. 그들의 권력을 위해 뒤를 봐주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직책을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맡을 때의 문제는 이로 말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실무 지식으로 시험 주제를 구성하여도 막상 실무에 들어가면 반드시 괴리가 생기기 때문에 실제 시험 성적과 실무 실력의 차이가 반드시 드러난다. 다만 대체적으로 실무실력이 나중에 시험 성적을 따라가기에 잘 부각되지 않는 맹점일 뿐 분명 시험만능주의의 폐단중 하나이다. 실무지식만으로도 이런데 유학만을 다루는 과거제는 더 심했으며 단순한 학문의 경직을 넘어 정책의 경직까지 퍼졌다. 나름 기술을 중시하던 세종 때까진 문제 없이 잘 굴러갔으나 결국 유학에만 빠삭한 인재가 관직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 특징상 이후 왕대에서 점차적으로 정통 성리학파인 사림파가 대두되면서 조선은 점차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림파의 비판 참조.

7.2 긍정

일단 과거 시험의 난이도를 보면 현재 시행되는 어떤 시험보다도 난이도가 높다. 우리 나라 기준으로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면 사법고시, 입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시험은 이 네 가지 고시보다도 수준이 높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기본적으로 사서삼경은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역대 역사의 내용도 전거로 사용해야 하기 떄문에 자치통감 수준의 역사서의 내용도 알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답안을 작성하는 언어도 우리말이 아닌 한문이다. 이 정도가 기본으로 장착해야 하는 능력이다. 최종적으로 전시에서 나오는 문제를 답하고 자신의 논리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종합 논술의 성격도 가진다. 만약 사법고시를 치르는데 6법전서가 한글이 아닌 순 한문이거나 순 외국어로 작성되었고 답안도 작성된 언어로 작성한다고 상상해보자. 난이도가 극악으로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현재 시행되는 구술 시험도 어렵다고 하지만 과거시험보다 분명히 난이도는 낮다. 왜냐하면 구술 시험이라 해도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 어가 아닌 프랑스 어로 답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렵게 시험을 통과한 조선시대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한문구사 능력과 유학적 소양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능력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을 경우에 잘 드러난다. 실제로 중국어나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지만 한문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얻은 역사 지식과 경전의 이해는 물론 한시를 주고 받는 광경은 조선시대 기행문을 보면 매우 흔하게 관찰된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를 파견할 때 도쿠가와 막부는 전문적으로 한시와 한문을 작성할 수 있는 제술관(製述官)을 요청했고, 당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파견된 통신사 일행을 만나기 위해 천금도 아끼지 않고 문집의 발문과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고 자신이 지은 한시와 문장을 비평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장점에도 분명히 단점은 존재한다. 어렵고 긴 시간동안 준비해서 과거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못 하거나 한문 실력이 없는 사람에 대해 강한 차별의식을 가졌고, 그 대상이 국왕이라해도 다르지 않았다.(일례로 영조가 즉위하고 나서 경전공부를 하지 못해 상소문이나 신하들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무시한 것은 마찬가지 였다. 이 부분은 영조의 컴플렉스가 되어 사도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할 때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그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현재의 고시제도를 통해 선발된 고급인력들도 일반인에 대해 갖는 차별의식은 더하면 더했지 못 하지 않다. 이 부분은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여기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갖는 차별의식이며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파이더맨 영화의 주제인 '큰 능력에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과거 시험 합격자들 즉 관리와 위정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특권의식을 인정하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만 반대로 그러한 대우에 합당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면 언제나 무거운 책임을 물었다는 점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비판 이전에, 지금도 전 세계에서 공무원은 물론 직장인을 뽑는 기준은 과거 제도를 현대식으로 변경한 시험제도다.

