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 | |||
센트럴 리그(Central League) | 퍼시픽 리그(Pacific League) | |||
50px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Tokyo Yakult Swallows) | 60px | 요미우리 자이언츠 (Yomiuri Giants) |
65px |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Yokohama DeNA BayStars) | 65px | 주니치 드래곤즈 (Chunichi Dragons) |
55px | 한신 타이거스 (Hanshin Tigers) | 55px | 히로시마 도요 카프 (Hiroshima Toyo Carp) |
과거에 참가했던 팀들 → |
150px | 파일:Uz2TY9v.png |
로고 겸 제 1 마스코트 카프 보야 [1] | 제 2 마스코트 슬라이리[2]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Hiroshima Toyo Carp | |
구단 법인명 | ㈜히로시마 도요 카프 (株式会社広島東洋カープ) |
창단 | 1949년 11월 28일 |
연고지 |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
구단 연고지 변천 | 히로시마 현 (1952~) |
구단명 변천 | 히로시마 카프 (1950~1967)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8~) |
홈 구장 | 히로시마 종합구장 (1950~1957) 히로시마 시민구장 (1958~2008)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히로시마 (2009~) |
2군 구장 | 히로시마 유우 연습장 (1993~) |
모기업 | 마쓰다주식회사[3] |
모기업 변천 | 시민구단(1950~1967) 마쓰다주식회사[4](1968~) |
감독 | 오가타 고이치 (緒方 孝市) |
킷 스폰서 | 미즈노 |
일본시리즈 우승 (3회) | 1979, 1980, 1984 |
센트럴리그 우승 (7회) | 1975, 1979, 1980, 1984, 1986, 1991, 2016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1회) | 2016 |
이니셜 로고 | |
공식 홈페이지 |
1979년,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78-야쿠르트 스왈로즈 |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81-요미우리 자이언츠 |
1984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1983-세이부 라이온즈 |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1985-한신 타이거즈 |
1 개요
히로시마 카프의 상징 붉은색 |
아시아 최초의 시민 프로 구단 [5]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용기를 주기 위해 창단된 팀으로 다른 구단에 비해 시민구단의 성격이 강하다.[6] 그렇기 때문에 당시 전후 히로시마와 관련된 이야기 등에서 주인공이 카프의 팬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7] 히로시마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팀의 컬러가 붉은색이라 팀의 애칭으로 아카헬(
ヘル, 붉은 헬멧) 군단이라 불린다.
팀 명칭인 카프는 잉여 잉어란 뜻으로 히로시마를 흐르는 오타가와(太田川)에 잉어가 많이 서식해서, 그리고 원자폭탄 공격으로 무너졌던 도시를 살리자는 강렬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
の
り(코이노타키노보리)' 즉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에서 유래했다. 한편, 팀명인 '카프(Carp)'는 일본프로야구 팀 중 유일하게 복수형 어미인 '-s'자가 안 붙은 팀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carp' 단어 그 자체는 단수와 복수를 모두 쓸 수 있는 단어라 사실상 복수형태의 단어다. 보통 영어단어 중 수효가 너무나 많아 셀 수 없는 경우에는 단어 자체가 단수와 복수를 모두 쓸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동물의 경우 어류나 군집동물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fish, sheep, cattle, deer 등).[8]
일본프로야구 12개 구단 중 가장 가난한 구단인 현실은 여전하다.[9] 자금력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애초에 경영진이 돈을 쓸 의지 자체가 없는게 문제.
그리고 현 NPB 12개 팀 중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지 가장 오래된 팀이다.(31년) 맨날 우승 못한다고 징징대는 한신 타이거스도 히로시마한텐 딱 1년 밀린다.(30년) 센트럴리그 우승도 1991년이 마지막 우승이었으며 이 역시 6개팀중 제일 오래되었었다.[10] 그러나 2016년, 드디어 25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이제 마지막 리그 우승으로부터 가장 오랜 시간이 지난팀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18년).[11]
2 역사
2.1 창단 초창기 : 안습의 역사
1950년 센트럴리그에 참가한 이후 줄곧 안습함을 내달리고 있었다. 당시 세리그 구단이 7개 구단이었는데[12] 1951년에는 다이요 훼일즈[13]에 합병까지 논의될 정도로 경영난이 심각하였으나[14] 히로시마 시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합병만은 면했다. 그리고 1952년 짝수로 팀을 맞추기 위해 승률 3할 이하 팀을 타 구단과 합병하기로 결정하면서 가뜩이나 시민구단으로 창단돼 재정적 받침이 없었던 히로시마 카프의 존속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팀의 에이스인 하세가와 료헤이가 이끄는 히로시마 카프는 극적으로 3할 승률에 안착,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쇼치쿠 로빈스는 3할 이하로 시즌을 마감하며 다이요 훼일즈와 다이요-쇼치쿠 로빈스라는 이름으로 합병[15], 두 기업이 함께 운영하는 구단이 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자금이 부족한 시민구단인지라 언제나 재정난에 시달렸고 늘 성적은 B클래스(4위~6위)를 맴돌았다. 1967년까지 18년 연속 B클래스는 NPB 사상 두번째 최장 기록이다. 결국 1968년 히로시마 시민들이 단체로 현내 대표 기업인 도요공업(東洋工業, 현재의 마쓰다)에 구단 좀 맡아 달라고 탄원하여 결국 마쓰다가 히로시마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구단주 마쓰다 쓰네지는 새로 감독에 취임한 네모토 리쿠오 에게 "시즌 전패를 해도 좋으니 히로시마의 기틀을 만들어 달라" 고 요청했고 네모토 감독은 오너의 지시를 받들어 팀을 그해 센트럴 리그 3위로 이끌며 창단 후 첫 A클래스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히로시마는 이후 제자리를 찾으며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본격 센트럴 리그 팀들의 맛 좋은 잉어회 또는 구이
2.2 전성기 : 1970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
그래도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둬 고바 타케시 감독이 취임한[16] 1975년, 창단 25년 만에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안습으로 일관하던 구단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빨간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한 것과 히로시마 전성기의 시작이 겹쳤기 때문에 세간에서 히로시마를 아카헬 군단(붉은 헬멧 군단)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6전 2무 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 이 때만 해도 한신 타이거스팬들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일본시리즈 우승 커리어를 야쿠르트에 이어 히로시마에게까지도 추월당할 줄은. 이후로도 고바 감독의 지휘 하에 1979년[17]과 1980년 일본시리즈 에서 킨테츠 버팔로즈를 상대로 2년 연속 4승 3패의 전적으로 대망의 일본 시리즈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콩라인 커리어가 추가되었다.
