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우라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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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니우라 히사오(新浦 壽夫)
생년월일1951년 5월 11일
국적일본
출신지도쿄도 세타가야구
포지션투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67년 육성선수 입단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1968 ~ 1983)
삼성 라이온즈(1984 ~ 1986)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1987 ~ 199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2)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199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8번(1984~1986)
홍승규(1983)김일융(1984~1986)장태수(1987~1988)
1985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최동원(롯데 자이언츠)김시진(삼성 라이온즈)
김일융(삼성 라이온즈)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1 소개

재일교포 출신의 일본과 한국의 전 프로야구 선수. 한국명 김일융(金日融). 도쿄 도 세타가야구 태생.

2 한국에 오기 전의 일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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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 상고 재학 중에 학교를 고시엔 준우승에 올려놓은 경력이 있다. 184cm라는 당시 일본야구계에선 엄청난 큰 키를 가진 강속구 좌투수였기 때문에(당시 일본에선 야구선수가 175cm만 넘어도 큰 키에 속했다) 각구단의 뜨거운 스카웃 표적이 되었다. 제2의 가네다 마사이치가 될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학교를 중퇴하였고, 한국 국적이기 때문에 드래프트에서 제외되지만, 오히려 요미우리가 드래프트 정원 외 자격으로 입단시키면서 일본 야구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이후 드래프트 규약은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라고 변경되었다.

그러나 사실 입단 당시에 어깨부상이 있었고, 16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문에 2년간 공을 일절 잡지않고 2군에서 달리기만 줄창 했다고 한다.(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생각 이었다고.) 1971년에 1군에 승격했고, V9으로 대변되는 요미우리의 리즈 시절이 끝나갈 무렵인 1973년엔 선발 로테이션에 들었다. 위력있는 속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나름 순조로운 성적을 내고 있었으나 1975년에 처음 취임한 나가시마 시게오감독의 시절에는 팀은 최하위를 했고 김일융 역시 2승 11패로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나가시마의 양아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의 신뢰를 받으며 꾸준한 등판기회를 얻으며 컨디션을 추스린 김일융은 1976년부터 1979년까지 202경기에 등판(그 중 45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4년 연속 2자리수 승리와 2자리수 세이브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1977년, 78년엔 2년 연속으로 최우수 방어율과 최다 세이브를 동시에 석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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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들과 함께 오로나민C 광고에 나온 김일융(20초부터 나오는 두번째 CF에서 초록 추리닝을 입고 러닝하는 선수). 첫 번째 CF에서는 장훈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 이후로는 '유리몸의 에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성기때 구원과 선발을 오가며 무리한 등판을 한 까닭에 몸이 망가지며 성적이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3 한국시절

김일융을 아끼던 나가시마 감독이 퇴단한 이 후 부임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은 에가와 스구루를 편애하면서 구위가 떨어진 김일융중간계투로 강등시켰고, 그로 인해 김일융의 팀내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결국 1983년 시즌을 마친 후 나가시마의 권유를 받아들여 요미우리를 떠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OB 베어스도 요미우리 구단주인 쇼리키(요미우리 신문 창업주 쇼리키 마쓰타로의 아들)와 박용곤 구단주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김일융을 영입하려 했지만, 삼성은 요미우리의 실질적인 실력자인 신문사 사장 고바야시(쇼리키의 사위였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결정적으로 이건희 구단주가 나가시마 감독과 친분이 깊었다. 게다가 당시 김일융에 대한 이적료, 계약금, 연봉 합쳐서 물경 5천 5백만엔(당시 환율로 약 2억, 엄청난 금액이다)에 그것도 모자라 덤으로 집과 자동차까지 줬다고한다. 역시 돈성.

결국 삼성의 인맥빨+돈X랄에 밀린 OB는 그 해 창원에 새로 지은 2군용 연습구장을 "니우라(김일융) 데리고 올 돈으로 지었다" 라고 자조하며 니우라구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OB 베어스는 김일융 대신 최일언을 영입하게 된다.

1984년부터 3년간 삼성의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는 힘으로 윽박지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교로 타자를 잡을 수 있는 요령을 배웠다" 라고 밝힌 것과 같이 한국에서의 3년은 자신의 투구 기술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된 기간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빠른 공 보다는 현란한 변화구 위주로 한국 타자들을 농락했고 특히 커브 하나를 던져도 느린 커브, 더 느린 커브, 아주 느린 커브로 세분화시키는 완급조절과 포크볼(1985년 삼성의 베로비치 스프링캠프에서 LA 다저스 에이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로부터 배운 것)을 장착하며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올랐다.