사실 과거 제도는 고대/중세인 그 당시의 개념으로 보자면 공정성과 합리성 측면에서 대단히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시스템이다. 일단 전세계적으로 따져봐도 관직을 임명하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는데, 딱히 그 전의 시스템이 과거 제도보다 특별히 더 공정하거나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는데 합리적으로 작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제비뽑기 - 고대 그리스폴리스 등에서 나타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기회를 가진다는 '공평함'은 확보되지만 합당한 인재가 선출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선거 - 공화제 국가에서 나타난 방법. 선거는 많은 사람에게 관직을 인정 받았다는 '정당성'은 확보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롭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전의 선거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후보자 자격, 투표권, 개표 문제등 여러가지 면에서 부적절하고 불평등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또는 그랬다는 마타도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당성도 확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 상속과 세습 - 관직의 세습은 중세까지는 세계적으로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중세적인 관료제가 나타난 나라에서도 아버지의 관직을 자식이 세습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는 사회적으로 흔히 있는 직업의 세습 관념이 관직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동양의 음서. 다만 음서의 경우 곧이곧대로 부친의 직책을 물려받는 건 아니기에 차이는 좀 있다. 바로 세습은 아니라도 대체로 고관의 자식은 아래의 추천이나 발탁으로 쉽게 요직에 가기 쉬웠고 하위직 충원도 마찬가지.
  • 천거, 발탁 - 유력자의 천거나 발탁. 천거 제도는 구품관인법과 같이 사실상의 세습제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고, 유력자의 발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인재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 역시 유능한 인재가 유력자에게 기대게 되어 파벌과 문벌이 강화되는 부작용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발탁 과정의 공정성 역시 담보할 수 없다. 천거, 발탁도 대상이 주로 유력자의 자식들이나 친인척 등 권문세족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줄이 없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발탁되기 어려웠다. 단 무인 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등 출신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출세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 매관매직 -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의 경우는 그냥 돈주고 자리를 사는 것이 공식적 시스템인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공식적 매관매직 제도는 근세 유럽의 군 특히 육군 전투병과의 임관 및 진급 제도로 임관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근속 년수를 채운 뒤 돈으로 계급을 샀다. 원래는 정부의 지원 부족을 육군 장교들이 자기 돈으로 해결하던 게 공식적인 제도가 됐던 것. 특히 영국 육군의 사례가 유명한데, 얘네들은 크림전쟁 때까지도 이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발라클라바 전투로 대표되는 크림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기병대의 삽질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거다.
  • 엽관제 - 정당에 대한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공직자를 임명하는 인사제도. 이 제도의 폐단 때문에 제임스 가필드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과거 제도가 비용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다른 방식은 과거 제도 이상으로 '문벌'이나 '재산'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공정성'을 확보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체의 모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능력을 살리는 '시험'을 보게 하고, 이로서 '유능한 인재'를 공급받는다는 '제도'는 사실 굉장히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실제로 문벌귀족 가문이 왕조보다도 더 길게 존재하던 당나라 이전과 비교하자면, 송나라 이후의 문벌 가문은 그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11]

7.3 서양에 미친 영향

유럽의 선교사와 외교관들에 의해 서양에 알려진 과거 제도는 서양의 정치 이론가들에게 대단히 강렬한 영감을 주었다. 이전까지 서양의 공무원 채용 시스템은 집안이나 인맥(추천장)에 의한 채용이었으며 이 전통은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 학생 선발과 회사의 직원 선발에 남아있다. 봉건제가 유지되었던 서양의 관료 채용 제도는 위와 같이 문벌이나 재력보다 능력이 중시되는 시스템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개혁적인 이론가들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하여 그 능력을 시험하고 채용하는 과거 제도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서구 국가들에 의해서 실행되었는데, 처음으로 영국은 Northcote-Trevelyan Report에 따라서 영국령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English East India Company)의 직원 채용 제도를 개혁하는데 착수하였다. 영국령 인도에서 과거 제도에 영향을 받은 공개 경쟁 채용 시험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영국 정부는 1855년 영국 공무원 채용에도 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정책 성공의 영향을 받아서 19세기에서 독일과 프랑스 등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차례차례 시험 제도의 도입에 착수하였다. 결국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제도는 1883년 미국에서도 도입되었다.[12]

이로써 과거 제도를 서양에서 재해석, 수용하여 나타난 근대적인 시험 평가 제도가 나타난다. 근대화된 시험 평가 제도는 시험 점수라는 공정하고 균일한 기준에 따라서 임용을 함으로서, 국가를 운영하는 공무원 관료 집단을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과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모집함으로써 능력과 의지가 있으면 누구라도 정부 관료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공무원과 관료의 질은 전반적으로 이전 시대보다 향상되었다. 결과적으로 과거 제도의 수용이 바로 근대 관료제 국가의 전문화 된 관료층을 만들어 내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며 이렇게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필수요소 중 하나인 평등이 실현되는 것이 바로 과거 제도다.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국가에 공헌할 수 있고 그에 맞는 대가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상 과거 제도의 '개념'은 현대 공무원 시험, 사법시험, 대학수학능력시험, LEET, SSAT와 같은 각종 고시와 선발 시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셈이다. 사실상 중국의 과거 제도가 서양으로 갔다가 다시 동양으로 되돌아 온 셈이다. 서양을 다녀오면서 달라진 것은 시험 과목이 현대의 동양 철학 과목에 해당하는 유교 경전이 아닌 실용적인 학문과 실무에 필요한 지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8 세계의 과거 제도