그 후, 1984년, 9년 전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었던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현재까지는 최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당시 팀을 이끌던 선수들은 타자로는 야마모토 코지, 기누가사 사치오, 타카하시 요시히코 등이 중심이 된 호타준족의 타자들이 있었고, 에나츠 유타카, 키타벳푸 마나부, 장명부, 김기태, 오노 유타카, 츠다 츠네미 등의 투수들이 주축이 되어 활약하였다. 1991년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야마모토 코지 감독의 지휘 아래 리그 우승을 거두며 일본시리즈에 진출, 7차전까지 가며 분투했으나 당시 황금시대에서도 절정을 달리고 있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22년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으로 인한 활황 덕분에 구단이 어느 정도는 돈을 들일 여력이 있었고, 비교적 드래프트가 공정하게 진행되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모자라는 자금력을 우수한 스카우팅과 빡센 훈련으로 메우면서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FA 제도가 실시되고, 신인 드래프트에서 사실상 자유 스카우트나 다름없는 역지명 등 각종 기괴한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자금력이 풍부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같은 팀들에게 극도로 유리해진 리그 환경에서 카프는 선수들에게 투자는 커녕 있는 선수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팜에서 애써 키운 뛰어난 선수들이 FA나 출혈성 트레이드로 줄줄이 유출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1991년의 리그 우승 이후 2012년까지 센트럴리그 우승은 고사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타 구단에 비해 재정이 빈약한 탓에 타 팀에게 주축 선수들을 뺏기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프랜차이즈 출신 미무라 토시유키 감독의 조련 아래 오가타 고이치(우익수)[18]-쇼다 고조(2루수)[19]-노무라 켄지로(유격수)-에토 아키라(3루수)-마에다 토모노리(중견수)-루이스 로페스(1루수)-가네모토 도모아키(좌익수)-니시야마 류지(포수)-투수로 이어지는 핵타선 혹은 붉은 악마 타선[20]이 나름 유명했지만 가와구치-기타벳푸-오노의 노쇠화와 츠다 츠네미의 사망 등으로 겨우 사사오카 신지 한 명만 풀타임으로 버티는 투수진 뎁스가 더욱 얄팍해지면서 우승 기회에서 번번이 투수진 붕괴로 무너지고, 결국 자금난 속에서 이 무시무시한 타선을 유지할 길이 없어 에토 아키라를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내준 것을 시작으로, 후에 가네모토 도모아키, 아라이 타카히로 등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면서 히로시마는 한신의 팜(=2군)이 아니냐는 우스개소리가 생길 정도로 주축 선수들의 전력 유출이 심각했다. 심지어는 앤디 시츠, 네이트 민치, 그렉 라로카, 데니스 사파테 등 우수한 외국인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타 팀으로 빠져나가는 신세를 겪었다!
2.3 암흑기의 재래 : 1998년 ~ 2012년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5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했으며, 게다가 앞으로도 별로 좋아질 건덕지가 안 보였기 때문에 난카이 호크스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팀의 암흑기에 세운 20년 연속 B클래스 기록을 갈아 치울 최유력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타 구단, 특히 한신의 팜 구단이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스타플레이어의 유출이 심각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 앤디 시츠, 아라이 타카히로 등이 모조리 FA로 한신 타이거스로 적을 옮긴건 상당히 유명하다. 거기에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의 메이저리그 진출까지... 정말 꿈도 희망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2013년 CS에서는 멋지게 복수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구로다도 2015년 복귀!
2009년에 오랫동안 써온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뒤로하고 일본 최초의 비대칭 야구장인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으로 옮기고, 유니폼도 새롭게 바꾸면서 이미지 쇄신을 감행하고 있다. 거기에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인 노무라 켄지로가 전격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과거 '붉은 악마 카프'의 재현을 많은 팬들이 바래왔다. 그런데 현실은...
여담으로 2009년 교류전 당시 치바 롯데 마린스와의 막장 경기가 유명한데, 2009년 6월 10일 QVC 마린 필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히로시마의 선발투수 콜비 루이스의 맹활약으로 치바 롯데가 잔루만 11개에 13삼진을 당하며 완봉패(...)를 기록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2:23으로 롯데에게 탈탈 털린 안습한 상황을 연출했다(...) 특히 치바 롯데는 6회말에만 무려 20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1이닝 타자이순 성공, 12안타 4사사구 15타점 15득점을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단일이닝 최다득점 기록을 세웠다. 6회말만 무려 48분이 걸렸을 정도. 그리고 롯데의 3번 타자 오오마츠 쇼이츠는 한 회에 타석에 3번이나 서는 진기록을 세웠다. 6회말 선두타자이자 오오마츠의 바로 앞 타자였던 후쿠우라 카즈야[21]는 도중에 교체되면서 2연타석만 기록.
2.3.1 2011년 시즌
센트럴리그가 전체적으로 혼전양상을 보이면서 시즌 중반까지 이따금(…) 상위권에 올라갔다가 DTD하다를 반복했다. 단 2일이긴 하지만 2위를 기록한 때도 있었고, 올스타전까지 줄곧 3 - 5위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권을 서성대며 히로시마 팬들의 기대를 부풀려 놨지만, 올스타전 이후로 DTD 시전. 결국 또 5위로 끝났다. 2011년도 역시나로 끝나면서 연속 B클래스 기록을 14년으로 연장했다. 난카이-다이에로 이어진 호크스의 B클래스 20년 연속 기록 갱신에 7년 남았다.
2.3.2 2012년 시즌
2012년 시즌에는 7월 경까지 4위를 기록하더니,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원정 경기에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를 3전 전승으로 이기며 3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코앞까지 올라왔다.[22] 그리고 때마침 요코하마도 야쿠르트를 상대로 3전 전승하면서(...)[23], 히로시마는 야쿠르트와 함께 공동 3위로 올라섰다. 그러고 또 며칠 후에는 결국 야쿠르트를 제치고 단독 3위로 등극하였다.
야쿠르트를 1~2게임 차로 앞선 이후로 초기에는 간혹 도로 뒤집히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오히려 굳히기에 들어갔는지 2012년 8월 31일 기준으로 4위 야쿠르트와 2게임 차이로 우위를 유지했다[24]. 그 기세 그대로만 갔으면 연속 B클래스의 기록을 종결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사상 첫 진출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역시 그동안 값싼 선수들 위주로 스카우트를 해온 탓에 선수층이 빈약해서인지, 오랜만에 피를 말리는 포스트시즌 다툼을 하는 바람에 선수들의 경험부족이 드러난 건지 9월 들어 6승 17패로 내팀내를 시전하면서 3위자리를 야쿠르트에게 내주고 2012년에도 포스트시즌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포스트시즌 경쟁팀이던 야쿠르트는 9월 한달에만 16승 8패의 호성적을 거두면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속담만 입증했다. 특히 9월 17~19일 야쿠르트와의 맞대결에서 싹쓸이 3연패를 당한 게 치명타가 됐다.
이 시점에서 비밀번호는 555455565545554를 찍으면서 결국 15자리로... 불행중 다행이라면 한신 타이거스의 DTD력이 상상을 초월한 바람에 4위는 수성하였다. 그것도 무려 4년만에(...). 의외로 비밀번호 찍는동안 6은 한번밖에 안 찍었다. 6위에 워낙 넘사벽의 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2.4 2013년 이후
2.4.1 2013년 시즌
22년만의 가을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2013년 항목으로.
2.4.2 2014년 시즌
암흑기 탈출(?)
히로시마 도요 카프/2014년 항목 참조.
2.4.3 2015년 시즌
강팀으로의 재도약과 히어강의 갈림길
히로시마 도요 카프/2015년 항목 참조.
2.4.4 2016년 시즌
25년만의 리그 우승!!! 그리고 25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
21세기에 들어온 이후 가장 완벽한 카프 아니 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가장 완벽함
카프! 카프! 카프! 히로시마! 히로시마 카프!!
마에다 켄타도 없고 오세라 다이치도 없는데 어떻게? 오세라 다이치는 돌아왔다 근데 불펜
그러나 1986년 이후 30년만에 홈 구장에서 시리즈를 내주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2016년 참고.
3 홈구장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자세한 내용은 항목에.
4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2012년 | 2013년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연 평균 | 1,589,658명 (+0.5%) | 1,565,598명 (-1.5%) | 1,904,781명 (+21.7%) | 2,110,266명 (+10.8%) | 2,157,331명[25] (+0.8%) |
일일 평균 | 22,079명 | 21,744명 | 26,455명 | 29,722명 | 29,963명 [26] |
2014년을 기점으로 관중과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현 시점 센트럴 리그에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와 더불어 가장 빠르게 관중, 팬덤이 늘어나고 있는 구단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홈 구장 뿐만 아니라 원정 경기까지 꽉 채우는 위엄을 보여준다.
