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삼국지)

1 삼국시대의 역사가

陳壽 (233년 ~ 297년)

다소 약한 존재감과는 달리, 알고보면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1.1 개요

역사서 ≪삼국지≫의 저자. 는 승조(承祚).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출신.

제갈량 사후에나 제대로 활약한 삼국시대 후반기 인물인데다가, 그나마 그의 행적들도 거의 조명받지 못해서 ≪삼국지연의≫만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진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도 실제로는 진수가 쓴 ≪삼국지≫를 참조하여 쓰여졌기에, 애초에 정사(正史)가 없었다면 삼국시대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지금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에 나온 나관중소설 ≪삼국지연의≫와 구분하기 위해서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는 흔히 ≪정사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후에 생겨난 삼국시대와 연관된 여러 이야기들은, 대부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이하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별다른 상황이 아니면 ≪삼국지≫로 표기한다.

1.2 생애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다. 초주는 진수에게 학문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니 도중에 실패를 겪어도 불행이 아니므로 언행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했다. 촉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자 그 위세와 권력에 대신들은 모두 굽실거렸으나, 진수 홀로 이에 굴복하지 않다가 자주 좌천되거나 파면되었다.[1] 진수는 그 당시 여러모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불효자라고 욕을 먹었다.

촉이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서진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불효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여러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진수의 재주를 아낀 장화의 천거(薦擧)로 진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같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던 이양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악담, 욕설을 주고 받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진수가 진의 관직에 오른 뒤에 이양도 진의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옛 친구인 진수가 그 취직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소인배?

벼슬길에 오르고 제갈량의 글들을 모아 ≪제갈량집(諸葛亮集)≫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역사서 저술에 힘썼다. 또한 삼국시대 때의 여러 역사 기록들을 모아서 ≪삼국지≫를 썼다. 진수는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의 신하였기에 삼국지를 쓸 때 위를 정통으로 썼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촉의 관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촉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며, 오나라가 망하자 오나라 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오의 역사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의 ≪삼국지≫는 당대에 이미 뛰어난 글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한 점이 있었으며, 결국 약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유송(劉宋)의 문제 유의륭은 대장추(大長秋) 배송지를 시켜 주석을 달게 했고, 배송지의 주석은 이후 ≪삼국지연의≫ 창작에 큰 밑거름이 된다.

하후담도 당시 ≪위서(魏書)≫를 지었는데 진수가 쓴 ≪삼국지≫와 비교해 보고 곧 자신의 책을 없애버리고 더 이상 위나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장화는 ≪삼국지≫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기며 "≪진서≫를 편찬하는 일도 맡겨야겠소."라고 진수에게 말했다.[2]

장화가 진수를 중서랑(中書郞)으로 천거하려고 했지만, 순욱은 장화의 정적이었고 진수를 미워하여 이부(吏部)에다가 그를 모함하는 말을하여 외지인 장광군(長廣郡) 태수(太守)로 자리를 옮기게 했는데, 진수는 모친이 연로함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두예가 나서 이를 무마하고 황제에게 다시 천거하니, 상서(尙書)의 상주(上奏)에 관련된 일을 돕는 것이 좋겠다 여겼다. 이리하여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이 걱정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 었기 때문에 또다시 불효자라고 욕을 먹고는 파면당했다. 몇년 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지만 사양했고, 원강(元康) 7년(297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상서랑(尙書郞) 겸 양주(梁州) 대중정(大中正) 범군(范頵) 등의 신하들은 황제에게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한무제가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위독하니 사람을 보내 그의 글들을 모두 거둬야겠다.' 사자(使者)가 그가 남긴 글들을 거두어보니, 내용 중에 봉선[3]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한무제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저희가 보건대, 죽은 치사시어사 진수가 쓴 ≪삼국지≫는 내용 중에 훈계하는 말들이 많고 옛 일의 잘잘못을 명확히 가렸으니 사회의 교화에 유익할 것입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사마상여에 미치지 못하나 정직하고 왜곡 없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니, 이를 모아 기록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황제는 하남윤(河南尹), 낙양현(洛陽縣) 현령에게 명령를 내려, 진수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그의 책을 베끼게 했다.[4]

하마터면 역사속으로 사라질뻔 했던 진수의 ≪삼국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니, 굴곡 많은 인생을 마친 끝에 참으로 옛 스승의 말대로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3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정의, 정이 형제가 위나라에서 굉장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수가 그 자식들에게 "쌀 천 곡[5]을 주신다면 귀하의 아버님들을 위해 훌륭한 전(傳)을 써드리이다." 라고 대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진수는 정의, 정이 형제의 열전을 저술하지 않았다고 한다.[6] 그런데 진수가 태어나기 13년 전(220년)에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정씨 형제와 이들 일족의 남자들을 모두 처형했기에 자손이 남아있을 수 있을수가 있겠냐는 의문점이 있어 이 기록은 신빙성을 의심받는다.[7]