8.1 중국

과거 제도는 중국 나라 문제가 만들었던 선거제에서 유래한다. 이는 때 과거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을 거치면서 정착되었다. 물론 과거시험제도 자체는 이미 당대에 완성되어 있었지만, 송대부터 황제의 앞에 나서서 시험을 치르는 전시(殿試)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과거의 경우는 합격자와 시험관 사이에 스승과 제자 관계가 성립되는데, 전시의 존재로 황제의 권위에 큰 플러스 요인이 되게 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체제 자체는 측천무후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지만 이후 사라졌다가 송대부터 완전히 자리잡았다. 중국 과거 시험제도와 폐해는 진사 2.2 항목을 참조.

당나라 때는 아직 한국에 과거 제도가 없었고 당나라 역시 유례없이 개방적인 왕조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 외국인 대상 빈공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3최로 일컬어진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모두 당나라 빈공과 급제자 출신이다. 원나라까지는 중국에서 과거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은 명나라대에 중단되어 조선시대부터는 중국 유학보다는 국내 과거 위주로 가게 된다.

8.2 일본

헤이안 시대에 일시적으로 실행되었지만, 문벌 성향이 강해지고 귀족이 형성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사무라이 계층의 대두와 함께 이들이 사회 주도 계층이 되면서 치뤄질 일이 없게 되었다.

8.3 베트남

유교가 베트남에 들어온 이후 천 년 가까이 베트남의 관리 임용 제도로 사용되었으며 1075년에 처음으로 과거 시험을 실시했다. 과거의 급제자들은 그 순서에 따라 장원(狀元 - trạng nguyên), 방안(榜眼 - bảng nhãn), 탐화(探花 - thám hoa), 진사(進士 - tiến sĩ)라고 불렀다. 하노이에 있는 문묘(文廟 - Văn Miếu)가 과거 시험장으로 유명했는데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 수십개가 지금도 남아있다. 그 뒤 프랑스 식민제국에 의해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 과거와 연관이 있는 말

  • 관광 - 지금이야 여행을 의미하지만, 본래는 과거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간다'는 의미로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한데서 유래했다.(반론: '관광(觀光)'은 [詩經]의 觀國之光을 줄인 말인데 과거보러 간다는 표현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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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장판 - 조선 후기의 뒤집어지던 과거시험장을 의미한다.
  • 압권 - 가장 뛰어난 답안지를 맨 위에 올려 임금에게 올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 시험에 붙었다 - 과거의 합격자들은 바로 그날로 방을 통해서 벽에 붙었다. 이것이 앞에서 꾸준히 언급된 즉일방방이다.
  1. '처세장'의 맨 앞부분인데, 이 장 자체가 과거 제도 하에서 선비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술이다.
  2. 무과는 예종 때 7재로 정비되면서 도입되었으나 얼마 못가 폐지.
  3. 이 제술과에서도 정책과 관련된 시무책보다는 문학적 재능을 더 중시했었다. 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2005,p324
  4.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봤다는 그 빈공과다.
  5. 앞서 9재 학당과 비슷한 구분인 것으로 추정. 9재 학당은 악성재, 대중재, 화산재 등 총 9개의 학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6. 복시 합격자 33명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으로 지금으로 치면 사법연수원에서 성적순으로 임용권을 주는 것과 같다.
  7. 각 지방별로 인구비율에 따라 합격자 수를 분배했다.
  8. 전시라 하더라도 왕이 친람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9. 해당 웹툰의 대부분의 내용은 백범일지에 그대로 나온다. 호랭총각이 백범일지에서 참조한 듯.
  10. 난장판의 난장이란 표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다른 유래는 행상인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 벌이는 시장인 난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11. 과거 제도가 존재한다면 문벌은 스승과 제자가 여러대에 걸쳐서 과거에 합격해야 형성이 되는데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자가 100% 과거에 합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시험관 - 합격자가 문벌을 형성한다고 해도 동아시아권에서 정쟁이 벌어지면 관료들이 죽거나 좌천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문벌이 형성되기는 매우 어렵다.
  12. Kaplan, Robert M.; Dennis P., Saccuzzo (2005). Psychological testing: Principles, applications, and issues (6th ed.). NY: Thomson Learning. p. 12. ISBN 0-534-633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