2016년 구단 최초로 2년 연속 200만 관중 돌파 달성에 성공했다.
5 팀 컬러
빨개요.
태생적인 자금 부족으로 도쿄에 있는 모 구단처럼 비싼 외국인 선수를 마구 돈지랄을 하면서 데려올 사정도 못 돼서 일찌감치 아예 도미니카 공화국에 야구 아카데미를 차려놓고 현지에서 소년들을 훈련시켜서 등용하려 했다. 이 과정을 거친 선수 중에 가장 성공한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40-40 클럽에 가입한 알폰소 소리아노이다. 물론 소리아노는 일본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고 뉴욕 양키스 입단 후 확 터졌다. 사실 일본에서 제대로 써먹은 선수들은 별로 없다 2013년 시즌 한국프로야구 최악의 먹튀 용병인 에스마일린 카리대 역시 카프 아카데미 출신이며, 일본형 용병을 육성하려는 본래 목표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구단 상황이 저러니 연봉총액도 12개 구단 중 언제나 최하위권. 때문에 FA 영입을 못 하는건 물론, 대어급 신인 선수들이 히로시마 행을 기피하는 상황이 벌어져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크게 재미를 못 본다.[27] 덕분에 훈련이 빡세기로도 유명하다. 그 와중에도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이 매년 하나둘씩 나타난다는 건 스카우팅과 육성의 승리로 볼 수 있는 것이고, 히로시마 팬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구단이 어느정도 투자를 하고는 있다. 일본 용병 투수 중 최고 톱 클래스로 꼽히는 크리스 존슨의 연장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시민구장 시절에는 작은 구장의 이점을 살려 장타력을 강조한 타선이 돋보였다. 그렇다고 발이 느린 것도 아니던게, 팀 레전드인 키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코지, 타카하시 요시히코, 노무라 켄지로, 오가타 고이치, 카네모토 토모아키 등은 리그를 대표하는 호타준족의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 구장에서도 잘 버텨주던 투수진이 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무너지면서 긴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으로 옮긴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되어, 최근 몇년간은 마에다 켄타로 대표되는 투수진이 강한 대신에 타선이 약한 팀으로 팀컬러가 바뀌었다.
하지만 드디어 2016시즌에 호타준족 타선이 부활했다. 1~3번 다나카 코스케, 키쿠치 료스케, 마루 요시히로에 중심타선의 아라이 타카히로, 브래드 엘드레드, 스즈키 세이야가 가세하고, 심지어 하위타순이나 대타, 플래툰 요원으로 나서는 아베 토모히로, 마쓰야마 류헤이, 헥터 루나 등마저 쏠쏠히 활약하며 8번 포수, 9번 투수 자리 빼면 타선에 쉬어갈 곳이 없는 리그 최다 득점 팀이 되었다. 스몰볼 NPB에서 혼자 빅볼 야구하는 히로시마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 함께 교류전 최대의 호구. 퍼시픽리그 팀들만 만나면 맥을 못춰왔다. 2016년 시즌 교류전 시점에서 교류전 통산 성적이 12구단 전체 통틀어 요코하마만이 아래에 있는 11위이며, 통산 승률은 .433에 머물러 있다. 라쿠텐보다 밑이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교류전에서 5할 승률을 넘긴적이 단 3번뿐이며 그동안 교류전 꼴찌도 3번을 했다. 이처럼 교류전에 보이는 약점은 초반에 좋은 기세를 보이다가도 DTD 테크를 타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6 뛰어난 스카우트진
히로시마의 등록 선수 연봉 총액은 18억9791만엔으로 추정된다. 일본프로야구(NPB) 12개 구단 중 9위다. 1위 소프트뱅크(41억7577만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신인 발굴과 육성이 구단 운영의 핵심이 된다. 소노다 도시히코 스카우트 총괄부장은 40년 스카우트 경력에, 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다. 히로시마는 전통적으로 장래성이 뛰어난 고교 야수와 고시엔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투수 확보를 드래프트 우선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2년 연속 리그 5위에 그친 2010년 드래프트부터 방침이 달라졌다.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고교생이 아닌 와세다대 투수 후쿠이 유야를 지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히로시마의 드래프트는 '유망주'보다 '즉시전력감'에 초점이 맞춰졌다. 2011년 드래프트에선 메이지대 에이스 노무라 유스케와 주쿄가쿠엔대의 '판타지스타'였던 기쿠치 료스케를 지명했다. 2012년엔 2016년 최고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투타 만능 고교생 스즈키 세이야를 지명해 올스타급 야수로 키워냈다. 그리고 2013년엔 대학 넘버원 투수인 오세라 다이치, 사회인야구 최고 유격수 다나카 고스케를 뽑았다. 이들은 2016년 히로시마 우승의 든든한 축이 됐다.
우승 멤버 중 2010년 드래프트 이후 지명 선수가 무려 11명이다. 히로시마는 FA나 값비싼 외국인 선수를 고용하기 어려운 팀이다. 적극적으로 젊은 피를 수혈하려 했다. 그렇다고 어린 유망주의 성장을 오랫동안 기다려줄 여유는 모자랐다.
히로시마의 세대 교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지션은 유격수와 중견수, 그리고 우익수다. 다나카 입단 전까지 히로시마의 주전 유격수는 야수진의 캡틴이자 팬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았던 베테랑 소요기 에이신이었다. 히로시마는 소요기의 출장 시간을 줄이면서 다나카에게 성장 기회를 줬다. 2015년부터 주전 유격수로 발돋움한 다나카는 2016년 센트럴리그 최고의 리드 오프 히터로 거듭났다. 아카마츠 마사토와 아마야 소이치로가 경합하던 중견수 자리에는 2013년부터 마루 요시히토가 풀타임으로 자리잡았다. 마루는 센트럴리그 대표 중견수 대열에 합류했다. 무주공산이던 우익수 자리에는 2015부터 가능성을 보여준 스즈키 세이야가 주전 자리를 꿰찼다.
외국인선수인 브레드 엘드레드와 헥터 루나가 주로 기용되는 좌익수와 3루수를 제외한 나머지 6개 포지션의 평균 연령은 28.17세로 젊다. 노장 1루수 아라이 다카히로를 제외하면 26세다.
긴 안목으로 인내심을 가지면서 선수를 지명한 히로시마 스카우트들이다. 히로시마의 스카우트진은 소프트뱅크와 더불어 최근 5년간 가장 고교 유망주 선택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수 발굴과 육성이 중요한 팀에서 유능한 이들이 책임을 맡았다.
7 인기와 팬덤
- 2014년에 발표한 구단인기 순위에서 292만명이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팬이라고 밝혔고, 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889만명), 한신 타이거즈(608만명)에 이어 3위의 기록이다.출처/일본어 원문 하지만 이 두팀의 연고지가 대도시인 점을 감안한다면 팬들의 충성도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히로시마 시의 인구는 119만명, 히로시마 현의 인구는 282만명인데 도요 카프를 응원한다고 밝힌 사람의 수가 히로시마 현 인구보다 많고 히로시마 시의 3배 가까이 되는 셈이다. 2군의 경우에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유우 연습장의 총 입장 관객수가 2만명을 넘어가는데 이는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최고 수준.
- 2015년, 구단 최초 200만 관중에 돌파했다.
