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가와 스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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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스구루(江川 卓)
생년월일1955년 5월 25일
국적일본
출신지후쿠시마현 이와키 시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78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한신 타이거즈(1979)[1]
요미우리 자이언츠(1979~1987)
198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카오 다카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전 프로야구 선수.

2 프로 입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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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ime 고시엔 No.1 투수

고교 시절부터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였다. 최고 150km/h을 상회한다 추정되는 강속구[2]와 각이 큰 커브만으로도 괴물 에가와(怪物江川)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고교 재학 중 노히트 노런 9번, 퍼펙트 게임 2번, 그 당시 고시엔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 경신 등의 기록을 쏟아내며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전 고교 야구의 최강자로 불렸다. 그 중 백미는 1973년 고시엔.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1973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도쿄에 있는 어느 전국구 유명 팀에 가고 싶었던 에가와는 입단을 거부한다. 대학교에 가기 위해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했고, 그래도 에가와는 호세이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생활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통산 47승(대학리그 통산 2위)을 하는 등 여전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대학 4학년인 1977년 다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1순위 지명을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도쿄의 유명 팀에 가고 싶었던 에가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국에서 2년간 있다가 1978년 11월 20일부로 세이부의 지명권이 소멸하자 돌아왔는데...

3 공백의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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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역사상 최고의 스캔들 중 하나

1978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는 1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에가와는 11월 20일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귀국하자마자 요미우리와 접촉해 11월 21일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해 드래프트 규약이 바뀔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는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 중인 자[3]였으나 이것이 범위가 너무 좁다고 판단한 일본야구기구는 1978년 7월 31일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를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 규정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의 적용일은 다음 드래프트 회의 당일부터였다. 즉 새 규정은 에가와가 입단체결을 할 시점에서 아직 적용이 되지 않았고, 에가와는 그 당시 미국에 유학중이었기에 일본의 학교에 재학중인 자가 아닌, 다시 말해 드래프트 번외의 자유신분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요미우리가 덥석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렇지만 스즈키 류지 당시 센트럴리그 회장은 이렇게 되면 드래프트의 실속이 없다라고 판단하여 계약이 무효라고 간주했고, 이에 반발한 요미우리는 다음날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한다. 그리고 에가와는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1순위로 지명된다. 요미우리는 이러면 우리는 독자 리그를 만들겠다요미우리 전가의 보도라는 주장까지 하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일본 프로 야구 기구는 센트럴리그의 결정을 인정하여 드래프트의 효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다만 일본 프로 야구 기구는 일단 한신과 계약을 하고 요미우리로 에가와를 트레이드시키라는 입장이었고, 한신은 이에 반대하다 결국 요미우리의 고바야시 시게루와 맞트레이드하게 된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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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으로 강제 트레이드된 고바야시 시게루와 함께

이 사건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옴에 따라 참의원까지 올라가서 관계자들이 해명해야 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의 주요 특징인 역지명 제도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4 일본프로야구 시절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되었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 1980년의 다승왕, 1981년 다승(20승), 평균자책점, 승률, 탈삼진, 완봉의 5관왕을 하며 MVP를 수상. 이후에도 계속 13~19승 언저리를 달성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정작 사와무라상은 한 번도 타지 못했다. 81년에 탈 수도 있었겠으나, 그 때는 팀 동료인 니시모토 다카시가 수상한다. 위의 공백의 1일 사건으로 인한 안티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한 예.[6]

그렇게 잘 나가고 있다가 1987년, 돌연 은퇴한다. 왜 돌연이냐면, 1987년 성적이 13승 5패 3.51...의 준수한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당연히 깜짝 놀랐고,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에가와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1983년 시즌에 에가와는 어깨 부상을 당한다. 물론 그 해 16승 그 다음해 15승 하면서 잘 나갔지만, 이 어깨 통증은 에가와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것. 은퇴는 87년 봄부터 계획하고 있었고, 신인 때 9승 이후로 한 자리 승수를 올리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결심했다 한다. 87년에는 일단 13승을 거뒀지만, 다음 해는 정말로 어찌 될지 몰랐다고 생각해 은퇴를 결정하였다.

5 기타

1973년 한일 고교 친선경기 때 동대문야구장 (당시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유대성 선수 [7] 에게 홈런을 얻어맞은바 있다. 1980년대 단신으로 에가와가 한국언론에 소개되면 꼭 언급되던 일화이다.

원래는 손가락의 길이 문제로 커브 말고는 별다른 변화구가 없었지만, 85년부터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슬라이더를 고시히카리라 명명하고 던졌다. 그러다 고시히카리 쌀을 진짜로 선물받았고, 이거에 맛들린 에가와는 다음 변화구를 준비하는데, 그것은 바로 머스크 메론... 그래서 메론은 받았을까 못 받았을까

한신 킬러. 한신과의 통산 전적 36승 18패. 이는 그의 통산 승수 135승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8]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의 이름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요미우리 순혈맞나... 하기사 한신서는 뛴 적도 없긴 하지이지만, 정작 요미우리 감독은 절대 승낙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 요미우리가 그렇게 순혈을 따지는 구단이고, 요미우리 감독 한 번 하겠다고 다른 팀은 쳐다도 안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다. 실제 2012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후임 격으로 에가와를 수석 코치로 임명을 시키려 했지만, 에가와는 저 말을 하면서 거절했다.
  1. 공백의 1일 참조
  2. 그 때는 아직 스피드건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을 때라 한다. 스피드건이 도입되고 나서 프로시절의 구속은 153km/h을 기록한 적이 있다.
  3. 사실 이것도 1967년부터 변경된 것이었다. 그 전에는 일본 국적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나 니우라 히사오 입단 당시 요미우리가 한국 국적이라는 허점을 이용해 육성선수로 입단시키자 규정이 바뀐 것.
  4. 여담으로, 이 해 트레이드로 한신에 건너간 고바야시는 22승을 거두고 사와무라상을 차지한다.
  5. '화해', '해후'를 컨셉으로 한 술 광고의 모델로 둘이 선택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2010년 고바야시가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에가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눈물로 젊은 날의 처신에 대해 다시 한번 사죄한 바 있다.
  6. 당시에도 이는 큰 사건이었고, 상식적으로 트리플 크라운+투수 5관왕+리그 MVP가 사와무라상을 못 타는 게 말이 되나... 그 때까지 순수하게 기자단 투표로만 이루어졌던 사와무라상 선정에서 지금의 시상 기준을 정한 계기가 되었다.
  7. 당시 중앙고 재학중, 실업야구 포철에서 활약하다가 1982년 프로야구 출범당시 롯데에 지명되기는 했는데 입단하지는 않은듯. 2000년대 초반 중앙고 감독을 역임했다
  8. 그와 맞트레이드된 고바야시 시게루는 79시즌에는 요미우리에 8승 무패를 거두며 교진킬러로 활약했지만, 그 이후 교진 통산 전적 5승 15패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요미우리의 횡포에 한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데 한신에 재적했던 5년동안의 통산성적은 77승 56패 4세이브, 방어율 3.23의 훌륭한 성적으로 한신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팔꿈치부상으로 32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