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 (1941) CITIZEN KANE |
감독 | 오슨 웰스 |
각본 | 오슨 웰스 |
출연 | 오슨 웰스, 조셉 코튼, 조지 클루리스, 도로시 커밍고어, 에버릿 슬론, 루스 워릭, 윌리엄 알랜드등 |
장르 | 드라마, 느와르[1] |
촬영 | 그렉 톨랜드 |
음악 | 버나드 허먼 |
개봉일 | 1941년 5월 1일 |
상영 시간 | 119분 |
제작사 | RKO 라디오 픽처스, 머큐리 프로덕션 |
배급사 | RKO 라디오 픽처스 |
국내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게임의 규칙〉과 함께 현대 영화에서 가장 선구적인 작품
영화사에 남을 기적 같은 작품, 걸작의 수준을 뛰어넘는 작품[3]ㅡ 로저 이버트
1 개요
1997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 100대 영화 선정 1위, 2007년 재선정도 1위
모던 영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오슨 웰스의 1941년 영화. 20세기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며, 현대에서도 명작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언급되는 영화이다. 겨우 25세이던 웰스는 여기서 제작, 연출, 주연을 혼자 도맡았다.[4]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데뷔작이었다는 것.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자길 모델로 케인이란 인물을 만들었다고 여겨 온갖 방해를 놓았고, 영화는 당시 흥행에선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4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작품상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원제: How green was my valley) 에게 돌아갔다. 〈시민 케인〉은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갔으나 각본상만을 수상하는 데 그쳤는데,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이는 최악의 아카데미 시상식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5]
그렇게 영화도 잊혀지나 싶었으나, 4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개봉년도와 '최고의 영화'라는 별명 때문에 낡고 졸린 영화라 생각하기 쉽지만, 저작권이 끝난 지금에 봐도 세련되고 재미있는 영화다. 웹상에서 정식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VOD도 있어 관람하기 쉽다.
기묘하게도, 오슨 웰스는 1985년 10월 10일 영화상의 케인처럼 딱 70살로 세상을 떠났다.
전설적인 영화음악가 버나드 허먼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하다.
2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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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의 〈시민 케인〉 스토리 설명은 네이버 영화에서 발췌했다.
1940년 뉴욕 인 콰이어러지를 비롯, 수많은 신문들의 발행인이었던 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ter Kane: 오슨 웰스 분)이 죽는다. 그는 당시 70세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으나 죽음 직전에는 플로리다의 대저택 제나두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케인은 생전에 많은 정치인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고, 미국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여러 얘기들에 대해 케인은 "나는 현재 미국인이고 과거에도 미국인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미국인일 것이다."라고 말로 일축하곤 했다.
잡지 편집장인 록스턴은 케인의 죽음 내면의 것을 취재하고자 기자인 제리 톰슨(Jerry Thompson: 윌리엄 올런드 분)에게 케인이 죽기 전에 말했다는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오라고 한다. 톰슨은 케인의 주변 인물을 샅샅이 취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한다.
찰스 포스터 케인은 1862년, 콜로라도 리틀세일럼에서 태어났다. 케인의 집에 있던 하숙생이 준 쓸모없는 광산에서 노다지가 쏟아져, 케인 가족은 벼락부자가 된다. 케인의 어머니 메리(애그니스 무어헤드 분)는 콜로라도 깡촌에서 자라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 동부에 거주하는 재력가 월터 파크스 새처(조지 컬러리스 분)에게 어린 케인과 광산 운영권과 수익을 맡긴다.[6] 이때 케인은 가기 싫어서 저항을 하지만 끌려간다. 동부의 재력가 밑에서 성장한 케인(버디 스완 분)은 25살이 되었을 때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뉴욕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한다. 처음 신문 발행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해나가겠다는 케인의 야심찬 선언이 실리고, 폭로 기사들로 인콰이어러지는 발행부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1900년, 케인은 대통령의 질녀인 에밀리 노턴(Emily Norton: 루스 워릭 분)과 결혼하고 아들 찰스 주니어가 태어난다. 그러나 케인은 미모의 여가수 수전 알렉산더(Susan Alexander: 도러시 코밍고어 분)와 사랑에 빠진다. 선거에 나선 케인은 부정한 애정 행각(스캔들)이 발각돼 낙선한다. 그후 케인은 아내와 이혼하고, 1918년에는 에밀리와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케인은 수전과 결혼하고 수전을 가수로 데뷔시키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케인은 수전에게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종용하지만 수전의 자살 소동으로 그만 둔다. 1929년에는 케인의 신문사 중 가장 중요한 신문사가 문을 닫는다. 1932년 수전도 떠나고 케인은 극도로 난폭해진다. 더 이상 누구도 케인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케인은 결국 홀로 숨을 거둔다.