- 2016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센트럴 리그에서의 맹 활약에 힘입어 히로시마 지역 시청률이 무려 45%에 육박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25년만의 우승에 히로시마 지역의 TV 중계 시청률은 거의 폭발 수준에 이르렀다. 스포츠닛폰을 비롯한 일본 언론들의 12일 보도에 따르면, 히로시마의 우승이 확정된 10일 요미우리전의 시청률은 히로시마 지역 평균 60.3%를 기록했다. 오후 9시44분부터 9시48분까지의 순간 시청률은 무려 71%에 이르렀다.
- 이렇듯 지방도시 연고 구단이라는 점과 지역밀착형 마케팅, 시민구단으로서의 역사라는 특수성이 더해져서 팬들의 단결력만은 12개 구단 중 최고다. 하지만 이게 꼭 좋은 쪽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를 꼽자면 올스타 투표때만 되면 집단으로 실력행사에 들어가는 팬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미지만 보면 한신이 가장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 한신팬은 아무리 한신의 선수라도 성적이 안좋으면 가차없기 때문에 이런 쪽으로는 욕을 안 먹는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꼽자면 2009년 올스타 투표 마무리 투수 부문에서 방어율 3점대의 나가카와 카츠히로가 투표수에서 임창용의 턱밑까지 쫓아왔던 것. 실제로 마감 3일 전에 나가카와가 블론세이브를 기록하지 않았으면 1위를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28] 이런 무개념한 모습 때문에 2ch에서는 '그렇게 멍청한 놈들이니까 원자폭탄이나 쳐맞지' 하고 욕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도 지역감정 쩔어준다는 대표적인 증거.
-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희망의 상징으로 곧잘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맨발의 겐과 라이트노벨인 메이드 카페 히로시마. 같은 이유로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구 시민구장 터를 들르기도 했다.
- 마쓰다주식회사 다음으로 히로시마 구단의 두번째 큰 스폰서는 놀랍게도 히로시마 어시장이라고 한다. 타팀팬들이나 다른 나라 야구팬들은 이것을 가지고 비꼬기도 하지만 그만큼 지역민들의 충성도는 높다.
자막: 앞으로도 카프조시가 계속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2015시즌 히로시마 도요 카프 홈 관중 성별 조사.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 |
- 2012, 13시즌을 거치며 팀이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개편되었고, 짠돌이 구단 탓에 매년 스타선수들을 유출시키며 약체화가 지속되어 팀에 남은 선수들만 고생하는 모습이 동정심을 자극한데다, 응원 방식이 재밌어서 본인이나 가족, 친척, 친지들 모두 히로시마와는 큰 상관이 없는 수도권 지역의 여성들이 대거 히로시마의 팬이 되었다.[31] 여기에 일본의 유명한 토크쇼에서도 히로시마 카프편이 호평받으며 팬층 확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2013시즌 후반부터 마치 그 동안의 고생이 보답을 받는 듯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21년만에 가을야구 하게되자 하나의 유행이 된 것. 이들이 수도권 지역의 원정경기에 몰려다니기 시작하면서 2013년, 2014년에 도쿄돔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한 팀이 최고의 라이벌 팀도 아니고, 지역 라이벌 팀도 아닌 히로시마가 되는 현상까지 발생했고 예전 같으면 그들만의 리그 수준이었던 요코하마 스타디움과 메이지진구 야구장의 히로시마전 관중동원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들 구장에서 히로시마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좌측 외야 스탠드 쪽에 붉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그게 다 히로시마 팬들이다. 그러나 구단 입장에서는 이들 수도권 지역의 여성 팬들이
경기를 주최하는 수도권 지역 상대팀 영업담당만 신나게 하지구단의 입장수입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지라 이들의 열기를 마쓰다 스타디움의 관중동원으로 연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14년 5월에는 이들 수도권 지역의 여성 카프팬들을 대상으로 신칸센을 전세내서 히로시마 홈 경기단관응원을 기획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JR 도카이가 매우 좋아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의 스쿼트 응원 |
상단/하단 스쿼트 응원 |
- 또한 히로시마의 특이한 응원으로 '스쿼트 응원'이 있다. 선수 응원가는 한 번 부르고 그 다음은 선수 이름을 팬들이 앉았다 일어났다를 번갈아가면서 외치는 것인데 재미있으면서도 멀리서 보면 위엄도 있고
살 빼기에도 효과적이라인기가 많은 응원가다. 올스타전이나 국대경기때 타팀 팬들도 다들 따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 보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순서에 일어나지만, 옆의 상단/하단 응원처럼 나뉠 때도 가끔 있다. 대부분 서서 응원하는 반면 히로시마 서포터즈는 스쿼트 응원을 위해서 공격 때도 앉아있다.
Q: 빨간 모자[32]를 쓰면 눈물을 흘리며 작아지는 것은?A: 연패중인 히로시마 팬[33]
- 팀이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어대던 2000년대 후반[34]에는 히로시마 팬의 10계명이란 것도 나왔었다. 물론 이건 2012년까지의 이야기고 2013년 부터는 잘나가는 팀이다. 그리고 이건 자책성 유머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1. 승패에 연연해하지 말 것. - 어차피 이기고 지는 세상사.2. 남의 FA 선수를 탐내지 마라. - 그들의 리스트에는 히로시마의 H따위는 없다 .
만약 H가 보인다면 그건 모기업이 부자로 소문난 규슈 제일 인기팀이나 우리 최대의 상전의 머릿글자를 잘못 본 것이다.
3. 외국인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도 좋아하지 말 것. - 내년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4. 외국인 선수에 정 주지 말 것. - 잘 하면 다음 시즌에 타팀에서 보게 될 것이고, 못 하면 그 날로 인천행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35]
5. FA를 앞둔 선수는 과감히 버려라. - 그들도 사람이다. 승리 또는 돈, 둘 중에 하나는 갖고 싶어한다.[36]
6.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다. -제구병신나가카와 카츠히로가 올라온 순간부터 상황은 급반전된다.
7. A클래스와 B클래스 사이에는 4차원 공간이 존재한다. - A클래스의 1, 2, 3위는 왕족, 귀족, 성직자 계급이라고 보면 된다.
8. 오늘 누가 안타를 칠 것인가보다 마티 브라운 감독[37]이 언제베이스를 뽑으면서항의할까를 기대하라. - 히로시마의 유일한 세일즈 포인트다.
9. 한신은 우리의 상전. - 그들의 수요는 엄청나다. 원활한 공급만이 우호유지의 생명.[38]
10. 가급적이면 한국프로야구(KBO)와 메이저리그(MLB)로 눈을 돌리자. - 이게 답.[39]
8 모기업 마쓰다와의 관계
마쓰다주식회사 산하 스포츠단 | |||
산프레체 히로시마 (축구) | 50px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구) |
본래 시민구단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성금까지 모으는 정성에도 불구 재정난으로 해체위기에 처한 적도 있고, 고비를 넘긴 이후에도 구단 운영은 계속해서 어려웠다. 결국 1968년, 히로시마 시민들이 히로시마에 본사가 있는 기업 중에서 제일 큰 회사인 도요공업(東洋工業)[41], 즉 현재의 마쓰다주식회사에 구단 좀 맡아달라고 지속적으로 탄원한 결과 일단 마쓰다 자동차가 구단을 맡게 되었다. 이에 팀 이름도 히로시마 카프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때 마쓰다가 돈 없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야구 커뮤니티에 퍼지기도 했으나, 마쓰다 그룹 규모는 한국의 한화 그룹과 비슷하며 현재 일본프로야구팀을 운영하는 기업중에서는 소프트뱅크, 라쿠텐와 더불어 최상위권의 규모를 가진 글로벌 기업이다. 당연히 빅클럽이라 평가받는 한신 전기철도나 요미우리 신문보다도 규모가 크다.
