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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尾事件. 국전승객폭동(国電乗客暴動)으로도 불리운다.
말 그대로 승객들이 뿔났다로 해석가능. 시민들이 빡치면 그야말로 헬게이트를 열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1973년 3월 13일 화요일(그러니깐 JR이 아닌 JNR시대에), 국철노조가 진행하던 준법시위에 이용자들의 불만이 폭발, 아게오역에서 승객 폭동을 일으킨 전무후무한 사건.
당시 국철은 공기업이라 법률상 노조쟁의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에 노조원들이 시작한 준법투쟁 과정에서 승객들을 돌보지 않고 무작정 시위를 강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가 베이비붐 시대였던 만큼 통근/통학을 위한 철도 승객이 많이 늘어났으나 정작 직원들이 시위를 하느라 열차 배차 간격이 제멋대로였고, 국철이 운영하던 모든 노선은 하나같이 지옥철 그 이상이었다.
특급 열차도 완행 열차[1]로 운행되었을 정도로 엉망인 상황에서 이날, 개찰거부와 운행정지가 연속되자 아게오역에서 시민들이 멈춘 열차에 투석을 한 것으로 시작됐다. 당시 열차를 몰던 기관사는 열차 앞문을 통해서 탈출하였으나 소란은 역 전체로 확대, 역원들까지 도망치고 역장은 붙들려 집단 린치를 당했다.
사태는 역 시설물의 파괴와 방화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고 국철이 마비되자 인근 역의 시민들까지 폭동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당시 관할 경찰이던 사이타마 경찰이 550명이나 출동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몇천 내지 몇만 명의 군중을 진압하기란 불가능했다.
사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민들이 자진 해산하는 형태로 마무리 되었으나, 이후 아게오 역과 관련된 노선의 운행이 며칠동안 중단되는 바람에 철길을 걸어가서 통근/통학을 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총 7명이 검거가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혼란한 틈을 노려 금품을 훔친 사람, 기자를 폭행한 사람 뿐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국철노조의 시위는 중지되지 않았고[2] 결국 한 달 후 "수도권 국전 폭동"으로 스케일 업된 시민 폭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오늘날의 JR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사건 발생의 원인이었던 국철노조와 타카사키선의 혼잡으로 요약 가능한데, 국철노조는 JR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타카사키선의 혼잡 역시 바이패스 역할을 하는 사이쿄선이 개통되어 승객이 분산되고 조에츠 신칸센과 호쿠리쿠 신칸센 오미야-나가노 구간 [3] 개업으로 인한 장거리 재래선 열차 숙청으로 선로 용량에 숨통이 트이면서 아게오사건 발생 당시보다는 많이 완회되었다.
일본은 60~70년대 대규모 좌익운동 이후로는 거의 대규모 시위가 없고 얌전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저 정도의 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당시 사건을 다룬 뉴스 영상. 나중에 터진 수도권국전폭동도 함께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