이상의 기사 작성 과정에서 톰슨은 끝까지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단지 같은 인간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케인 때문에 슬픔만을 느낄 뿐이었다. 이제 쓸모없게 된 케인의 물건들이 불 속에 던져진다. 그 중 하나는 케인이 어린 시절 즐겨 타던 썰매였다. 그 썰매에는 로즈버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바로 그 썰매의 이름이 로즈버드였던 것이다.
3 제작 비화
오슨 웰스가 촬영 전에 〈역마차〉를 약 40번 넘게 보며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달 동안 매일 저녁을 먹은 후, 극장을 찾아가 〈역마차〉를 보았다.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됐지?', '왜 이렇게 됐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학교 가는 일과 같았다.
ㅡ 오슨 웰스 출처
감독 오슨 웰스는 케인 역의 젊은 시절부터 70대 노년의 모습까지 연기를 모두 맡았는데, 자연스러운 모습을 위해 분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모리스 시더먼은 웰스의 얼굴 전체를 본 따서 연구했다고. 얼굴 본을 뜨는 동안 소설 〈악의 제국〉을 다른 스태프에게 읽게 시켜 웰스에게 들려줬다고 한다.[7]
젊은 시절의 경우, 오슨 웰스가 25살일 때 찍은 영화이긴 하지만 한층 풋풋하고 어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볼살 부분을 뒤로 잡아당겼다고 한다. 노년의 경우에는 콘택트 렌즈를 이용해 흐릿한 빛의 눈을 만드는 등 섬세하게 표현했다.
웰스는 다른 장면을 찍을 때는 케인의 첫 부인 에밀리 역을 맡은 루스 워릭에게 이것 저것 디테일한 주문을 많이 했지만, 영화학도들이 한번쯤 공부하고 넘어가는 그 유명한 아침식사 장면에서는 별 주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웰스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에서는 세월이 흐르면서 에밀리와 달리 괴물로 변해가는 케인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워릭이 연기한 에밀리의 초반 느낌 그대로 가주길 바랬기 때문에 이 씬을 찍을 때는 크게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다.[8]
에밀리 역을 맡은 루스 워릭의 말에 따르면 오슨 웰스는 워릭에게는 젠틀하게 대했지만, 수전 역을 맡은 도러시 커밍고어는 배우들과 스탭진 앞에서 공공연히 모욕을 주는 등 안 좋게 대우했다고 한다. 워릭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웰스에게 왜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느냐고 묻자, 웰즈는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를 진심으로 증오해야한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워릭이 "감정 연기를 위해서 배우가 진짜로 학대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자 웰스는 "그녀는 배우가 아니라, 수전 알렉산더 그 자체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그녀가 맡은 역처럼 살아갈 것[9]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0] 오슨 웰스가 커밍고어에게 한 처우가 도덕적으로 옳으나 그르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째든 영화 후반부 수전이 케인을 독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연기가 놀랍도록 생생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웰즈는 원래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을 영화화하려고 했는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그리고 대신 만든 것이 이 〈시민 케인〉이다. 참고로, 소설 《어둠의 심연》은 후대 감독에 의해 끝내 영화화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지옥의 묵시록〉.
4 평가와 해설
영화 〈시민 케인〉이 왜 훌륭한진 3시간도 넘게 말할 수 있습니다.[11]ㅡ 이동진
〈시민 케인〉은 공식적인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입니다. 세계 영화사를 정리하려는 어떤 리스트도 〈시민 케인〉을 빼면 완전치 못합니다. 앞으로 어떤 영화들이 나오더라도, 〈시민 케인〉이 달고 있는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배지를 쉽게 빼앗지는 못할 겁니다.ㅡ 듀나
예술은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도 중요하기에, 이 문서에는 도움이 될 만한 평가와 해설만 골라 짧게 기술한다.
4.1 왜 훌륭한가?
'최고의 영화'라 불리는 만큼, '왜 훌륭한가?'에 대한 답도 평자마다 다양하다.
주되게 거론되는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문법의 종합과 강렬한 시각성. 당시 절정을 향하던 몽타주와 미장센 기술을 〈시민 케인〉은 최적의 조합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미장센은 딥 포커스라는 신기술과 거울 이미지의 활용으로 그 가능성을 드넓혔다. 표현주의 세트와 리얼리즘 조명을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만든 것 또한 극찬받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민 케인〉의 세계는 리얼하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톰슨 기자는 내내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첫 신문 발행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하겠다는 선언에 젊은 케인이 서명할 때, 역시나 케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12] 거울과 창문을 사용하여 한 화면 안에서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이 많다. 이 또한 미장센의 예시가 될 수 있다. 화면과 분리된 소리는 몽타주 이론의 응용이 된다.
