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반공학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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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벌인 반소-반공 시위.

1945년 11월 16일평안북도 용암포에서 열린 기독교 사회민주당의 지방대회에서 평북자치대 용암포 대표가 기념사를 통해 폐교 조치된 수산기술학교의 복구를 요구하고 공산당의 불법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이에 대해 소군정소련군공산당은 경금속 공장직공을 동원하여 기습, 평안교회 장로를 현장에서 죽이고 학생과 시민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격분한 신의주시 6개 중학교 학생들과, 부근의 5천여 명의 학생이 이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반소 반공을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으며, 공산당 본부, 인민위원회 본부, 보안서 등을 습격하였다. 이에 시위대를 향한 공산당의 보안대와 소련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23명의 학생이 피살됐고, 7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투옥됐다. 일부 기록에는 48~50명 사망이라고 하는데 어느 숫자가 맞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북한 당국이 실효지배 중인데다 시일마저 오래 되어 정확한 피해 인원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김일성은 진압이 완료된 1945년 11월 23일 오후 4시에 보고를 받고 강상호, 최용림, 전병호 등을 데리고 소련 군용 헬리콥터를 타고 신의주로 이동했다. 길거리가 온통 빨간 페이트칠이 되어 있는 것을 본 김일성이 마중나온 김일에게 "저 뼁끼(페인트) 자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김일이 소련군 직승기(헬리콥터)가 주모자들을 잡으려고 뿌린 뼁끼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김일성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미련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한다. 11월 24일 10시에 김일성은 신의주 동중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대해 연설을 하고 11월 25일 용암포를 들른 다음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검거된 학생 주모자들은 시베리아까지 끌려갔다가 6.25 전쟁이 끝난 다음에 북한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시베리아 복역 기간동안 학생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았다 한다. 사상개조가 철저히 이루어졌다고 판단된 사람만 출소되고 나머진 다시 북한의 교화소에 갇혔는데 당시 북한 교화소에는 주 1~2회 정도 사상개조 정치학습을 실시했다. 그런데 북한의 사회안정성 내부에는 그때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아는 사람이 없던 반면에 이들 학생들은 소련에서 복역하는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선 북한 말로 '뚝 떼고' 온 사람들이라서 교원들의 강습을 날카롭게 지적해서 교원들을 무척이나 고생시켰다 한다. 이후 1959년 이들은 18호 관리소로 옮겨졌고 그 이후로 거기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한국 민주화의 대부이자 퀘이커 신자인 함석헌 옹도, 이 사건에 '사상적 배후'로 지목당해 소군정에 의해 투옥당했다. 결국 그는 고향을 등지고 1947년 월남, 남한으로 넘어온다. 소련군 감옥으로 이송된 인사들도 상당하여, 결국 신의주 학생의거 관련 증언은 대부분 월남에 성공한 함석헌의 자서전 내용이 바탕이 된다.

한편 훗날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장도영도, 신의주에서 교편을 잡던 중 이 사건으로 인해 월남하여 군에 투신하게 된다.

한동안 이 사건은 남한의 반공교육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 반공정권 당시[1] 적극 국민학교 도덕 교과서에 1956년 헝가리 반소 시위와 함께 수록되기도 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11월 23일을 반공 학생의 날로 기념하였다.

교과서 그림은 M 계열 미국전차를 연상시키는 소련 전차군단에 수백명의 학생시위대가 돌진해서 집단으로 죽는 화보가 나왔다(...)

반대로 미군정 시절인 1946년에는 대구 10.1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이쪽은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한 명이 죽자, 시위대가 돌연 과격화되어 무장폭도로 돌변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당시 조선공산당에서 사건발발 이후 개입하여, 대구는 물론 왜관, 구미시 일대를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2]

2 관련 문서

(네이버 지식백과)신의주반공학생의거

3 관련 항목

[분류:사회운동]]
  1. 이미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으며, 장면 정권은 물론 이후 군사정권에서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2. 대구 10.1사건 발발 이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상당수가 멍때리고 있었고, 청년당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봉기에 참여했다고 한다.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보기엔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