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먼터무

청의 역대 황제
시조 부쿠리용숀조조 원황제 먼터무순황제 충샨
묘호조조(肇祖)
시호원황제(原皇帝)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愛新覺羅 童-猛哥帖木耳, 애신각라 동맹가첩목아)
생몰기간1370년 ~ 1433년
재위기간1405년 ~ 1433년[1]

(1370년 ~ 1433년)

건주 여진 오돌리족의 추장. 오도리(오돌리)만호부의 만호이자 초대 건주좌위지휘사로 누르하치의 6대조. 묘호는 조조(肇祖), 시호는 원황제(原皇帝).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먼터무'를 음차한 표기인 맹특목(孟特穆),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등으로도 나타난다. 용비어천가에는 중세 한국어로 '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협온맹가첩목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략이 있었고 조상의 원수의 자손 40여 인을 계략으로 오타리의 서쪽에서 1500여 리 정도 떨어진 소소하 호란합달 산 아래의 흑도아라로 유인해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생포해 원수를 갚았으며, 생포한 자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고 먼터무는 백두산 북쪽인 흑도아라에 거주했다. 세력을 크게 회복해 아구(阿古), 충샨(充善) 등의 자식을 얻었으며, 남하해 회령 지역에 거주했다.

태조 때 경성등처만호 직사에 임명되었고 토산물을 바치거나 물건을 하사받았으며, 태종 때 1404년에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1405년에 명나라에서 회유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그대로 조선을 섬기기로 했다. 1411년에 풍주로 가서 훌리가이부와 합류하고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했으며, 건주좌위지휘사에 임명되고 동(童)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 일로 인해 태종이 여진과의 무역을 중지하고 모린위를 공격하자 먼터무는 경원을 약탈했으며, 결국 조선과의 전투 끝에 화의를 요청해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 1411년에 조선의 공격을 우려해 개원로 봉주로 옮기다가 1423년에 여진족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자 조선에 요청해 회령으로 돌아왔으며, 1431년에 아들을 보내 볼모로 삼으라 했지만 먼터무가 명의 관직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세종이 거절했다.

1433년에 양무타우를 수령으로 한 칠성 야인의 난이 일어나면서 알목하가 침략당하자 살해당했다.

여담으로, 기록에 의하면 이지란과 6촌 형제 사이라고 한다.

대왕 세종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동맹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 건주여진 추장 재위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