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 전투 | ||
병자호란의 일부 | ||
날짜 | ||
1637년 1월28일(인조 15년 정축년 1월 3일) | ||
장소 | ||
경기도 광주시 쌍령 | ||
교전국 | 조선 | 청나라 |
지휘관 | 민영† 허완† 선약해† 윤여임† 신세강† 손종로† 백선남† | 패륵 약탁 |
결과 | ||
조선 육군의 대패 경상도 근왕병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음 | ||
영향 | ||
지휘부 전멸로 조선군 전의 상실 → 삼전도의 굴욕 | ||
병력 | 40,000명 | 불명[1] |
피해규모 | 부대 전멸 지휘관 전사 | 불명 |
1 개요
병자호란 때 있었던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과 더불어 조선군에게 치욕을 안겨준 전투이다. 대륙판 리얼 300
2 전개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북상한 경상도 속오군 4만명[2]은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에서 기병 위주의 청군과 마주치게 된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은 경상우병사 민영과 경상좌병사 허완이었으며 4만 군사의 대부분이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만씩 나누어서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쪽의 낮은 곳에 진을 쳤다. 다만 실제 전투에 참전한 인원은 8천으로, 이들은 선봉이었으며, 민영, 허완과 함께 폭사한다.
청군의 선봉 33명이 나무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지휘권도 없는 경상감사 심연의 종사관 도경유가 제멋대로 비장 박충겸을 참수하고 총포 사격을 명한다.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약해가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조선군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져 달아나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 이것으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탄약을 10발만 지급한 탓에[3] 다시 탄약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종사관 도경유에게 처형당한 비장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폭발사고를 일으켰다. 결국 탄약을 보급하던 수령 2명과 군사 수십이 폭사하고 조선군은 동요하게 된다. 이 때 청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총 한번 안 쏘고 무너졌고 민영도 죽어 버렸다.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청군의 규모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패잔병들의 대다수가 살아남긴 했으나 용인 전투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않고 개미떼처럼 흩어졌으며, 조선군은 이들을 다시 수습하여 반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이전에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3 평가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는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했다는 것인데, 이 때 등장하는 청나라 기병 300이 전투에 참여한 모든 청군 기병의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희박하다. 오히려 주변 정황[4]을 살피면 300명을 훨씬 초과할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에서는 이 전투에서 청군이 수천명이었다고 하였고, 신재호(필명)씨 또한 이러한 논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참조
어쨌든 몇 배나 많았던 병력으로 변변한 싸움도 못해보고 참패했고, 청군 본대가 참전하기도 전에 300명의 선발대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현장 지휘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알려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여담으로 근대 영국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속사를 추구하면서도 부사관에 의한 사격통제를 극도로 중시하였는데, 바로 위와 같이 좌군이 무너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적군이 다가오면 사람은 공포심이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고, 일단 옆에서 누군가 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경험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적군의 눈에서 흰자가 보이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사격을 참도록 훈련시켰으며, 부사관의 지시에 앞서 방아쇠를 당긴 병사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응징이 가해졌다. 비슷한 장면이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에서 나온다. 사실 전열보병전술이 극대화되려면 가혹한 군기와 통제가 필수이다
이순신 장군 또한 해전에서 멋대로의 포격을 감행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최소 참수형을 시행하였다. 군대에 있어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학자들은 이걸 흑역사로 여기는지 현행 검정 교과서에는 실려있지 않다. 칠천량 해전도 대패하긴 했으나 임진왜란 관련 약도에 짤막하게 실려있는게 보통인데, 병자호란 부분은 대략 어떤 전투들이(승전, 패전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는지 지도로 표기가 안되어 있다.- ↑ 최소 300명에서 수천. 총 병력에 대해선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군에게 큰 타격을 준 청군의 선발대는 300명이다.
- ↑ 다만 경상도 속오군만이 참가한 것은 아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 구원을 위해 북상했다가 험천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충청도 속오군이 합류해 싸웠다. 공식 편제대로라면 경상도 속오군은 총 2만 2448명, 1628년에 경상감사가 인조에게 보고한 병력은 2만 4천 명이다.
- ↑ 정확히는 탄약 2냥이었다고 한다. (남급본 병자일기 + 병자록의 기록.) 중세의 12사도를 감안하면 겨우 300기 상대하며 10발이 적게 지급한거라곤 볼 수 없다. 사격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적을 사살하지도 못한채 낭비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는 승전인 김화전투에서 유림이 철저한 사격통제로 청군이 10보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일제사격을 퍼부은 것과 크게 대비된다.
- ↑ 당시 청군을 이끈 지휘관 계급인 버일러는 6천~7천 5백 정도를 이끌었다는 점, 청군 기병이 4만 조선군에게 공포를 줄 정도로 장중히 포위를 하고 퇴로 차단을 할 정도로 여유 병력이 있었다는 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