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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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디 콜린스(Edward Trowbridge Collins, Sr.)
생몰월일1887년 5월 2일~1951년 3월 25일
국적미국
출신지뉴욕 주 밀러튼
포지션2루수
투타우투좌타
소속 팀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1906~1914)
시카고 화이트삭스(1915~1926)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1927~1930)
1910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도루왕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에디 콜린스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19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도루왕
해리 헤일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에디 콜린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해리 헤일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23,2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도루왕
조지 시슬러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에디 콜린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조니 몬스테일
(시카고 화이트삭스)
191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에디 콜린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없음[1]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에디 콜린스
헌액 연도1939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77.74% (4회)

1 소개

20세기 초중반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던 레전드 2루수로 명예의 전당 멤버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아메리칸 리그 MVP도 수상한[2] 대타자이다.

2 선수시절

1887년 뉴욕 주 밀러튼에서 태어난 콜린스는 어릴때부터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눈에 띄어 1906년 입단했다.하지만 콜린스는 당시 대학에 진학 중이었기 때문에 입단 초에는 별로 뛰지 못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한 1908년,콜린스는 타율 .273 90안타 8도루 40타점을 기록한데에 이어,1909년에는 타율 .347 198안타 63도루 54타점으로 새로운 스타가 나타났음을 알렸다. 다음 해인 1910년에는 타율 .347 188안타 81도루 81타점으로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그 해 애슬레틱스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물리치고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이후에도 콜린스는 프랭크 베이커[3]등과 함께 활약하며 일명 10만 달러 내야진을 구축했다. 이 내야진의 활약으로 애슬레틱스는 월드시리즈 3연패를 할 수 있었다.

1914년에는 타율 .344 181안타 58도루 85타점으로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시즌이 끝난 이후 팀의 재정이 악화됨에 따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다. 화이트삭스에서도 콜린스는 '맨발의 조' 조 잭슨, 에디 '너클스' 시카티 등과 함께 활약하며 화이트삭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1917년에는 리그우승과 동시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던 1920년 콜린스는 블랙삭스 스캔들에 휘말리고 만다. 당시 자신의 연봉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화이트삭스의 몇몇 선수들은 도박사들과 결탁하여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을 했던것이다.[4] 이로 인해 조 잭슨을 비롯한 대부분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제명당했으며, 월드시리즈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콜린스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콜린스는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아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블랙삭스 스캔들이 터진 이후에도 콜린스는 화이트삭스에 계속 남아 선수생활을 했다.1924년부터 화이트삭스의 감독 겸 선수가 된 콜린스는 3년간 감독으로서 174승 160패를 기록했다. 이후 1927년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돌아와 선수 겸 코치로 뛰다가 1930년 은퇴를 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애슬레틱스의 코치로 일하던 콜린스는 193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1947년까지 보스턴의 단장으로 일했다.

콜린스는 1939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4수만에 77.74%의 특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4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레드삭스의 단장직에서 물러난 콜린스는 이후 1951년 3월 25일 세상을 떠났다.향년 64세.

4 여담

  1. 메이저리그는 1911년부터 MVP제도를 만들었다가 1914년 이후 없애버렸다. 아메리칸 리그는 8년 뒤인 1922년(내셔널 리그는 1924년)에 다시 생기게 하였는데 1922년 당시 아메리칸 리그 MVP수상자는 조지 시슬러다.
  2. 상술된대로 1911년부터 생겼는데 1914년까지 단 4번(리그별 1명씩 총 8명)만 시상했으니 당시 선수들로써는 지금보다 더 희귀한 기회의 수상이었다. 1922년에 MVP제도가 부활했으나 에디 콜린스는 당시 30대 중반이었다.
  3. 한자리수 홈런왕이나 15홈런 미만 홈런왕이 난무하던 데드볼 시대에 홈런왕으로 유명하던 인물이다. 홈런 베이커가 별명을 넘어 선수명이 되었으며, 21세기 현재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아직도 그의 등록명을 Home Run Baker로 유지하고 있다. 즉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서 검색창에 프랭크 베이커가 아니라 홈런 베이커라고 쳐야 그의 기록이 나온다
  4. 콜린스는 당시 팀내에서 유일하게 실력대로 연봉을 받는 선수여서 의심을 많이 받지는 않았다. 물론 전에 있던 팀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때는 정규리그때 모습대로 활약했었는데,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해 약간 의심을 받은건 사실이다. 허나 일류선수에게도 단기간의 부진은 흔한 것이라 조작으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이적 직후부터 당시 승부조작 선수들과의 사이도 평소에 좋지 않았던 걸로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