둘째, 혁신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 시간순의 진행을 깨뜨리고 사건을 뒤섞어 놓았으며,[13] 이를 추리와 심리를 기준으로 정렬해 영화 스토리텔링의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로즈버드'라는 핵심 소재로 관객에게 관심을 유도하는 방식, 종국에 그 로즈버드의 정체를 몰래 드러냄으로써 관객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 또한 호평받는 점이다.
그래도 〈시민 케인〉이 왜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자신만의 견해가 필요할 것이다.
〈시민 케인〉을 잘 보기 위해서는 리뷰를 찾는 대신 이 영화를 백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14]
ㅡ 정성일 #
4.2 비판
일각에선 과대평가됐다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주류 평단 내에서도 동일한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다만, 이 영화에 대한 것으로 비판이 나오는 것이지, 오슨 웰즈에 대한 찬사는 여전하다.
박찬욱은 저서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다음과 같이 〈시민 케인〉을 비판했다.
과잉된 테크닉으로 점철된 영화로,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대평가된 작품이다. 적어도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오슨 웰즈의 다른 작품들이 훨씬 훌륭하다 - 박찬욱
많은 평론가들도 박찬욱과 동일한 이유에서 〈시민 케인〉이 과대평가되었다고 본다.
감독인 오슨 웰스보다 촬영감독인 그렉 톨랜드의 공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그렉 톨랜드(1904~1948)는 존 포드와 같은 감독과 작업하며 촬영기술을 익혀왔고, 〈시민 케인〉에서 촬영술의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영화 촬영 당시, 초보감독이었던 오슨 웰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 그렉 톨랜드였기에, 일각에선 두 사람의 '공동연출'이라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15]
몽타주와 미장센 등, 1940년대까지 나온 모든 영화 언어를 총망라했으나, 〈시민 케인〉 속 기법들은 당대 영화들에서도 사골 우려먹듯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참신함과 혁신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엔 오슨 웰스 전문 연구자들도 〈시민 케인〉보다는, 〈악의 손길〉이나 〈위대한 엠버슨가〉를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인지, BFI(영국영화연구소)에서 10년마다 실시하고 '사이트 앤 사운드'지에서 발표하는 '최고의 영화' 투표에서, 지난 50년의 1위 자리를 〈현기증〉에게 내주고 2위로 내려왔다. 지속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전세계 투표 결과에 반영된 셈. 2012년 투표 결과 그럼에도 2위라는 점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시민 케인의 위엄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실제 BFI 선정 위대한 영화 순위에서 시민 케인은 첫 투표였던 1952년 자전거 도둑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이후 1962년부터 줄곧 1위를 고수하다가 이번에 다시 2위로 내려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개봉 당시에 이 영화를 혹평했는데, 그의 실존주의 사상과 맞지 않아 혹평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앙드레 바쟁한테 역관광당했다
5 그 밖에
워낙 전설적인 작품이다보니, 어느 분야의 작품에 대해 극찬할 때 "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 봉준호는 〈하녀〉를 두고 한국 영화계의 〈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는 영화 〈더 룸〉을 두고 못 만든 영화계의 〈시민 케인〉이라는 평을 내렸다(...)
- 배철수는 비틀즈의 명반 페퍼상사에 대해, '영화계에 시민 케인이 있다면, 대중음악계에는 페퍼상사가 있다'고 표현했다.
- 게임계에서는 2013년 GOTY를 휩쓸며 당대 명작게임의 반열에 오른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 대해서 영화잡지 엠파이어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너티 독이 지금까지 만든 게임들 중 가장 빼어날 뿐만 아니라 아주 강력한 현세대 콘솔 최고의 게임 후보로, 이는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 시민 케인에 비견될 순간일지도 모르며 수십 년간 회자될 걸작으로 남을 수도 있다."라는 평을 남긴 바 있다.
'AFI 선정 100대 영화'에서도 이견이 없는 1위로 꼽혔다.
미국 애니메이션들에서도 패러디(?)되기도 했는데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고스트 버스터즈〉에서는 전설적인 부자가 죽은 성에 그의 유령이 나와 애절하게 "로즈버드"[16]라고만 말하며 성을 방황하는데 이 유령을 잡으려는 주인공 이곤 일행이 레이저총을 쏘다가 성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일행이 창고를 박살내면서 온갖 창고 안 물건들이 바깥으로 쏟아진다. 이 와중에 이들도 성 바깥 비탈길로 떨어진다.그 중 윈스턴이 구르다가 우연히 자신이 깔고 내려가던 낡은 썰매를 보는데 이 썰매에 로즈버드(장미봉오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모두에게 말하는데 그 소리를 들은 유령이 다가와서 썰매를 타며 좋아하면서 성불하는 줄거리였다. 국내 방영 당시에는 〈시민 케인〉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한국에선 대체 뭔 내용인지 모를 이들이 많았을 듯하다.
