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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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政文書

1 개요

통일신라 시기 서원경[1] 지방 4개 마을의 장부 기록으로, 통일 신라 시기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및 각정 행정 정책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민정 문서라고 부르지만 신라장적, 신라 촌락 문서, 정창원 문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시 신라 사회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이 시기 신라의 각종 행정정책과 관련된 1차 사료가 달랑 이거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2]

2 문서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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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0월 일본 도다이 사 쇼소인이 소장하고 있던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을 수리하던 중에 경질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사진 촬영 후에는 보존을 위해 다시 원상태로 경질 속에 넣었기 때문에 현재는 사진만 남아있으며 연구도 사진을 보고 할 수밖에 없다. 가로 58㎝, 세로 29. 6㎝ 정도의 한지 2매에 서원경에 근접한 군(郡)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현(縣)의 관할 아래 있던 사해점촌(沙害漸村)·살하지촌(薩下知村)·모촌(某村)[3]과 서원경의 직접 관할 아래 있던 모촌의 행정 관련 내용이 해서체로 기재되어 있다. 살하지촌과 모촌의 일부분이 소실되었으며,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가 꽤나 있다.

3 내용

이 고을 사해점촌을 조사하니, 마을 크기가 5,725보이다. 공연수(호수)는 합하여 11호가 된다. 마을의 모든 사람의 숫자를 합하면 147명이고, 그 가운데 전부터 계속 살아온 사람과 3년 사이에 태어난 자를 합하면 145명이 된다. 정이 29명(노비 1명 포함), 조자가 7명(노비 1명 포함), 추자가 12명, 소자가 10명, 3년간 태어난 소자가 5인, 제공은 1명이다. 여자의 경우 정녀 42명(노비 5명 포함), 조녀자 9인, 소녀자 8인, 3년간 태어난 소녀자 8명(노비 1명 포함), 제모 2명, 노모 1명이다. 3년간 다른 마을에서 이사온 사람은 2명이다. 가축으로는 말이 25마리가 있고 그 가운데 전부터 있던 것이 22마리, 3년 사이에 보충된 말이 3마리이다. 소는 22마리가 있고 그 가운데 전부터 있던 것이 17마리, 3년 동안 늘어난 소는 5마리이다. 논은 102결 2부 4속이며 관모전이 4결, 내시령답이 4결, 연수유답이 94결 2부 4속이며 이 가운데 촌주가 그 직위로써 받은 논 19결 70부가 포함되어 있다. 밭은 62결 10부 5속이 있다. 뽕나무는 모두 1,004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이다. 잣나무는 모두 120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34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86그루이다. 호두나무는 모두 112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38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74그루이다.[4]

이러한 내용을 통틀어서 당시 사회의 여러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데,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 인구를 나이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다. 정(丁)·조(助)·추(追)·소자(小)·제(除)·노(老)가 그것.[5] 이러한 6등급의 나이 구분은 당시 당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던 정(丁)·중(中)·소(小)·황(黃)·노(老)의 연령구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당령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서 신라가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국가에 가장 중요한 연령층은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정(丁)이었다. 사학계에서 정의 연령하한은 16세였고, 상한은 57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가구를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경제력으로 나눴을 거 같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구보유로 나누었다고 한다.
  • 고대의 경제체제를 노비에 의존하는 체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노비의 수가 적다. 4개 촌을 다합쳐서 25명으로 총인구의 5.4%. 이처럼 미미한 노비의 비중은 당시의 농업사회에서 노비는 부차적인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즉 수도였던 경주에서 고위 귀족 따까리를 전담했다는 의미이다.
  • 4개 촌을 통틀어 남자 204명, 여자 258명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54명 많다. 특히 노동력의 핵심인 정의 연령층에서 여자가 44명이나 많다. 1가구당 1명이 병역의 의무를 져야했던 것을 감안해서 15명 정도가 변방으로 끌려가 병역의 의무를 하고 있었을 거라고 감안하더라도 여자가 30여 명이나 많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남자의 평균수명이 여자보다 짧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부역이 면제된 연령층으로 추측되는 제와 노 연령층은 4개 마을을 합쳐도 불과 12명이었다. 당시의 짧았던 평균 수명을 확인할 수 있는 일례인 셈. 민정문서에 언급된 바에 의하면 3년동안 정의 연령층에서만 13명의 사망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얼마나 당시 농민들이 부역에 시달리면서 생활 조건은 고달펐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 사망·이동 등의 인구수 변동 내용이 3년의 차이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3년마다 인구조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 인구조사도 5년에 한번인데 좀 부지런하네
  • 문서에 표시된 토지의 종류는 연수유답[6], 관모답[7] , 내시령답[8], 촌주위답[9], 마전[10] 등이 존재한다.

4 그 외

이 문서가 언제 작성됐는지를 놓고 695년·755년·815년·875년 등의 설이 있으며,[11] 이 중에서 815년 설이 그간 학계에서는 정설로 취급받았으나 요즘 들어 695년 설도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다만, 7차 교육과정 이후에서의 교과서에는 755년 작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민정문서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이견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연수유전·답 등으로 기록된 토지명을 놓고 신라시대의 토지제도와 토지 관념에 대해서도 꽤나 많은 떡밥을 던져주고 있다. 신라통일기 촌락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유일한 자료로서, 당시 신라의 사회정책과 일반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은 이 문서가 가지는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관련문서가 꼴랑 이거하나라서 연구자마다 해석이 제각각인게 함정

영국에도 비슷한 것으로 둠즈데이 북이 있다.
  1. 오늘날의 청주시
  2. 물론 이거 하나를 갖고 정확히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극단적인 예로 타워펠리스의 주민들 재산자료를 갖고 천년 후 사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사회구조를 파악한다고 생각해보자.
  3. 한자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름이 모촌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어서 모촌이라고 학계에서 부르는 것이다. 이름이 모촌이라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4. 사해점촌 만이 아니라 살하지촌과 모촌이 모두 다 ① 마을의 이름, ② 마을의 크기, ③ 호구 수, ④ 인구수, ⑤ 가축 수, ⑥ 토지, ⑦ 수목, ⑧ 호구의 감소, ⑨ 우마의 감소 ⑩ 수목의 감소 순으로 기록되어있다. 신라시대 문서작성법이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5. 조는 13세에서 15세, 추는 10세에서 12세, 소는 9세 이하, 제는 58세에서 59세, 노는 60세 이상으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6. 농민들이 호별로 경작하는 토지로 작성시기를 보아 통일신라 성덕왕 재위 중 주어진 정전으로 추정된다.
  7. 관청 경비 조달을 위해 설치한 사실상 관용토지.
  8. 내시령(통일 신라시대의 내성 관리직책)에게 할당된 관료전
  9. 촌주에게 할당된 토지
  10. 공동 경작지
  11. 60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60갑자 때문. 연대 추정이 어려운 고대 문서나 유물들도 갑자는 적혀있는 경우가 많기에 어느 정도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