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

1 涼茂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신하로 자는 백방(伯方), 산양군 창읍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논의할 경우에는 항상 경전에 근거를 두어 옳고 그름을 처리한 전형적인 유학자로 높은 성적으로 시어사가 되고 이어서 조조의 초빙으로 사공의 속관이 되었다.

후에 태산에 도적이 많아 양무는 태산태수에 임명되니 10개월이 지나 땅이 평온해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다니는 자가 천여 가구나 되었다고 하니 지방관으로도 합격점. 그리고 그는 뒤이어 낙랑태수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요동의 공손도가 양무를 멋대로 억류해 부임하지 못하게 했음에도 양무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는데, 이 당시 공손도와 양무와의 대화가 있다.

공손도는 양무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조조가 멀리 정벌을 나가고 업성은 수비가 없다고 들었소. 지금 내가 보병 3만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곧바로 업성에 이르면, 누가 제지 할 수 있겠소?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공손도가 돌아보다가 다시 양무에게 말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양무가 대답했다.

최근에 사해 안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국가가 쓰러지려고 할 때, 장군께서는 10만의 무리를 끼고 편안히 앉아서 성공과 실패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된 자는 진실로 이와 같을 뿐입니다. 조공(조조)은 국가의 위기와 패망을 근심하고 백성들의 고통과 해독을 위로해 주었으며, 의병을 이끌고 천하를 위하여 잔적을 주살하였으니, 공은 높고 덕망은 넓어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리하여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며, 백성들은 편안히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장군의 죄상을 아직 책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장군께서 곧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조공을 침공한다면 살고 죽는 결과는 하루아침도 못되어 결정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스스로를 위하십시오.

여러 장수들은 양무의 말을 듣고 모두 술렁거렸다. 한참 있다가 공손도가 말했다.

양군의 말이 옳다.

결국 양무로 인해 공손도는 한동안 조조 편에 선다.

이렇게 얘기해 양무는 무사히 돌아오는 것에 성공해 위군태수, 감릉의 상으로 임명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업적을 세웠고 211년 조비가 오관장이 될 때 양무는 임용되어 오관중장사가 되고 이어 좌군사로 전임된다.[1] 213년 5월에 좌군사를 지낼 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조조를 위공으로 봉하는 것을 찬동했고 11월에는 상서복야로 승진[2]했으며, 나중에는 중위, 봉상이 되었다.

217년에 조비가 태자로 임명되자 양무는 태자태부가 되어 존경과 예우를 크게 받았으나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뒷자리는 하기가 잇는다.

진수가 평하길 양무는 국연과 함께 원환, 병원, 장범 다음으로 현명한 신하라고 평했다.

삼국시대에는 양무장군, 양무중랑장이라는 직위와 양무라는 지명도 있으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楊茂

백제 동성왕 때의 장군 겸 외교가이다. 490년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남제의 무제로부터 건위장군 광릉태수에 임명되었다.
  1. 그가 좌군사로 가면서 오관중장사의 후임은 병원이 된다.
  2. 상서대의 차관으로 천자와 조신들 간의 문서를 거둬 조정 회의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