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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부츠덴(大佛殿) | 크고 아름다운 도다이지 대불. 청동 불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
東大寺(동대사)
Tōdai-ji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하여 토다이지에서 도다이지로 표기.
1 개요
일본 나라 시에 위치한 절로,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이다. 한국에서는 동대사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다이부츠덴(大佛殿, 대불전)과 세계 최대의 청동 불상, 그리고 거대한 정문인 난다이몬(南大門, 남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역사
창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과 현재의 모습(아래)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로 유명한 다이부츠덴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다이부츠덴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기사
본래 도다이지는 쇼무 덴노가 쿠니(國)[1]마다 세운 고쿠분지(국분사國分寺)[2]의 수장으로 덴노 일족의 보살계를 수계하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쿠분지로서의 위상을 잃고 기능이 축소되었다. 원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의 양식이었으나[3] 후에 두 개의 거대한 목탑 등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현재는 다이부츠덴과 니가츠도와 산가츠도, 그리고 난다이몬 일대가 도다이지 경내이다. 과거의 위상은 다이부츠덴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에서 약간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다이부츠덴은 두 번의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고, 두 번째 화재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1567년에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다이부츠덴 안으로 몰려든 승려와 피난민이 2천명에 달했는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이들 모두 목숨을 잃었고 내부에 안치된 대불 또한 녹아내렸다.[4] 현재의 다이부츠덴은 1709년(호에이宝永 7년)에 재건된 3번째 금당이다. 현재의 다이부츠덴은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의 1/3 규모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해진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다이부츠덴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이름의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가 훼손되었다.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01m, 측면 50.48m, 높이 48.74m 로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5]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 번째 도다이지 다이부츠덴을 본떠서 약간 더 큰 호코지 다이부츠덴을 건립하였고, 이는 1592년에 지진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1610년에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하였으나, 1662년에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난다이몬과 다이부츠덴의 건축 양식은 <대불양식(다이부츠요)>으로, 각 시대마다 형태와 구조가 좀 다르며, 일본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시도된 양식이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수많은 보와 포로 겹겹히 연결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후대에 건립된 다이부츠덴은 일반적인 동양 전통 건축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보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방법까지 이루어졌다.[6] 난다이몬과 현재의 다이부츠덴은 구조나 양식이 다소 다르며, 헤이안 시대의 다이부츠덴을 추정할 때 주로 난다이몬의 구조를 참고하였다.
세 번째 대불전은 과거의 대불전에 비해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의 약 2000톤에 달하는 기와의 무게 때문에 지붕의 처마는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가 끝났지만, 그래도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다이부츠덴 정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목수가 그 시대에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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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의 다이부츠덴. 지붕 좌우 아래에 버팀목이 있다.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체 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많은 서양식 건축 재료와 공법이 사용되었다.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졌던 기둥들을 여러 개의 나무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기와의 수를 줄임으로써 지붕의 무게를 12% 감소시켰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전통의 외형을 보존하면서 안으로는 최신의 기술을 통해 혁신시켰다고 평가하며, 어떤 사람은 그저 잘 포장된 허구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2.1 대불전 안의 볼거리
다이부츠덴 안에는 높이 14.98m에 달하는 425t의 청동 비로자나불이 있다. 청동 대불 역시 여러 번 화재 등으로 부분이 녹거나 파괴되어 다시 제작되었지만, 상당한 크기기 때문에 일부분은 남아 이어져왔다. 현재의 대불은 1691년(겐로쿠元綠 4년)에 완성된 것으로,[7] 불상의 하부는 처음 만들어졌던 부분이 남아있다고 한다. 특히 불상이 올라타있는 연꽃 대좌에는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그름으로 새긴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대한 손바닥에는 어른이 16명이 올라갈 정도라고 한다.
