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환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래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고리의 또 다른 이름 -
  •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 - 원한
  •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개념 - 원환의 이치

袁渙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로 원패의 사촌형, 원민의 형, 원간, 원우, 원오, 원준의 아버지로 자는 요경(曜卿). 진군의 부락현 사람으로 아버지 원방은 한나라에서 사도를 지냈으며, 사촌 동생으로는 원패, 조카로 원량이 있다.

어렸을 때 주위의 세도가의 자제들이 모두 법을 지키지 않아 자신들의 뜻대로 지냈는데, 원환은 청아하고 고요한 태도를 지키면서 반드시 예법에 따른 것으로 이름이 높아 군에서 그를 공조로 삼았다. 간사한 관리들이 모두 스스로 사직한 다음에 떠날 정도였으며, 후에 공부로 불려가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추천되어 시어사로 승진했다가 초현의 현령으로 제수되지만 받지 않았다.

196년에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자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장강과 회하 지방에서 환란을 피하고 후에 원술에게 다시 임용되었으며, 원환이 언제나 정론을 펼쳤기 때문에 원술은 그를 공경했다.

부릉에서 일어난 원술과 여포와의 전투에서 원술군이 패할 때 여포에게 포로로 잡혀 여포를 섬기게 되었으며, 후에 여포와 유비의 사이가 나빠지자 여포는 원환을 시켜 유비를 비방하는 편지를 쓰게 했지만 한사코 거부했다. 결국 화가 난 여포가 자신의 무기를 원환에게 들이대면서 안 하면 죽이겠다고 하자 원환이 말했다.

나 원환은 덕망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욕하는 것으로써 치욕을 느끼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만일 유비가 정말로 군자라면 장군의 말에 치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유비가 소인이라면 장차 장군의 행동에 대해 보복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치욕은 이쪽에 있는 것이지, 그 쪽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하물며 나 원환이 다른 날 유비군을 섬겼던 것은 마치 오늘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요. 만일 내가 하루 아침에 이곳을 떠나 장군을 욕하면 괜찮겠소?

이 말을 들은 여포는 결국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뭐라고 여포가 반성을 해?!

198년에 여포가 조조에게 토벌당하자 원환 또한 조조에게 항복했는데, 진규 부자 등 여포군에 있다가 항복한 다른 자들은 모두 조조에게 배례를 했지만 원환은 가볍게 읍만 할 뿐 예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또한 조조가 여포의 군중에 있던 물자를 수레를 가지고 와서 가져가라고 했는데, 다른 자들이 모두 수레 가득 귀중품을 챙겨갈 때 원환은 수백 권의 책과 자신의 양식만을 챙기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 했다.

원환이 이 때

만약 내가 군대의 출진에 참여하여 종군하게 된다면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양식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나의 소유로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이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에 크게 후회스럽고 한탄한다.

라고 말하자 조조는 그 후에 원환을 더욱 중용했다.

그는 인의주의자로 조조에게 언제나 그와 관련된 진언을 해 패의 남북도위로 임명됐을 때 둔전이 싫어 백성들이 도망가자 싫어하는 백성들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조조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이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서의 인기가 높아졌다가 얼마 후에는 양국의 상으로 승진한다. 인의주의자답게 효를 중시해 나이 많은 홀아비와 과부를 공경하게 하면서 열녀와 효자를 찾아 표창하도록 했으며, 그의 정치는 교화와 훈계를 숭상하고 관대하게 생각한 이후에 실행했다.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결단력이 있어 병으로 인해 관직을 사임했는데, 백성들은 그의 사임을 아쉬워했다.[1] 나중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 승상군좨주가 되었다가 받은 상은 모두 나누어주거나 전지나 가업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남에게 꿨으며, 의혹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 모두 그의 청렴함에 감복했다.

위나라 건국 초기에는 낭중령, 어사대부가 되어 조조에게 내정 쪽으로 많은 조언을 했으며, 유비가 죽었다는 풍문이 들어오자 모두 다 기뻐했지만 원환만은 예전에 유비를 섬긴 적이 있었으므로 기뻐하지 않았다. 원환은 위나라가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조조도 그의 죽음을 슬퍼해 국가의 법대로 태창에서 1천석을 빼어 원환의 집에 주면서 자신 또한 궁중에 비축해놓은 1천말을 내려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었다.

동생 원민은 원환에 대해 평하길 외모는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대의가 걸린 상황에 직면하고 위난에 처해서는 맹분과 하육과 같은 고대의 용사들도 그보다 더 용감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평했다. 허정과 친하게 지내면서 순심의 아들 순굉과는 의견이 달라 매번 싸웠다고 한다.

그의 후손으로는 원유(袁猷)[2], 원욱(袁勖)[3], 원굉(袁宏)[4] 등이 있다.

2 미디어 믹스

787.jpg
삼국지 11
삼국지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1탄부터 등장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매 순으로 30/17/72/83/83이며 특기 규율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문관이다. 조조 수하라면 가치는 좀 떨어지지만 원술이나 여포군에 소속된 시나리오라면 저 두 세력에 부족한 내정관을 메워주는 소중한 장수다. 덤으로 의리 최고에 야망 최저라 배신도 잘 안 한다.

165년 출생에 225년 사망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조조의 사망년이 220년이므로 명백한 고증오류. 또한 친애무장 설정은 조조와 유비 양쪽 다 없다.
  1. 다만 이 일에 대한 것과 주연의 판결에 대한 일화를 볼 때 윗사람의 명령을 아랫 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작은 죄라도 죽일 수 있다고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2. 원굉의 조부로 동진 때 시중을 지낸 인물이다.
  3. 원굉의 아버지로 동진 때 임여령을 지낸 인물이다.
  4. 자는 언백(彦伯). 원환의 6대손으로 동진 때 건위참군, 안남사마, 기실참군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