타이니 툰에서는 몬타나 맥스를 케인 역으로 대입한 패러디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로즈버드'는 자전거 제조회사인 애크미로 나온다.
〈심슨 가족〉에서는 번즈를 케인에 비유하여 한 에피소드를 만들었는데, '로즈버드'가 '테디베어'로, 어린 케인이 부모님과 헤어질 때 원작에서는 가기 싫다고 반항(?)한 것과 달리 심슨에서 번즈는 자기가 나온다고 한다.(...)
심즈에서의 돈 치트키가 rosebud이다. 심즈라는 게임의 특성상 돈 치트키를 쓰면 심의 인생은 부유해질 지언정 게임의 참 재미, 참 의미가 크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대단히 적절한 치트키 이름이라고 하겠다.
〈인셉션〉에서 피셔의 바람개비는 로즈버드의 노골적인 오마주.
울펜슈타인 3D에서 에피소드6 보스인 페트게지히트 장군은 사망시 로즈버드를 독일어로 말한다. (Roseknospe)
파일:Attachment/applausegif.gif
인터넷에서 간간히 보이는 이 움짤도 〈시민 케인〉에서 나온 장면이다. 케인이 수전의 공연을 보면서 씁쓸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억지로 공연을 향해 박수치는 장면이다. 움짤이라고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문제없이 쓰일 수 있는 영화의 완성도를 간단히 엿볼 수 있는 부분.
- ↑ 《할리우드 장르》의 저자로 유명한, 토머스 샤츠의 장르 분류
- ↑ 프랑스 평론가. 카예 뒤 시네마에서 활동하며 누벨바그 감독들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 ↑ 저서 〈위대한 영화〉에서 〈시민 케인〉을 소개하며 한 말.
- ↑ 이 때문에 제작, 연출, 주연을 혼자 도맡은 작품인 에드 우드의 〈글렌 혹은 글렌다〉나 토미 웨소의 〈더 룸〉이 여기에 비유되곤 한다. 물론 이 쪽은 못 만든 영화계의 〈시민 케인〉으로서.
- ↑ 허나 21세기 들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어, '최악'이라는 평가는 희미해지고 있다.
- ↑ 그 재력가는 그 수익금으로 케인에게 상류층 삶을 누리게 해주고, 케인이 성장하면 케인에게 광산 소유권과 수익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 ↑ 출처: 〈시민 케인〉 다큐멘터리 It's All True
- ↑ 1981년도 인터뷰 中
- ↑ 실제로 영화 이후의 도러시 커밍고어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1951년 공산당과의 관계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 탓에 그 해에 찍은 영화가 그녀의 마지막 영화 작품이었고, 52년도에 TV 드라마 두어 개에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경력은 끝이 났다. 또한 그녀의 사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며 첫 결혼 생활에 실패했고, 이혼 과정에서 양육권을 전 남편이 가져갔다. 이 후 할리우드 지역에서 성매매죄로 체포되기도 했으며 결국 58세의 나이에 폐질환으로 사망한다.
- ↑ 출처는 http://www.tcm.com/this-month/article/71618%7C71643/Behind-the-Camera.html.
- ↑ 벨벳 골드마인 시네마톡 중, 〈시민 케인〉이 끼친 영향을 설명하며 한 말.
- ↑ 이와 같은 빛과 그림자의 활용, 수평보다 수직성을 강조하는 앵글 때문에, 평론가들은 〈시민 케인〉을 '느와르'로 분류한다.
- ↑ 〈펄프 픽션〉이나 〈메멘토〉와 같은 영화가 이 방식을 사용한다.
- ↑ 단, 이 발언은 영화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중시한다며, 20세기 영화의 예시로 〈시민 케인〉을 언급한 것이다.
- ↑ 오슨 웰스는 톨랜드의 가르침에 보답하고자, 영화 크레딧에 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만큼 크게 박아넣었다.
- ↑ 국내 방영판에선 장미봉오리라고 애절하게 말하는데 유령 성우가 바로 김기현.
- ↑ 세 명 중 한 명은 스노모빌로 이스마엘을 치여 죽이고 지하의 명계로 추락해 사망하고 한 명은 쇼거스한테 잡아먹히고, 한 명은 미쳐서 테켈리리라는 말밖에 못하는데 주변인들은 그걸 타이거릴리라고 알아듣는, 여러모로 안습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