그 외에도 대불의 좌우에 여의륜관음과 허공장보살을, 대불 뒷편으로는 광목천왕상과 다문천왕상을 모시고 있으며, 난다이몬에는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금강역사 입상이 2점 있다. 또 다이부츠덴의 명물로 구멍이 뚫린 기둥이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1년치 액땜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다들 시도해보지만... 아이나 몸이 작은 여자가 아니면 힘들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약간 과체중의 성인 남성도 통과할 수 있을정도의 크기이다. 조금 뚱뚱해보이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짓말처럼 쑤욱.. 까진 아니고 조금 힘들게나마 빠져나오긴 한다. 참고로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
대불전 앞마당에는 청동등이 하나 서 있는데, 대부분 모르고 지나가지만 이거 국보다(...) 도다이지에서 몇 안되는 나라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이다. 조각이 아름답고 글씨도 새겨져 있으니 유심히 보고 가자. 그 밖에 중문, 좌우 회랑, 대불전 좌우의 불상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국보들에 묻혀서 별로 빛은 못보지만...
3 쇼소인(정창원)
도다이지 북서쪽 약 300m 거리에 있는 오래된 창고. 한국에서는 정창원(正創院)이라고도 한다. 검은 통나무를 쌓아(귀틀식) 만들어졌으며, 건물 전체가 지면에서 높이 들어올려진 모습이 특이하다. 이는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고대에는 많은 건물들이 이런 식으로 지어졌다.
원래는 도다이사에 딸린 왕실 유물 창고로 지어졌는데, 창건연대는 (729~749)으로 추정된다. 원래 쇼소인이란 도다이지의 쇼소인 말고도 여러 절에 여러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도다이지에만 1동 남았다. 긴 건물이기 때문에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북창 중창 남창이라고 나눠진다. 756년에 쇼무왕이 죽자 왕비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숟가락을 비롯한 칼·거울·무기·목칠공예품·악기 등 600여 종의 애장품을 49재(齋)에 맞춰 헌납하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도다이지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궁내청 정창원관리소의 관리 하에 있다. 소장품은 1년에 한번 가을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선별적으로 볼 수 있으며, 건물은 궁내청 관리인의 지도 하에 멀리서 구경할 수 있다. 창고라해서 작을 것 같지만 거의 경회루만큼 크다.
역사가 굉장히 긴 왕실 유물창고로, 한국으로 치면 무려 삼국시대 시기의 유물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백제의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했다는 바둑판, 바둑알 등,[8] 삼국시대, 통일신라 대의 한국과 교류를 하면서 얻은 유물들도 다수 보관중이다. 아래에서 설명할 신라 민정문서도 이 곳에서 우연히 발굴되었다.
3.1 신라 민정문서
이 쇼소인이 한국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삼국시대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8~9세기 신라의 지방 통치에 관한 중요한 자료인 신라 민정문서[9]가 바로 이 쇼소인에서 발견된 것이다.
- 발견 경위 : 1950년대에 도다이지 쇼소인 중창 소장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손상되었었던 불경인 화엄경론(華嚴經論)의 표지를 수리하는 도중 그 안쪽에 붙였던 종이로 발견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불경은 긴 비단이며, 그것을 대나무 등으로 만든 책갑이라는 표지로 말아 보관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쉽게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신라 민정문서는 불경의 포장지로 쓰였던 것.
이에 대해 일본이 신라의 귀중한 문서를 빼앗아간 만행이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일본은 아주 오랫동안 불경을 한국에서 수입해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인들이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종이를 포장지로 덧댄 것이다. 종이를 제품의 포장지로 쓰는 것은 동양에서는 흔한 방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종이가 넘쳐나는 것은 아니니 이미 사용하고 난 후의 쓸모없는 종이를 활용하였는데, 아마도 시기가 지나서 쓸모가 없어진 민정문서를 가져다가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정문서란 것은 전국의 촌락을 몇 년 주기로 조사하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수천장씩 널려있는 그저 몇 년 지난 보고서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동사무소에서 통계 조사한 이면지로 포장한 것.