위의 내용에 이어서 <진수전>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壽父為馬謖參軍,謖為諸葛亮所誅,壽父亦坐被髡,諸葛瞻又輕壽。壽為亮立傳,謂亮將略非長,無應敵之才;言瞻惟工書,名過其實。議者以此少之。

(진수의 부친이 마속의 참군(參軍)이었는데, 마속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하고 진수의 부친 또한 연좌되어 곤형[8]을 당했으며,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또한 진수를 경시했다. 진수가 <제갈량전>을 쓰며 평하길, 제갈량은 용병술에는 뛰어나지 않았으니, 적과 맞서는 데 재능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제갈첨은 글씨나 잘 썼을 뿐인데, 실상에 비해 명성이 지나치다고 했다. 이러한 (개인적 원한에 따른) 평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 ≪진서(晉書)≫권 82ㆍ<진수전(陳壽傳)>열전 제 52 출처]

≪진서≫에 나오는 정의 형제와 제갈 부자의 얘기는 각각 지인소설(志人小說)인 ≪어림(語林)≫과 ≪세설신어≫가 출전(出典)이다. 다만,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 ≪진서≫의 기록들은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정사 삼국지 문서에서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 항목도 참조하자.

1.3.1 촉까?

제갈첨과 사이가 나빴다는 설도 있었는데 이런 설들이 생긴 이유는 진수가 기록한 기록에서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전투기의 작가 최훈나관중과 비교하면서 고도의 촉까라는 평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진수가 속했던 시대 상황을 전혀 생각치 않은 근시안적인 평가이며, 진수가 삼국지를 썼을때 그가 진나라의 관리였고 위를 정통으로 썼는데도 촉을 그 정도로 써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촉까라는 말은 절대 못한다. 애초에 촉빠위빠니 하는 한참 후대의 개념을 진수에게 적용하는 게 언어도단이다. 공자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는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하는지 논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각국 군주의 호칭들 위나라는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로 호칭했고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얄짤없이 모두 그냥 이름으로 불렸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이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 더 권위있게 표현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촉나라의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자세히 기록하며 좀 더 비중있게 표현한다. 또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241년)[9]을 끼워넣고 자기가 보충한다던지 극정의 평을 싣는다던지 해서, 촉한의 사람들이 내부에서 촉한의 인물들을 바라봤던 시선을 전하고 촉한 인물등 중 열전을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실었다. 즉 촉까는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에 촉나라 사람이니... 그러나 정작 오나라는 호칭이 없고 이름만 나오니 촉까는 100% 아니지만 고도의 오까아닌가?

可謂識治之良才,管、蕭之亞匹矣。然連年動衆,未能成功,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 만하니, 관중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나 보구나!)
- ≪삼국지≫권 35ㆍ<촉서>ㆍ<제갈량전>출처

진수가 ≪제갈량집≫을 지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가 제갈량까라는 것도 어폐가 있다. 사실 ≪삼국지≫ㆍ<제갈량전>에서 열전 마지막의 평가 부분에 "임기응변은 제갈량의 장기가 아니었다." 라고 하는 부분도 "우리 승상님이 임기응변만 잘했으면 다 이기는 건데..." 하는 식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정사의 제갈량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대신 제갈첨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제갈첨의 것이라고 했다라는 말을 해서 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가 단 주에 따르면 진수가 제갈첨에게 치욕을 받아서 제갈첨에 대해 안좋게 썼다는 의혹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진수는 초주의 제자였는데, 초주는 도참설[10]의 신봉자로 진수 역시 도참설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초주 항목에도 언급되지만, 진수의 기록을 약간 과장하자면 초주는 "울 황제님 이름이 재수가 없어 나라가 망하게 생겼네요. 망하는 건 운명이니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죠."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4 진식의 아들?