하지만 실제 지분은 마쓰다 자동차의 창업주인 마쓰다 가문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구단주 직 역시 세습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마쓰다 자동차가 기업 활동의 일환으로 야구팀을 운영한다기보다는 마쓰다 가문의 개인적인 소유에 더 가까운 형태. 그래서인지 지분소유와 경영진 파견만 할 뿐, 팀을 유지시키는 수준 이상의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 구단주와 모기업의 기본 방침은 예나 지금이나 야구팀을 해체시키지는 않을테니 크게 적자만 내지 말아라 이다. 구단이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은 여전하다.
이 때문인지 센트럴리그 팀 중에서 연봉이 굉장히 적은 것으로 유명하다. 연봉총액이 매년 꼴찌를 다투며, 10위를 넘긴 적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아끼고 아껴서인지 NPB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함께 운영 흑자를 내는 네 구단 중 하나로 이 두 구단이 도쿄, 오사카라는 일본 굴지의 대도시권을 연고로 한 것을 생각하면 스몰마켓 구단으로서는 눈에 띄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975년부터 꾸준히 흑자를 내오고 있으며[42]흑자경영 자부심 하나 추가요 2015시즌까지 40년 넘게 연속 흑자기록을 세우고 있다. 2015시즌의 경우 구로다 히로키의 복귀등으로 인해 매출 148억 엔, 순이익 7억6,000만 엔이라는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흑자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팀 연봉을 20억 엔 이하로 맞추라는 것은 구단 내부의 오랜 불문율이고, FA가 시행되고 나서도 10년 가까이 팀내 최고 연봉 선수를 2억엔 선에 묶어두는 게 내부 방침이었을 정도다. 만약 팀내 선수가 FA를 선언하면 요구액에 상관없이 그냥 떠나보내는 게 연례행사였고 이 때문에 팀의 간판이던 에토 아키라,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이 FA를 선언했을 때 구단은 잡으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이들이 팀을 떠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팀의 리더격이었던 가네모토의 FA 이적 후에 선수들의 팀에 대한 충성도가 눈에 띄게 낮아지고, 팀의 상징이자 기둥인 마에다 토모노리에 대한 미적지근한 처우에 구단 내외로부터 쏟아지는 비판의 후폭풍을 견디다 못해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급 한두명에 한해서 내부 FA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적당한 수준의 연봉을 제시하는 선에서 머무르고 있다. FA를 선언하는 프랜차이즈 스타급 선수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의 홈 디스카운트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들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될 경우 가차없이 결별하는 것도 변함 없다. 예외적으로 2016년 구로다 히로키는 6억엔을 받으며 일본프로야구 최대 연봉자인데, 이마저도 팀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상징성과 함께 구로다가 가져오는 흥행효과를 감안하면 그만큼을 메꿀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주는거다.그리고 쿠로다는 메이저리그에서 적어도 이것의 4배는 되는 연봉을 받을 기회를 박차고 일본으로 돌아온 거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 노릴만한 수준의 선수라면 '더 높은 곳에 도전하려는 선수의 꿈을 이루어준다'는 미명하에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서 선수를 팔아먹고 포스팅비를 챙겨먹으려는 전략도 여전히 유효하다. 팀의 기둥인 마에다 켄타의 연봉을 감당할 의지조차 없어서 포스팅을 통한 해외 진출을 부추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돈 남아도는 일부 구단 빼고는 다 똑같아서 히로시마만 그런건 아니다.
시민주주 형태의 구단이기는 하지만, 마쓰다 경영진의 입김이 매우 세기 때문에 시민들의 의지는 그다지 반영되지 않고 마쓰다 경영진은 투자를 통한 팀의 성적보다는 적자를 내지 않는 것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최근 젊은 선수들의 분발로 인한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걱정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쓰다 경영진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지만, 히로시마 미디어 관계자에 따르면 오너의 경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미디어는 출입 금지를 당하고, 애초에 지방 구단이라 출입 기자수도 많지 않아 후빨하는 경영에 좋은 평가를 내리는 기사만이 나온다고 한다.[43]
흑자경영에 대한 집착이 보여주는 보다 긍정적인 사례로는 구단 관련 상품이 매우 풍부하다는 것이 있다. 유니폼, 의류, 응원도구는 물론 식품이나 유아용품에 이르기까지 굿즈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기본이고, 사실상 경기 중 모든 사건사고가 경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티셔츠로 만들어질 정도로 상품 개발 및 판매도 매우 신속하다고 한다.(...)
팀성적이 좋아지자 히로시마팬들이 팀컬러가 비슷한 이분들이 인수해달라고 난리다.
9 유니폼
70년대 후반 ~ 80년대 후반 카프 최전성기의 유니폼. 유니폼의 주인공은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
현재의 유니폼. 구 시민구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모델은 당시 투타의 주역이었던 쿠리하라 켄타와 오타케 칸.[44]
팀의 초창기 유니폼은 그 당시 거의 모든 팀이 그랬듯 검정색 위주의 칙칙한 유니폼이었다. 그러나 1975년 카프 최초의 외국인 감독 조 루츠가 '투쟁심의 상징색'으로 빨간 유니폼을 제안했고, 그 이후 카프가 아카헬 돌풍을 일으키면서 팀 컬러로 굳혀졌다.[45] 다만 처음에는 '초등학교 운동회도 아닌데 다 큰 어른이 부끄럽게 빨간 모자를 써야 하냐'는 불평이 잠깐 있기도 했다고 한다. 2004년까지는 유일하게 빨간 모자를 쓴 구단이었으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 빨간 모자를 쓰면서 유이한 팀이 되었다.[46]
유니폼의 경우 원정에는 회색(7~80년대에는 연한 하늘색)과 빨강을 위주로 썼으며, 홈의 경우 흰색과 빨강을 주로 썼다. 그런데 2009년 새 구장으로 옮기면서 유니폼 역시 새로 바꿨는데, 다른 건 괜찮은데 문제는 SK 와이번스 유니폼과 흡사해졌다. 정작 SK 와이번스도 원정 유니폼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얼트 저지와 매우 흡사하다 시민 중심 체제이니만큼 한신 타이거스[47],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4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함께 지역명을 원정 유니폼 전면에 붙이는 몇 안되는 구단이다. 1/3이 몇 안되는 것이었나
2013년에 시원하게 선보인 데님 유니폼.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
2014년에 선보인 특별유니폼. 일명 불닭유니폼
2015년에 선보인 특별유니폼. 작년에 비해 임팩트가 다소 떨어진다.
2016년 특별 유니폼. 왼쪽 가슴에 있는 고추가 특징.
10 대표적인 선수들
10.1 현역(2016년 기준)
10.1.1 투수
- 2016년 드래프트 1순위의 우완투수.
- 현재 카프의 마무리 투수. 형은 세이부의 투수 나카자키 유타.
- 22. 나카무라 쿄헤이
- 23. 야부타 카즈키
- 24. 요코야마 히로키
- 29. 에구사 히로타카
- 30. 이치오카 류지[53]
- 34. 나카타 렌
- 42. 크리스 존슨
- 47. 오노 준페이
- 48. 니시하라 케이타
- 53. 토다 다카야
- 54. 다케우치 히사시
- 57. 나카오시 오스카
10.1.2 포수
- 2군 배터리 코치 겸임.
- 61. 이소무라 요시타카
10.1.3 내야수
- 현재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수비형 2루수로 평가받는다.