다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기록들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이 민정문서의 사료적 가치가 아주 높아졌다는 게 아이러니. 그리고 이 민정문서는 아무래도 일본 화엄경론의 일부였기 때문에 결국 촬영 후 원상태로 도로 붙여 두었고, 지금은 사진본으로만 볼 수 있다.
4 그 외
다이부츠덴 동쪽으로 올라가면 니가츠도(二月堂)와 산가츠도(三月堂)가 나온다. 니가츠도는 대불의 개안공양이 이루어진 752년부터 창건되었고, 십일면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 불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비불이다. 홋케도(법화당法華堂)이라고도 불리는 산가츠도는 도다이지의 전신가람인 긴쇼지의 견색당(羂索院)으로, 불공견색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그 외에도 범천, 제석천 등 16개에 달하는 불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일부는 도다이지뮤지엄이 개관하면서 옮겨졌다. 2014년 현재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 산가츠도로 옮겨졌다.
도다이지를 잘 모르는 방문자들은 다이부츠덴만 보고 나가버리는데, 니가츠도와 산가츠도도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므로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특히 니가츠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도다이지와 나라 시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전망대이기도 하다. 대불전 입장료는 500엔. 난다이몬 안에 있는 뮤지엄(박물관)과 통합 입장료는 800엔. 뮤지엄만 관람하려면 500엔. 니가츠도는 올라가 볼 수 있으며 따로 입장료는 없다. 산가츠도는 2013년까지 공사중이어서 폐쇄되어 있었으나, 현재 공사가 완료되었고 내부에 들어가 불상을 보려면 500엔을 내야 한다. 그 밖에 승려들이 계(戒)를 받던 가이단인(계단원)도 따로 5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사천왕상이 있으나, 건물 자체는 별로 큰 가치가 없으므로 불상에 관심있는 사람만 들어가보자.
그 외에 체험해 볼 만한 것으로, 난다이몬 밖은 나라 사슴공원으로 꽃사슴 패거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사람을 그리 경계하지도 않아서, 만져도 그리 싫어하지도 않는다. 이 사슴들에게 줄 수 있는 센베를 파는 곳도 많은데 10개 정도를 100엔 내외에 구입할 수 있는데,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면서 한없이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쳐다보던 사슴들이 사람 뜯어먹는 몬스터로 변하는 지옥도를 체험할 수 있다.[10] 여름철에 뿔이 돋은 사슴이 삐져서 들이받으면 상당히 아프므로 적당히 알아서 도망치자.
크기에서 비견될만한 건물로는 교토 히가시혼간지에 있는 고에이도가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일본의 불가사의로 나왔다.- ↑ 이름은 거창하게 나라지만 결국 당시 정권의 하위 행정단위일 뿐이었다.
- ↑ 일본 정권의 초기에 불교의 힘을 빌어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국립 사찰들
- ↑ 한국도 비슷한 통일신라시기에는 사천왕사나 불국사 등 2탑식이 유행하였다.
- ↑ 단, 그가 진짜 불을 질렀는지는 이견이 있다
- ↑ 높이가 46.4m라는 자료도 있는데, 아마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 치미가 낮았을 때의 높이 같다.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 다이부츠덴의 치미(지붕 제일 위의 양 끝에 붙어있는 큰 기와)가 금색의 높은 것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 ↑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방법
- ↑ 다만 몸과 손 등의 제작시기가 다르며 1691년에 완성된 것은 머리 부분이 다시 제작되어 나머지 부분과 합쳐진 시기이다
- ↑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 세트이다.
- ↑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
- ↑ 실제로 음식이 아닌 것도 주면 먹는다. 그래서 관광객이 주는 휴지 등을 먹거나 해서 병들어 죽는 사슴들이 꽤 있다고. 사실 안 줘도 종이류가 눈에 보이면 먹으려고 먼저 달려드는데, 예를 들면 자전거 바구니에 있는 나라 관광지도 같은 것도 빼앗아먹는다. 참고로 이 사슴들은 지폐도 보이면 먹으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