진수가 230년에 제갈량에게 처형당한 의 장수인 진식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연의의 명나라 판본에는 진수가 진식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실인 양 퍼졌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식이 처형당했다는 건 ≪삼국지연의≫만의 이야기이며 정사에서 진식은 3차 북벌 때 무도군(武都郡), 음평군(陰平郡)을 공격했다는 걸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아니 애초에 진식이 연의에서 처형당한 시점인 4차 북벌은 그 자체가 연의의 허구다. 실제 제갈량의 북벌은 총 5차례인데 연의에서 6차례로 나오는 이유가 이 창작 4차 북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실제 4차 북벌은 연의의 5차 북벌이다. 설령 진짜 진식이 230년에 죽었다 쳐도 진수는 233년생이다. 즉, 진수는 진식의 아들이 아니다. ≪정사 삼국지≫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가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간혹 평역(評譯)된 ≪삼국지≫에서 나오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비슷한 얘기로 부친이 가정(街亭) 전투에서 패배해 참수당한 마속의 부하였기 때문에 곤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진서≫ㆍ<진수전>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긴 한데, 정사에는 진식이 가정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1.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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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3

당연히(?)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나름 삼국지의 저자라는 걸 강조하는 대사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능력치는 그냥 정치 하나만 봐줄만 하기 때문에 내정에나 써먹을 수 있는 평범한 문관이다.

첫 등장인 삼국지5에서는 진식의 아들로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데 자기네들도 말이 안되는걸 아는지 후기작에서는 부자 관계는 설정되어있지 않다.[11] 근데 능력치는 C-D급이고, 등장하는 시기도 247년이라서 비중은 공기에 가깝다.

삼국지 5에서는 첫 등장이라서 그런지 31/88/79/60의 능력치에 고무, 수습, 내분, 혼란, 진화, 점술의 장수들이 능력이 떨어지는 후기라는 걸 감안하면 꽤 준수한 능력치다. 그런데 갈수록 상향평준화돼 가는 후기작으로 갈수록 능력치가 너프되어 가기 때문에 위의 언급처럼 능력치가 떨어져 보인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15/22/60/75. 혼란은 있지만 지력이 너무 낮다. 내정용으로나 쓰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15/22/60/71/39에 특기는 혼란 단 1개 뿐. 장수별 엔딩 중에 사서 편찬 엔딩이 있는데 이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달성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통일 당시 남아있는 장수의 67% 이상과 관계가 면식 이상, 특기 지리 소유, 지력+정치 100 이상, 사서 1권 이상 보유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진수는 사서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지리 특기가 없기 때문에 그냥은 이 엔딩을 볼 수 없고 계략, 첩보 경험을 올려야 하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발생한다. (계략 경험 600, 첩보 경험 400 이상.) 지리 특기가 보유자가 적긴 한데 활용도가 대단한 특기도 아니고 그냥 특기로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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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나 말입니다.

삼국지 11에서 진수를 참수하면 유언으로 저 대사를 한다. 새로 쓰고 있으니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삼국지 12에선 삭제되었다. PK에서도 끝내 추가되지 않았다. 이보시오 내가 삭제라니! 그럼 누가 삼국지를 기록하지? 스승 초주? 선배 나헌? 아니면 ? 아무리 후반기 무장이라고 하지만...

삼국지 13에서는 다시 등장.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12/22/60/75이다. 전법이 기속강화인데 병기특성은 창/궁병 B, 기병C다, 특기는 문화7, 변설7로 내정용으로 굴리면 적당하다.

삼국지 DS 2[12]에서는 지력이 80에 정치가 78인 군사형인 능력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페셜 무장이라서 얻으려면 조건을 클리어 해야 한다.

생몰년도상의 문제로 보통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이외에는 서브컬처계에서 삼국지를 다룰 때 네임드로 다룰 이유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21세기 작품으로는 SD건담 삼국전에서 진수 자쿠가 등장한 것이 그나마 있는 희귀한 예제 중 하나.

삼국전투기에서는 최훈이 고도의 촉까라고 까고 있다. 삼로 전투(11)에서 상조가 죽은 컷 다음 컷에 삼국지 11의 모습으로 등장. 염소수염에 회색 한푸를 입고있으니 삼국지 11의 모습이 맞다. 그리고 왕쌍이 고자가 될 그 전의 컷이다. 또한 영안 전투(2)에서도 나헌의 공적 중 하나가 진수를 추천하여 진나라에서 중용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하며 다시 등장한다. 그 덕택에 삼국지도 쓰여질 수 있었으니... 다만 작중에서는 진수가 자신이 굳이 없었어도 다른 사람이 삼국지를 썼을 거라고 말하며 겸손하게 반응한다.

2 서진의 인물

秦秀 (?년 ~ ?년)

2.1 개요

서진의 관리로 박사(博士)[13]를 지냈다. 자는 현량(玄良). 진랑의 아들.

2.2 내용

신흥군(新興郡) 운중현(雲中縣) 사람으로 진나라에서 박사를 지내면서 278년에 하증이 죽자 그에 대해 논의하면서 오만하고 사치해 천하에 이름이 있었지만 만약 시호를 주는 규정을 엄격하게 따른다면,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으며 품행이 방탕한 것을 '추(醜)'라 하므로 그에게는 추무공(醜繆公)이라는 시호를 줘야 한다고 혹평했다.