10.1.4 외야수
10.2 OB
10.2.1 투수
- 하세가와 료헤이 (1950 - 1963, 감독 1966 - 1967)
- 카프 초기의 에이스. 1952년 "승률 3할 이하 팀 합병 정책" 에 따라 당시 하위권을 찍는 바람에 강제합병 위기에 처한 카프를 다른 팀원들과 분전해 극적으로 승률 3할로 이끈, 카프를 구한 영웅.
- 아니야 소하치 (1964 - 1974, 1980 - 1981)
- 소토코바 요시로 (1965 - 1979)
- 통산 노히트 노런 3회 기록. 일본프로야구 최고 기록이다. 노히트노런 3회 중에는 퍼펙트 게임도 한 게임 들어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기록을 세운 투수도 통산 기록이 131승 136패로 승보다 패가 더 많다. 안습.
- 김기태(재일교포) (1971 - 1976)
- 히로시마 첫 우승의 헹가레를 받은 언더핸드 스로 투수.
- 정밀기계라는 별명답게 정교한 제구력을 가졌던 투수로 9이닝당 볼넷 허용률은 1.90에 불과했고, 홈플레이트 위에 빈 캔 3개를 두고 공 3개로 쓰러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심판이었던 다나카 토시유키(田中俊幸)는 심판 판정에 자주 시비를 걸어오는 투수라 피곤했다는 증언을 했다. 통산 성적 213승 141패, 방어율 3.67. MVP 1회, 사와무라상 2회 등. 현역에서 물러난 지금은 TV 해설, 각종 쇼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 오노 유타카 (1977 - 1998)
- 큰 오노(大野)라 불리며 1970년대 말 ~ 1990년대 중후반을 풍미했던 좌완 에이스. 다르빗슈 유가 등장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2년 연속 시즌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1988, 1989) 투수였다. 이쪽도 선발-마무리 안 가리고 마구 굴려졌으며(148승-138세이브), 커리어의 막바지에 접어든 1997년 시즌에는 42세의 나이로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따내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수코치로는 양상문급...
- 장명부 (1978 - 1982)
- 1979,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주력 투수 중 한 명.
- 에나츠 유타카 (1978 - 1980)
- 에나츠의 21구. 이거 하나로도 그의 히로시마 시절의 설명은 충분하다.
- 병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죽은 비운의 선수.
그리고 카프 구단에겐 돔구장 안 지을 훌륭한 핑계
- 사사오카 신지 (1991 - 2007)
- 138승 - 106세이브를 기록한 카프의 마당쇠. 보직에 상관없이 정상급의 실력을 보여줬으며, 만약
조금 덜 안습한 팀에서 뛰어서선발로만 뛰었다면 통산 200승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 타카하시 켄 (1994 - 2008, 2010)
- 좌완투수로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안습한 투수진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40세가 되는 해인 2009년에 마이너 계약을 통해 뉴욕 메츠에서 잠깐 중간계투로 뛰다가 방출되었고, 다음 해 일본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그는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사첼 페이지, 196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디오메데스 올리보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오랜만에 나온 40대 신인 선수였다. 당연히 이는 메츠 프랜차이즈 최고령 루키 기록이기도 한데, 이 기록의 이전 보유자는 36세의 루키였던 구대성이었다.
- 오타케 칸 (2002 - 2013)
- 2000년대 카프 암흑기의 토종 우완 에이스.
- SK 와이번스의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공헌을 한 외국인 투수 듀오. 원래는 히로시마에서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 사이토 유키 (2006 - 2014)
- 2번 항목 참조.
- 콜비 루이스 (2008 - 2009)
- 브라이언 벌링턴 (2011 - 2014)
10.2.2 포수
- 우에다 토시하루 (1959 - 1961)
- 선수로서는 함량미달이었지만, 이후 지도자로 대성해 한큐 브레이브스 왕조를 이룩한다.
- 현역 시절 당시 준수한 수비력과 트래쉬 토크(일본어로 ささやき戦術)로 이름이 높았으며,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스의 포수 이치카와 카즈마사와 함께 선수와 심판을 농락하는(...) 트릭 플레이로도 이름이 높았다. 은퇴 후 카프의 감독에 부임하기도 했으나 2년 연속 5위만 찍고 사임했다.
- 니시야마 슈지 (1989 - 2002)
10.2.3 내야수
- 카프에서 뛰던 현역 시절 수위타자를 1회 차지했고, 나중에 감독으로서 카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 기누가사 사치오 (1965 - 1987)
- 아래 영구결번 항목 참조.
- 미무라 토시유키 (1967 - 1983, 감독 1994 - 1998)
- 카프의 첫 리그 우승 당시 주전 유격수. 감독으로서는 1990년대 강타선을 육성한 것으로 이름이 높으나, 투수진의 붕괴를 막지 못하면서 20년 비밀번호의 첫 스타트를 끊기도 했다. 2009년 심부전으로 사망.
- 오사나이 타카시(1976 - 1991)
- 코바야카와 다케히코 (1984 - 1996)
- 쇼다 고조 (1985 - 1998)
- 90년대 카프에서 쟁쟁한 강타자들 사이에서도 4번을 맡았던 거포 3루수이자, 히로시마의 주축선수 FA 유출 잔혹사의 시발점.
- 기무라 타쿠야(야구선수) (1995 - 2006)
- 루이스 로페즈 (1996 - 1997, 2000 - 2002)
- 1996, 1997년 2년 연속 센트럴리그 타점왕에 오른 강타자 용병이었다.
-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그 특이한 이름(...)의 외국인 선수 맞다. 한국에서 방출된 뒤 카프에서도 별다른 기대 없이 줏어갔으나,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리는 깜짝 활약을 보이며 2008년 한 해 동안 타선의 구멍을 메꾸는 데 성공한다.
- 신성현 (2009 - 2013)
- 2008년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김무영과 함께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국적자로서는 최초로 일본프로야구 구단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1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고 2013년 말 방출되었으며, 이후 고양 원더스를 거쳐 201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10.2.4 외야수
- 아래 영구결번 항목 참조.
- 짐 라이틀 (1977 - 1982)
- 에이드리안 가렛트 (1977 - 1979)
- 1978년 카프의 외국인 선수로서는 최초로 40홈런을 친 거포 외야수.
- 릭 란셀로티 (1987 - 1988)
-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공갈포 용병. 일본에서의 등록명은 이름을 다르게 읽은 '리차드 란스'였다. 1987년에 39홈런을 치며 홈런왕을 차지했으나, 규정타석 채운 타자 중 꼴찌인 .218[54]의 타율을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2번째의 최저타율 홈런왕 기록을 세웠다[55]. 여담으로 같은 해 수위타자를 차지한 팀 동료 쇼다 고조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무홈런 수위타자였다.(...) 다음 해에는 아예 1할대 타율을 찍는 완벽한 공갈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도중에 퇴출되었다.
- 오가타 고이치 (1987 - 2009, 감독 2015 - )
- 현재 카프의 감독. 두자릿수 홈런의 펀치력과 1996~1998 3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빠른 발을 겸비한 외야수였다.
- 마에다 토모노리 (1990 - 2013)
-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츠야, 사사키 카즈히로, 신조 츠요시등을 배출한 1989년 드래프트 최후의 생존자. 젊었을 적엔 3할 타율, 20-20, 골든글러브급 수비를 가진 정상급의 외야수였으나 아킬레스건 부상만 2번 당하는 등 커리어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통산 .302-.358-.484 OPS .842의 비율스탯에 2119안타, 295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무엇보다 23년간의 현역생활을 모두 카프에서만 보냈다는 점에서 히로시마 암흑기 팬들에게는 구로다 히로키만큼이거나 그 이상으로 존경받았던 선수였다.
