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삼국지)

何夔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로 자는 숙룡(叔龍). 하희의 손자. 신장은 8척 3촌에 근엄한 용모를 지녔다고 하며, 오나라에 하제에 비견될 정도로 도적 토벌에는 도가 튼 사람으로 아들로는 하증이 있다.

진군 양하현 출신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과 함께 살면서 효행과 우애로 칭찬받다가 난리가 일어나자 회남으로 피난갔으며, 원술이 그런 그의 소문을 듣고 하기를 초빙하자 이를 거부했지만 원술이 그를 억류한다.

시간이 지나 원술교유와 함께 기양을 공격할 때 하기가 기양 출신인 것을 이용해 그 군을 설득하게 했지만 하기는 이업에게 충고하고는 첨산으로 숨어드니 원술은 자신의 당형 원유의 어머니가 하기의 당고모였기에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계획만 그만둔다.

197년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나 원술의 추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해 오솔길로 몰래 탈출해 198년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조조가 그를 불러 사공연속으로 임명한다. 당시 원술의 군대가 혼란스럽다는 말이 있어 조조가 하기에게 진위 여부를 물어봤을 때 하기는 이에 대해 원술을 욕해주니 조조는 흡족해하며 하기의 재능을 칭찬한다.

문관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조조였던만큼 연속들은 공무에 관한 일로 왕왕 곤장을 맞기도 했는데, 하기만은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죽어도 치욕은 받지 않을 것을 맹세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지 않았다. 뒤이어 조조는 하기를 밖으로 보내 성부의 현령으로 삼았으며, 또 장광태수로 승진시켰다.

그런데 하기가 태수로 임명된 장광군은 산과 바다에 인접한 지역으로 황건적의 난 이래 황건적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걸들은 대부분 조정을 배반했다. 원담은 그대로 관직을 받았으며, 또한 관승이라는 사람이 3천여 명의 대중을 모아 난폭하게 약탈을 저지르니 논의하는 사람들은 병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하기가 스스로 은의를 깨닫게 해야 된다고 하며 군의 승으로 있는 황진을 파견해 그들에게 일이 성공하고 패했을 때의 득실을 설명하게 했는데, 관승 등은 모두 투항을 요청했다. 이렇듯 관승이 투항할 기미가 보이자 하기는 관리 성홍을 보내 교위로 인솔하도록 하고 장광현의 승 등을 시켜 소와 술을 예물로 갖고 교외로 가서 그들을 영접했으며, 귀순한 적장을 군으로 데리고 왔다.

이렇듯 평화롭게 처리한 관승의 경우와는 달리 모평현의 도적 종전의 무리 수천 명은 오히려 장료와 함께 군의 병사를 이끌고 토벌해 평정하고 동모 사람 왕영이 창양현을 협박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관리 왕흠 등에게 계책을 주어 그들을 분산시키도록 하니 과연 10개월만에 모두 평정되는 등 때에 따라서 방식을 달리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 때 조조는 처음으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해 주와 군에 하달하고 조세와 비단을 거둬들이려고 했는데, 하기는 이에 대해 군이 처음 세워지면서 최근에 출병했으므로 갑자기 법령으로 매어둘 수는 없다고 진언하니 조조는 그의 건의에 따르고 하기를 중앙으로 불러 승상의 군사로 참여시켰다.

해적 곽조가 악안과 제남의 경계 지역에서 약탈해 주와 군이 골머리를 썩이자 조조는 하기가 장광에서 도적들을 깔끔하게 토벌한 것을 떠올려 하기를 악안태수로 임명했으며, 여기서도 하기는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여러 성을 모두 평정했다. 하기는 중앙으로 들어가 승상 동조의 연이 되었는데, 이 때 조조에게 관리의 관리에 대해 진언하였고, 조조는 하기의 이 말을 매우 칭찬했다.

213년에 조조가 위공에 임명되어 위나라가 세워지자 하기를 상서복야로 임명하고 217년에 조비가 태자가 되었을 때 양무는 태부가 되고, 하기는 소부가 되어 이 두 사람이 상서동조, 조비와 함께 제후 관속을 선발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렸는데, 양무가 죽은 후에 하기는 양무의 직위도 대신한다.

매월 초하루에 하기가 궁궐로 들어가 조비를 만났을 때 조비는 정식 관복을 입고 예의를 다했으며, 다른 날에는 회견 의식이 없었다. 하기가 태복으로 승진할 때 조비는 그와 이별하려고 재계하고 받들었지만 정작 하기는 갈 의사가 없었으며, 조비는 그런 그에게 편지까지 써가며 그를 초대했지만 하기는 국가에는 변하지 않는 제도가 있다고 해 가지 않으니 이는 하기의 단정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렇듯 단정함과 법을 따르는 곳에서는 나무랄 것 없는 하기였지만 절약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웠으며,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하기를 성양정후로 봉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지만 하기는 질병으로 인해 누차에 걸쳐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구한다. 단지 조비의 싸이코 행위를 보고 옛날에 편지를 보냈는데도 안 간 것 때문에 보복행위를 두려워 안 간 것일지도 조비는 빨리 병 나으라고 조서까지 내리지만 하기의 병은 낫지 않아 오래지 않아 하기는 죽었고,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진수가 기록하길 원패와 함께 널리 명성을 떨치면서 엄격함을 존중했으며, 그 시대의 명사가 되었다고 평했다.

그런데 한국어로는 조사에 해당하는 하기와 겹치기 때문에 다른 열전에서 정보 찾기가 까다로워 이 페이지에는 원환전과 사마지전의 내용만이 기록되어 있다. 발견하는 대로 추가바람.

삼국전투기에서는 엘리트 건달오오고치 사부로로 나와 삼국난담 코너에서 죽기보다 맞기를 더 싫어한 인물로 소개되었다. 참고로 본편에서는 타이틀 컷에 등장한 화에서 생각하고 있는 유엽 옆을 지나가는 모습으로 딱 1컷 나온다. 심지어 대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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