1984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에서 6차전까지 3승을 거뒀다. 최동원도 3승을 거두고 있던 상황이라 롯데와 삼성 둘 중 어느 팀이 우승하더라도 시리즈 4승 투수가 나왔을 상황. 비록 7차전에서 유두열에게 역전 3점홈런을 얻어맞은 흑역사도 있었지만, 1985년에는 25승 6패로 압도적인 성적을 남기고 당대 최강의 원투펀치를 이룬 김시진과 공동 다승왕이 되며 삼성의 전후기 통합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사실 팀내 라이벌 관계가 치열했던 김시진과 김일융의 파국을 방지하려고 김영덕 감독이 일부러 등판 스케줄을 조절하여 둘이 사이좋게 25승을 챙기도록 손을 썼다. 역시 관리야구(...)의 대가. 삼성의 성골 출신 김시진에 비해, 재일교포 출신인 김일융은 실질적인 에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일융은 상대적으로 강팀과의 매치에 더 많이 투입되었고, 김시진은 약팀을 확실히 잡기 위한 경기에 많이 투입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의 투수 운용을 보아도, 롯데가 먼저 1,3,5,7차전에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울 것임을 공언한 상황에서 삼성 김영덕 감독은 김시진을 최동원 출전 경기에 투입하여 에이스로서의 모양새를 살리면서도 이기면 더 좋고 저도 아쉬울 것 없는 버리는 카드로 사용한 반면에 김일융은 최동원이 선발로 나오지 않은 짝수 경기에 투입되어 확실한 승리를 챙겨오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려 하였다. 실제로 6차전까지 김시진이 2패, 김일융이 3승을 거두게 되면서 김영덕 감독의 전략은 주효했다. 마지막 운명의 7차전에 투입된 것도 김일융이었다.

1986년 눈에 띄게 체중이 줄고 설탕에 밥을 비벼먹는 등 괴악할 정도로 단 음식에 집착하는 증세를 보여 일본에 건너가 진단을 받은 결과 당뇨병이었다. 그러나 병이 있다는 사실을 숨긴채 시즌 내내 치료차 한국과 일본을 수차례 왔다갔다 하면서 마운드에 올랐다. 병에 대해 끝끝내 공개를 꺼려해서 한때 김일융이 성병에 걸렸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해 성적은 13승 4패. 김일융이 괴물인지 그 당시의 프로야구 수준이 떨어졌던 건지(...). 하지만 87년 김일용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11승을 거둔 것을 보면 당시 우리 프로야구 수준이 그렇게 낮았다고 말할 수 없다.

현역시절 김일융의 별명은 황금박쥐, 밤의 신사였다. 밤의 신사는 김일융이 유독 야간 경기에 강했고 외모에 걸맞게 매너가 깔끔해서 붙은 별명. 팀내 경쟁자였던 김시진에 대하여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가 우리팀의 진정한 에이스" 라고 추켜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같은 재일동포 였던 장명부와는 매너와 사생활, 심지어 청결함 같은 사소한 것에 있어서 자주 비교되곤 했다.

그러나 한국계임에도 불구하고 조총련계를 제외한 재일교포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한국어를 할 줄 몰랐고 성격도 내성적이었던 탓에 한국에서 생활하던 내내 불편하게 살았다고 한다. 삼성 시절 거의 일본인과 다름없는 그에게 어느정도 차별도 있었던듯 하며, 후에 이에 대에 회고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고.

이미 고등학교 중퇴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일본에 귀화한 데다 김일융 자신도 한국사람이라는 의식이 크게 없었다고. 이쯤 되면 말이 고국이지 외국인 용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일융을 재일동포가 아닌 순수 외국인 신분의 선수로 친다면 역대 최강의 외국인 선발투수 중 한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1] 그래도 김일융이 일본 내 다른 팀의 제의를 뿌리치고 고국에서 한번 뛰어보자는 말에 설득당해 일본에서는 전혀 알아주지 않던 한국으로 이적한 것을 보면 모국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김일융이 1986년 시즌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복귀한 것에는 당뇨병 치료 목적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당뇨 판정을 받고 나서 김일용은 시즌 중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당뇨 치료를 받았었다.