- 마티 브라운 (1992 - 1994, 감독 2006 - 2009)
- 화끈한 허슬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외국인 선수였다. 선수 은퇴 후 마이너리그 감독을 맡다가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 성질머리는 어디 안 가서 심판 판정에 베이스를 뽑으며 항의한다는지[56] 하는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감독 시절 성적은 5-5-4-5를 찍으며 비밀번호 연장에 공헌했다.
퇴장당한 경기에서의 승률은 높다
- 가네모토 도모아키 (1992 - 2002)
- 히로시마 시절이었던 2000년 30-30 클럽에 가입했다. 가네모토-오가타-마에다의 외야진은 공수주를 겸비한 당대 일본 최고의 외야진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카네모토 빼면 다들 부상이 많아서
- 시마 시게노부 (1995 - 2011)
- 별명은 레드 고질라. 투수로 입단하였다가 타자로 전향하였다.
10.3 팀 출신 메이저리거
- 로빈슨 체코[57](보스턴 레드삭스 → LA 다저스)
- 알폰소 소리아노[58] (뉴욕 양키스 → 텍사스 레인저스 → 워싱턴 내셔널스 → 시카고 컵스 → 뉴욕 양키스)
- 티모 페레즈[59] (뉴욕 메츠 → 시카고 화이트삭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라몬 라미레즈[60] (뉴욕 메츠)
- 구로다 히로키 (LA 다저스 → 뉴욕 양키스 → 일본 복귀 후 다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콜비 루이스[61] (텍사스 레인저스)
- 타카하시 켄 (뉴욕 메츠)
- 마에다 겐타 (LA 다저스)
어째 출신 메이저리거도 일본인 선수보다 외국인 선수가 더 많다. 안습. 예비 메이저리거들의 멘탈 트레이닝 센터
10.4 영구결번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영구결번 | ||
No. 3 | No. 8 | No. 15 |
기누가사 사치오 | 야마모토 코지 | 쿠로다 히로키 |
3. 기누가사 사치오 : 카네모토 토모아키 이전에 철인이라 일컬어졌던 남자. 2215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루 게릭이 가지고 있던 연속출장기록을 넘긴 기록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이 부문만큼은 기누가사의 기록을 인정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칼 립켄 주니어가 갱신한다. 504홈런, 266도루, 2543안타, 통산타율 .270. 야마모토 코지와 호타준족의 콤비로 히로시마를 이끌었다.
8. 야마모토 코지 : 히로시마 프랜차이즈 최고의 레전드. 일명 미스터 아카헬. 536홈런, 231도루, 2339안타, 통산타율 .290의 강타자였다. 1980년대 카케후 마사유키와 함께 센트럴리그 홈런왕 경쟁을 했고, 시원한 장타력 뿐만 아니라 정상급의 외야수비능력까지 갖춘 선수였다. 현재 명구회 부회장이며, 베이징 올림픽 때 수비주루 코치였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는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5. 쿠로다 히로키 :FA를 포기하고 히로시마에 남았으며, 메이저리그에서도 거액의 제시를 거절하고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히로시마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던 그야말로 미스터 히로시마. 물론 성적 역시 미일통산 203승을 거뒀으며, 승운이 지독하게 없었던 선수임을 감안하면 훨씬 고평가 되어도 될만한 투수였다. 2016년에 팀을 일본시리즈에 진출 시키고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구단에서는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계속 15번을 비워둔것과 같이, 은퇴가 결정 된 일본시리즈 종료 다음날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하였다.
노무라 켄지로의 7번은 봉인된 상태였다가 2012년 시즌이 끝나고 3루수 유망주 도바야시 쇼타가 번호를 물려받았으며, 키타벳푸 마나부의 20번은 2002년까지 영구결번이었다가- ↑ カープ坊や. 과거에는 주니치 드래곤즈, 닛폰햄 파이터즈, 킨테츠 버팔로즈 등 많은 팀들에 '야구 소년'을 모티브로 한 팀 로고나 마스코트 등이 있었으나, 199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히로시마 카프만이 이러한 형태의 팀 로고를 유지하고 있다. 관련 상품 등에도 적극적으로 디자인이 활용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구글에다가 카프 보야 라고 검색하면 이 카프 보야를 마개조한 사진들이 나돌아다닌다(...)
- ↑ 1995년부터 등장한 마스코트로, 세서미 스트리트 제작사가 디자인한 캐릭터이다.
필리 패너틱 같다 - ↑ 실 지분은 마쓰다 기업이 아닌 창업주 일가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 ↑ 구단운영을 맡을 당시의 이름은 도요공업(東洋工業, 동양공업)이었으나 1984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
- ↑ 현재 모기업은 마쓰다이지만 마쓰다 경영진은 적자가 나더라도 구단 경영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시민 구단 성격이 매우 강하다.
- ↑ 당시 일본 축구계는 프로리그 창설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구단이 아시아 최초 시민 프로구단이다. 알비렉스 니가타가 1955년 창단했지만 당시에는 (프로리그도 없었으니) 프로팀도 아니고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닌 친목도모 축구팀이었다. 중동은 어떠냐는 사람도 있지만 중동 역시 프로리그가 없었다. 아시아 최초 프로 축구 리그 출범은 1983년 대한민국 슈퍼리그다.
- ↑ 대표적인 예로 원자폭탄 투하 전후의 히로시마를 그린 맨발의 겐의 등장인물 곤도 류타는 카프의 광적인 팬으로 나온다.
- ↑ 참고로 한국의 경우는 KBO 리그 역사상 단 두팀만이 단수로된 팀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MBC 청룡과 kt wiz이었다. 메이저리그는 30개 팀 전부가 다 팀명이 복수로 되어 있다.
- ↑ 사실 한국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은 넥센 및 NC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모두 대기업이다. 삼성과 KIA(현대자동차)는 그냥 각각 재계 1,2위를 차지하는 쌍두마차. LG, 롯데, SK, kt도 재계순위 10위 안에 들고, 그보다 약간 처지는 두산과 한화 역시 재계순위 20위 안에는 든다. 반대로 일본야구의 모기업은 신문사나 철도회사 자체로는 재계에 명함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고, 한화와 규모가 유사한 마쓰다가 소프트뱅크와 함께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요미우리나 한신처럼 애초에 야구단이 돈을 벌거나, 오릭스처럼 모기업이 금융과 관련된 사업을 하거나, 세이부처럼 구단주가 돈을 쓰거나 하는 곳이 자금력을 발휘하게 되는 셈. 여담으로 세이부는 전 사주 사망 후 여러 곡절을 거쳐 모기업이 분열되었다.
- ↑ 꼴코하마, 베리그라고 놀림받는 요코하마도 98년에 세리그-일본시리즈 우승.
- ↑ 파리그는 오릭스 버팔로즈(20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2001년 마지막 우승을 억지로나마 팀 역사에 대입해도 15년으로 가장 오래 되었다(...)
- ↑ 1950년 양대리그 출범 당시 센트럴리그 팀은 8개 구단이었으나 이듬해 니시닛폰 파이리츠가 퍼시픽리그 소속인 니시테츠 클리퍼스에 합병되어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되면서 7개 구단으로 줄었다.
- ↑ 다이요는 초기에 히로시마에서 가까운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 적을 둔 적이 있었다.
- ↑ 멘발의 겐에 따르면 운용 비용도 부족해서 선수들이 기차표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할 정도였다고.
- ↑ 인수합병이 아니다.
