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1 개요

朝鮮共産黨.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대한민국공산주의 정당.
당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 있다. 이 세 사람은 삼인당(三人黨), 트로이카라고 불리게 된다.

2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법'[1]으로 수 차례 탄압을 받아 해체와 재창당을 여러번 겪었다. 이 시기를 김재봉을 중심으로 한 1차 조선공산당, 강달영을 중심으로 한 2차 조선공산당,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3차 조선공산당, 차금봉을 중심으로 한 4차 조선공산당으로 나눈다. 하지만 내부분열이 만만치 않았으며,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를 비롯하여 여러 분파주의로 나뉘었기에(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서상파 등) 이들의 대립은 생각 이상으로 심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파벌 대립은 후에 김일성 에게 종파주의 숙청이라는 명분을 얹어주고 독재를 강화하는 빌미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925년 신의주 사건[2]을 전후로 조선공산당은 총독부 당국,경찰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 제 4차 조선공산당 검거가 벌어진 1928년 해산되었다.[3] 4차 공산당 검거 사건 이후에는 사실상 중앙위원이 궤멸되었으며, 코민테른[4] 의 권고에 따라 당을 재건하려는 공식적인 노력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을 배경으로 한 권영태 중심의 국제파와 이재유와 김삼룡, 이현상의 2차 트로이카와 함흥의 이주하를 중심으로 한 국내파가 다시 갈렸으며,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에는 1940년대에는 체포를 면한 이관술, 만기출소한 이현상, 국내로 귀환한 박헌영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기도 했었다.

3 해방 후 시기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5]가 출범하였는데, 1945년에 박헌영이 장안파를 해체[6]시키고 8월 24일 최종통합되어 '조선공산당'이라는 당명으로 재건되었다.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기 시기 초창기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아 처음에 온건 노선에서 군정청에 어느정도 협조하는 스탠스[7]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곧 이듬해 1946년 5월 중순. 서울 소공동의 근택빌딩(現 서울시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맞은편 부지에 위치해있다)에서 터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당시 미군정청에서 공산당이 위조지폐에 연관있다고 공산당을 불법화 시키고, 대대적인 공산당 간부 체포작업에 들어가자 조선공산당은 더욱 급진적 성향으로 흘러가게 된다.[8]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대중들로부터 부정적 여론[9]이 강해지면서 조선공산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중적인 정당으로 타개하기 위해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3당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되었다. 여기서 남로당 당內 주류,주도권을 쥐었던쪽이 조선공산당 출신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로당의 전신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4 관련인물

이쪽 관련 인물로는 박헌영-주세죽 부부, 조봉암-김조이 부부, 김단야-고명자 부부, 허정숙[10]-임원근 부부가 있다.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은 경성에서 신여성이자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가로 활약하여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리었는데, 주로 여성동우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 국가보안법의 원형이다.
  2. 신의주의 한 식당에서 친일파 변호사 박유정이라는 사람이 일제 경찰과 술퍼마시면서 고성을 벌이다가 같은곳에 별실에 있던 신만청년회원들이 시끄럽다며 그들에게 집단구타를 했는데, 문제는 이 청년들 가운데 한명이 '통쾌하다!'면서 팔에 소매를 걷었던것에서 시작된다. 그 자리에 그 청년의 팔에 붉은 완장을 찬 것이 발견된것이었다. 그자리에서 일제경찰의 의심을 사서 상부에 보고를하고, 총독부 일제 경찰 당국은 신만청년회 회원들 가택수색을 한 결과, 그 단체 가운데 회원 한명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이 상해의 조봉암에게 보내는 비밀문서'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버린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고려공산청년회)가 식민지 조선 국내에서 비밀리 조직되어 활동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사건이다.
  3. 4차 조선공산당 창립의 주역이던 차금봉이 검거당한것이 결정타였다. 1920년대 1~3차 조선공산당의 주요 핵심멤버들 상당수가 양반,지식인 계층 출신들이 이끌었던것과 달리 차금봉은 순수 노동자(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자 출신으로 최초로 정당의 책임비서가 된 인물'이다.
  4. 코민테른은 1928년 제6차 대회에서 이미 맛탱이가 가버린 상태였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는 기존의 국제연대 중심주의를 벗어나고 '스탈린주의'의 노선으로 확실히 바뀌어버린다.(...)
  5. 여기서 말하는 '재건파'는 1928년 일제경찰에 의해 해체당한 조선공산당을 의미한다.
  6.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김철수, 정백, 이영등이 주도해 서울 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결성했다해서 '장안파'라고 불렸다. 이 장안파는 강령,규약 및 당면목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을뿐더러 조직력면에서도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해 1928년 일제 경찰에 의해 해체된 조선공산당과의 계승관계가 불분명했다. 결국 결성 10여일만에 1945년 8월말, '재건파'의 해체요구에 의해 해산된다.
  7. 1946년 4월,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추모 1주기 행사를 주최할 정도로 최소 '미군정 체제에는 순응했던' 정도였다.
  8. 초창기 미군정에 온건한 노선으로 취했던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을 전후로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대중적인 투쟁'을 결의하면서 노동자,농민들을 선조하여 총파업에 맞서 대응했다.
  9. 정판사 사건 이전까지만해도 조선공산당은 대중들로부터 나름 지지도가 꽤나 광범위했었다.(일제강점기 시기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계열이 주류였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판사 사건으로 대중들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매우 나빠지기 시작한다. 관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략) 경남 하동군의 또 다른 농부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인민공화국과 공산당이 조선의 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왔다. 하지만 나는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듣고서 충격을 받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할복으로 사죄해야 한다.” (하략)
  10. 민족변호사 허헌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