아첨하거나 참소하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해 가충을 가벼이 여겼으며, 279년에 오나라를 공격할 때 가충이 대도독이 되자, 진수는 친한 사람에게 가충은 변변한 재능도 없는 문관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자신은 출진하는 군사들을 울면서 배웅하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춘추시대 때 건숙이 아들이 전쟁나기 전에 패배할 것을 알고 울면서 배웅한 것을 말하며, 그 때와 지금은 달라서 진나라가 오나라의 국경만 도달해도 싸우지 않고도 오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니, 지금 우는 것은 진과 오의 상황을 무시한 처사라면서 진수가 우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

손호왕준에게 투항한 때에 가충은 오나라를 평정할 수 없다면서 증원을 요청했는데, 가충의 증원 요청과 손호의 항복 소식이 낙양으로 동시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가충은 사람들보다 위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혜는 주위 사람보다 아래라면서 모두 진수의 올바름을 인정했다.

280년에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때 왕혼이 왕준을 모함하자 표문을 올려 왕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으며, 282년에 가충이 죽으면서 그의 시호에 대해 논의할 때, 가충은 예법을 위반하고 개인적인 정에 빠져 윤리를 어지럽혔다고 했다. 또한 거나라와 증나라에 대한 관한 일[14]을 예로 들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를 단절시켜 조정에 혼란이 일어났으므로, 가충은 기강과 절도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시호를 황공(荒公)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되었다.

283년에 사마염사마유를 봉국(封國)으로 돌려 보내면서 태상(太常)[15]에게 명령을 내려 사마유에게 하사할 물건을 의논하게 하자 박사 유부, 태숙광, 유돈, 무울, 곽이, 부진 등과 함께 사마유를 봉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마염은 이들이 올린 표(表)를 보고 크게 노하여 상소문을 올린 이들을 처벌하였다. 진수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 났다가 나중에 다시 복직되었다. 진수는 이처럼 강직하여 남들과 자주 충돌했다. 박사를 총 20년 동안 지냈고, 재직 중에 사망했다.
  1. ≪진서≫권 82ㆍ열전 제 52<진수전> : 宦人黃皓專弄威權,大臣皆曲意附之,壽獨不為之屈,由是屢被譴黜。출처
  2. ≪진서≫권 82ㆍ열전 제 52<진수전> : 張華深善之,謂壽曰:"當以《晉書》相付耳。"출처
  3. 封禪 : 고대 중국에서 군주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어 즉위를 고하던 의식.
  4. ≪진서≫권 82ㆍ열전 제 52<진수전> : "昔漢武帝詔曰:'司馬相如病甚,可遣悉取其書。' 使者得其遺書,言封禪事,天子異焉。臣等案:故治書侍御史陳壽作《三國志》,辭多勸誡,明乎得失,有益風化,雖文豔不若相如,而質直過之,願垂採錄。" 於是詔下河南尹、洛陽令,就家寫其書。출처
  5. 斛 : 고대 부피ㆍ무게 단위. 당나라 시기까지는 민간에서 '섬'을 일컫는 속칭으로, 1곡 = 1섬 = 10말 = 120근이었다. 송나라 이후로는 1곡 = 5말로 바뀌어, 2곡 = 1섬이 된다.
  6. ≪진서(晉書)≫ㆍ<진수전(陳壽傳)> : 丁儀、丁廙有盛名於魏,壽謂其子曰:"可覓千斛米見與,當為尊公作佳傳。" 丁不與之,竟不為立傳。출처
  7. ≪삼국지≫권 19ㆍ<위서>ㆍ<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 文帝即王位,誅丁儀、丁廙并其男口。출처
  8. 髡刑 : 고대에 죄인의 머리카락 전부 또는 일부분을 밀어버리는 형벌.
  9. <촉서> 권 15ㆍ<양희전>, 즉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에 전문을 수록하였다.
  10. 圖讖說 :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
  11. 대신 삼국지 11에선 같은 집안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12. 삼국지 4를 닌텐도 게임으로 리메이크한 게임.
  13. 중국 고대 관직 이름. 문헌ㆍ기록 관리, 문서 편찬ㆍ작성, 학문 전수, 후학 양성 등의 일을 맡았다.
  14. 거국에서 후계자를 취했다가 거국의 딸이 증국의 부인이 되면서 그 출신을 세웠다가 거국이 증국을 멸망시켰다.
  15. 중국 고대 관직 이름. 종묘ㆍ사직의 제사, 장례, 의전 등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