- ↑ 이 해에는 일본 최초의 MLB 출신 감독인 조 루츠가 감독을 맡으며 시작했다. 캠프에서 워렌 스판을 임시 코치로 대동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개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퇴했다. 그래도 특유의 빨간 유니폼을 남겨놓고 갔다.
- ↑ 그 유명한 에나츠의 21구가 벌어졌던 시리즈다. 상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 현재 카프 감독
- ↑ 현재 한화 이글스 코치
- ↑ 70년대 신시내티 레즈의 별명인 빅 레드 머신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이쪽도 붉은 유니폼에 로고 모양이 'C'...
- ↑ 이승엽과 주전 1루수 경쟁을 벌였던 그 선수 맞다.
- ↑ 2012년의 대 요코하마 전적은 무려 15승 6패로, 유독 요코하마에게만 강세였다. 아니 요코하마를 제외한 다른 네 팀에게는 전부 근소한 열세였다. 결국 다른 팀과의 대결에서 패한 부분을 제일 만만한 요코하마전에서 메웠다는 소리.
- ↑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린 홈 경기에서 요코하마는 2012 시즌 첫 3연승과 시리즈 스윕을 해냈다.
장하다 색히들아 - ↑ 다만 2위 주니치 드래곤즈와는 여전히 11게임 차이로, 현저하게 밀리고 있다.
- ↑ 구단 신기록
- ↑ 구단 신기록
- ↑ 때문에 2013년 오프시즌에 대학 투수 최대어로 평가받던 오세라 다이치를 히로시마가 지명했던 일은 카프 팬들에게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 ↑ 나가카와가 1위가 되는데 거부감을 느낀 다른 팀 팬들이 임창용을 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한국말로 번역하면 카프녀.
- ↑ 여담으로 경기장 외야가 붉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저기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홈구장인 메이지진구 야구장이다.
히로시마에서 1000km가 넘고 신칸센 타도 네 시간 넘게 걸리는 동네의 야구장을 정복하는 히로시마 팬덤의 위엄 - ↑ 이들 중에는 본진인 마쓰다 스타디움은 물론 태어나서 히로시마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꽤 있다.
- ↑ 히로시마 유니폼의 모자 색상이다.
- ↑ 원래 정답은 "양초".
한국에서는 "붉은 콘돔을 낀 거시기라 카더라. - ↑ 아래 글에 2006년~2009년까지 감독을 했던 마틴 브라운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나온 유머인듯.
- ↑ 그 대표가 케니 레이번과 마이크 로마노다.
- ↑ 물론 실제로는 다른 팀으로 옮기면 얄짤없이 까인다. 가네모토를 따라 한신 타이거스로 옮겼다가 다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온 아라이 타카히로는 아직도 팬들의 절반은 용서하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지경. 물론 돈을 보고 한신으로 떠나갔다는 것과 더불어 언플을 때려 빡친 팬들을 더 빡돌게 만들기도 했지만 히로시마 복귀과정에서 스스로 연봉을 존나게 후려쳤다는 사실과 2016년 리그우승 1등공신이라서 대부분 팬들은 용서를 했다.
- ↑ 2006년~2009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외국인 감독. 재임기간 동안 성적은 5위-5위-4위-5위. 2010년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을 맡기도 했으나 보기좋게 꼴지했다.
- ↑ 가네모토 도모아키, 아라이 타카히로, 앤디 시츠가 대표격이다.
근데 아라이는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2016년 한신이 카프의 승수를 제대로 공급해주며(...) 카프의 리그 우승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 ↑ 그런데 진짜로 메이저리그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게, 한때 카프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구로다 히로키가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 그리고 그 구로다는 2015 시즌에 금의환향했다!
- ↑ 마에다 토모노리, 마에다 겐타 / 오시마 타카유키 / 시노다 준페이
- ↑ 1938년에 창단한 도요 공업 축구단의 후신인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 ↑ 2009년 기준으로 요미우리는 15억 엔, 한신은 3억 엔, 히로시마는 4억 엔의 흑자를 기록했다.
- ↑ 참고로 한국프로야구는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고 해서 구단 출입이 금지되는 경우는 없다고 박동희가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인터뷰
- ↑ 각각 당시 4번타자와 우완 에이스. 2016년 현재 쿠리하라는 카프에서 방출되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했고, 오타케는 2013시즌 종료 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 ↑ 이 때문인지 유니폼과 모자 로고가 MLB의 신시내티 레즈와 흡사하다. 모자 로고는 누가 봐도 신시내티 표절이긴 하지만, 다들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뺏긴 얘 빼고어차피 미국 내에도 비슷한 로고를 쓰는 다른 팀이 있기도 하다. - ↑ 다만, 라쿠텐의 팀 컬러는 정확히 버건디(Burgundy)로 넥센 히어로즈가 팀 컬러로 쓰는 바로 그 색이다.
- ↑ 여기는 기업명칭이 지역명+사업종류라서.
- ↑ 유니폼 교체와 함께 기업명과 같이 부착.
- ↑ 2005 요미우리 지명을 거부, 와세다대 진학
- ↑ 2014 드래프트 2순위
- ↑ 2014 드래프트 1순위, 신인왕
- ↑ 2014년 FA로 풀리자 MLB 구단의 구애를 뿌리치고 돌아왔다. 금액으로만 따져도 최소한 100억은 벌수있었는데 4억엔만 받고 귀환
- ↑ FA로 이적한 오타케 칸의 보상선수.
- ↑ 114개의 삼진(60사사구)까지 당하며 최다 삼진 역시 기록했다. 그래도 출루율은 타율을 1할 이상 상회하는 .323에 OPS도 .859를 찍었으니 나름 뛰어난 생산력의 타자였다.
- ↑ 최초는 1974년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38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른 클라렌스 존스(.226)였다. 이후 2011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228의 타율로 31홈런을 치며 홈런왕 자리에 올라 이 계보(?)를 이어간다.
- ↑ 베이스만 뽑는게 아니라 가끔 모자를 집어 던질때도 있고 뜬금없이 신발이랑 모자를 벗어 가지런히 홈 플레이트 위에 올려놓는둥 여러가지 기행을 많이 선보였다.
- ↑ 도미니카 카프 아카데미를 거쳐간 선수 중 하나. 1995년 일본에서 평균자책점 2.74, 15승 8패, 166탈삼진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며 1997년 보스턴에 입단하나, 보스턴에서의 2년간 메이저리그 출장은 단 5경기에 불과했다(...). 구단에서도 '미스테리 맨'
사이버투수이라 불리며 먹튀인증을 철저히 했다. - ↑ 역시 도미니카의 히로시마 카프 아카데미 출신으로 선수생활은 일본에서 시작했다. 당시에는 스위치 히터였으며, 1할대 초반을 찍고 퇴출되었다. 퇴출 후 뉴욕 양키스 스카우트에 눈에 들어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갔고, 거기서 포텐셜이 대폭발했다.
- ↑ 이쪽도 역시 카프 아카데미 출신의 도미니카 용병. 96년에서 99년까지 카프에서 뛰며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당시 자국인 선수만으로도 역대급 외야진을 구축했던 카프에서는 기회가 많지 않아 주로 주전 외야수들이 부상당했을 때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미국에서는 저니맨으로 여러 팀들을 오가며 외야 유틸리티, 백업으로 활동했다.
- ↑ 1981년생, 카프 아카데미 출신. 소리아노처럼 일본에서 아주 잠깐 뛴 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뉴욕 양키스 행.
- ↑ 텍사스 레인저스 출신으로 어깨 부상과 부진을 겪으며 일본에 왔다가 강심장을 얻고 슬라이더를 익혀서 빅리그 친정팀으로 돌아가서 대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