4 한국을 경험하고 난 뒤의 일본 시절

김일융1987년 일본 프로야구로 복귀하게 된다. 이 때 나이가 36세였음에도 일본에선 김일융에 대한 추파가 굉장히 뜨거웠고, 그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다이요 훼일즈가 현금 트레이드로 김일융을 영입하는 데 성공. 삼성은 당시 받은 트레이드 머니 1천만엔(당시 환율로 3200만원)을 경산구장 건축비용에 보탰다. 이게 진짜 니우라구장 아닌가?. 그 해 김일융은 다이요에서 11승을 거두며 컴백상[2]을 수상한다. 1989년에는 13피안타 완봉승의 괴기록을 세우기도. 그러나 하드캐리에도 불구하고 만년 꼴찌 다이요는 구제할 수 없었다



1989년 모습

그러나 지병이었던 당뇨병이 그를 계속 괴롭혔고, 1992년엔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가 시즌 도중 다시 야쿠르트 스왈로즈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지만 몇 경기만에 유니폼을 벗었고 은퇴했다.

5 현재

현재는 FBS 후쿠오카 방송과 도호쿠 방송의 야구 해설자겸 스포츠동아의 일본 주재 통신원이다. 2007년에는 전지훈련에서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일했다. 스포츠 동아에 가끔 객원 통신원으로 기고를 하기도 한다.

6 미디어에서의 김일융

  • 사무라이 자이언츠 - 주인공 방바 방의 2군 선배로 등장하고, 애니메이션 판에서 방바가 한큐와의 시범경기에서 감독대행(...)을 맡을 당시 선발투수로 낙점되었으나, 4회까지 퍼펙트로 막다가 5회에 퍼펙트가 깨진 것을 시작으로 개털린다(...)
  • 신 거인의 별 - 선발 등판할 때마다 잘 던지다가 한번 삐끗하면 개털리는 패턴을 반복하며 나가시마 거인의 꼴찌 추락의 주범(...) 중 하나로 나온다. 은퇴했던 하나가타의 평에 따르면 "소질은 있어보이나 정신력이 약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불암콩콩코믹스 레전드 편에서 가끔 조역으로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최동원 별명 때문에 애니메이션 황금박쥐의 황금박쥐로 패러디된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7.1 일본 시절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71요미우리 자이언츠1958⅓43-2.01432843
197253⅔00-17.18731
19732183⅔33-3.44615378
197426119⅔7612.639654102
19753710821103.33934782
197650197⅓111153.1015683162
1977441361139
(1위)
2.32
(1위)
1046196
197863
(1위)
18915715
(1위)
2.81
(1위)
16080152
197945236⅓151153.4321174223
(1위)
198018693413.78642658
19811458⅓0503.39552044
1982271176604.081194189
19833167⅓3203.21712852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7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25152111204.2615149107
198829160⅓101104.3214769110
198928175813
(1위)
03.3917680130
19904214061023.7912175107
19914753⅓0113.21492242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2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790106.001454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2야쿠르트 스왈로즈1425⅓1307.46331024
통산5922158⅔116123393.4519319081706

7.2 한국 시절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4삼성 라이온즈38222
(4위)
16
(3위)
1032.27
(3위)
19184155
(2위)
198534226
(3위)
25
(1위)[3]
602.7920082107
(4위)
198619138⅔13402.531204760
통산91586⅔542032.53511213322
  1. 장명부는 한 시즌 30승을 찍긴 했지만 그 이후 성적이 곤두박질 쳤고(그래도 장명부는 비록 일본으로 귀화했지만 자신을 통명인 '후쿠시 히로아키'가 아닌 본명인 아키오(明夫)로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고, 부친이 돌아가시면 고향인 충남 아산의 선산에 묻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등 자신이 한국계라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 서툴긴 해도 인터뷰 때마다 가급적 한국어로 말하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다니엘 리오스약쟁이약물 때문에 논외. 게다가 김일융은 3년 내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다. 그나마 비견될수 있는 선수를 곱자면 앤디 밴 헤켄더스틴 니퍼트 정도. 하지만 이 둘도 2010년대 이후에 활동한 선수들이니...
  2. 메이저리그의 컴백상을 모방해 부상 및 질병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 선수에게 주는 특별상. 1974년부터 시상 중인데, MLB와 달리 두드러진 성적을 낸 재기 선수가 없을 경우 수상자가 없는 해도 있다.
  3. 김시진과 함께 공동 1위. KBO 최초의 좌완투수 20승 기록이기도 하다. 토종 좌완 투수는 야생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세우지 못한 대기록. 외국인 좌완투수 중에서는 앤디 밴 헤켄이 2014년에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