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1914?)
미국의 작가, 저널리스트.
1842년 오하이오주의 마익스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특이하게 그의 아버지는 13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자녀들의 이름을 모두 A로 시작하는 단어로 지었다. 앰브로스는 10번째로 태어난 아이었는데 앰브로스가 악마의 사전에서 보여준 언어유희적인 센스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걸지도.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입대해 웨스트 버지니아 전역에 투입되었다. 필리피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투에서 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고 전투지도를 만드는 부대에 배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로 전투에서 무서운 경험을 했고 이것이 후에 그의 몇 단편소설들에서 소재로 채용되기도 했다. 케네소산 전투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은뒤 한동안 휴가를 받았다가 1865년 1월에 제대했다. 이때 동전 던지기를 하여 작가를 하느냐, 군인을 하느냐 선택을 해서 작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전에 세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언론가로서 1887년 미국의 언론왕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가 운영하던 신문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철도회사 유니온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이 정부에 3억달러의 추가대출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고 그외에도 독설가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때로 독설 때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암살당한 1900년 주지사 괴벨의 암살에 대해서 지은 시중의 일부 대목에서 뜬금없이 당시 대통령이던 윌리엄 매킨리를 물고 늘어졌다가 윌리엄 매킨리가 1년 뒤에 암살당하자 이 시가 맹비난을 받았고 결국 허스트는 앰브로스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허스트의 정적들이 트집을 잡은 결과도 컸지만.
작가로서 그는 풍자적인 면에선 조너선 스위프트를, 공포와 그로테스크적인 면에서는 에드가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았다. 남북전쟁 때 참여했던 전투에서 보고 들은 처참한 상황들을 바탕으로 공포와 그로테스크가 어울어진 몇편의 걸작 단편소설들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아울 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이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악마의 사전으로 본래는 신문에 "냉소주의자 사전"으로 연재했던걸 모아서 악마의 사전으로 제목을 바꿔 출판했다. 앰브로스 자신도 악마의 사전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지 1909년에 출판된 그의 전집에서 제7권을 통째로 악마의 사전에 할애하고 있다.
1913년, 칠순이 넘은 나이에 남북전쟁때 자신이 참여했던 전장터를 둘러보다가 내친김에 혁명바람이 불던 멕시코로 넘어갔다. 거기서 판초 비야의 군대에 옵저버로 들어갔고 티에라 비앙카 전투에도 참여했고, 치와와 주의 주도 치와와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는 판초 비야군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 되지만 치와와에 도착하기 직전인 1913년 12월 26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마지막으로 그의 행방은 묘연해져버렸다. 시에라 모자다의 코아후일라라는 마을에서 스파이 혐의로 총살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판초 비야가 앰브로스를 중요한 인물로 취급했기 때문에 총살했을거라는 주장은 말도 안된다고 지적한다. 대체적인 견해는 전투중에 전사했거나 혹은 이미 멕시코로 가기전에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천식의 악화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기에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작가의 실종으로 꼽힌다.
헐리우드 영화 올드 그링고(1989)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비어스를 연기하여 이 시기를 상상하여 만들었는데, 혁명군 간부에게 총맞아 죽는다.
크툴루 신화는 앰브로스의 악마의 사전에 나온 단어나 개념을 일부 이용하고 있고 또한 공포와 그로테스크라는 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