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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 ||
이름 | 한글 | 페르가몬과 페르가몬의 복합층 문화광경 |
영어 | Pergamon and its Multi-Layered Cultural Landscape | |
국가·위치 | 터키 이즈미르도 베르가마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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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14년 | |
등재사유 | (i)[1], (ⅱ)[2], (ⅲ)[3], (ⅳ)[4], (ⅵ)[5] |
1 개요
현 터키 이즈미르 도의 베르가마(Bergama)군에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도시.페르가몬 또는 페르가뭄 (그리스어:Πέργαμος)이라 불렸으며 터키의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아시아쪽 에게 해에서 26km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헬레니즘 때 카이우스 강 북쪽에 자리했던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이기도 하다. 의외로 기독교하고도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한게 요한계시록에 적힌 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 중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
2 역사
2.1 왕국 성립 이전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역사상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크세노폰의 저작물이라고 한다. 크세노폰과 함께 한 그리스 군대가 점령하였으나 다시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는 기록만 나오고 그 외에 별다른 중요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페르가몬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디아도코이 때이다.
2.2 페르가몬 왕국
디아도코이 당시 환관 출신이자, 처음에는 안티고노스의 부하였던 필레타이로스가 안티고노스를 배신하여 리시마코스 밑으로 들어갔다. 안티고노스가 패사한 뒤, 필레타이로스는 리시마코스의 신임을 사 방어가 용이한 이 도시에서 그의 보물을 지키도록 명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정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리시마코스도 배신하였으며,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에게 패하고 죽자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도 곧 비명횡사하고 혼란스러워지자 그 때부터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왔다. 이것이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이다.[6] 필레타이로스는 4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재위하며 페르가몬을 요새화하였으나, 고자라는 문제점이 있었기에 그의 동생인 에우메네스의 아들(즉 조카) 에우메네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7] 에우메네스 1세는 다른 세력들과 연합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를 격파하여 페르가몬의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역시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여 다음 왕위는 5촌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물려받는다. 아탈로스 1세는 새로운 위협인 켈트족의 침략을 물리쳐서 구원자(소테르,σωτήρ)라는 칭호와 함께 정식으로 왕을 칭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왕국으로서의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 때부터 시작한다.
아탈로스 1세는 켈트족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셀레우코스 왕조 및 마케도니아에 맞서 전쟁을 치뤘고 결과적으로 큰 재미는 보지 못했지만 국체를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아탈로스 1세는 40년 넘게 오랫동안 왕위를 지켰는데, 그 동안 지중해 서쪽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전체 기간이 아탈로스 1세의 치세 기간에 포함된다. 전쟁 이후 로마는 그리스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고, 때마침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리포스 5세가 팽창욕을 보이며 주변의 어그로를 끌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아탈로스 1세는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선택이었고 이후 페르가몬은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에 털리는 동안 로마의 동맹국으로 이득을 얻으며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아탈로스 1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에우메네스 2세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페르가몬은 인구가 20만을 넘는 도시로 성장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업적은 페르가몬 도서관을 지은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한때 페르가몬 도서관의 장서 수는 20만을 넘었다고 하며 이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도서관의 최후는 불분명한데, 일설에는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싹 비워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 카더라.(...) 아무튼 남아있는 장서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안습.
에우메네스 2세의 뒤를 이은 왕은 그의 동생인 아탈로스 2세였다. 그의 별칭은 필라델포스, 즉 우애왕이었는데 이는 그가 에우메네스 2세 대신 나라를 지킨 적도 있고 에우메네스 2세가 죽자 형사취수로 그의 왕비와 결혼한 것도 있다. 그는 80세가 넘도록 장수한 편인데 여전히 로마와의 동맹을 잘 유지하였고 아예 로마에 자주 방문했을 정도였다. 그는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 역시 로마 제정시대까지 잘 남아서 신약 성경에 페르가몬과 함께 살짝 등장한다.
아탈로스 2세가 죽자 에우메네스 2세의 아들이 아탈로스 3세로 즉위하였다. 그는 왕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취미생활에 몰두하였다. 후계자도 없었던 그는 죽으면서 분쟁을 우려한 끝에 아예 로마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모두가 그의 생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기에 참칭자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로 로마에 진압당하고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와 폰토스와 카파도키아 등에 의해 분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3 로마 시대와 그 이후
이후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도시로서 성장했지만 에페수스로 중심이 옮겨지면서 쇠퇴를 하기 사작했다.하지만 이후 이 도시를 방문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다시 재흥을 하며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다시 대규모 도서관이 복구되었으며 각종 신전들과 김나지움,극장 및 전차경주장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들어서기에 이른다.히포크라테스이후로 손꼽히는 의학자인 갈레누스(Claudius Galenus) 역시 페르가몬 출신으로 아스클레피온에서 의학을 배웠던 것이 .특히나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을 중심으로 생긴 호화로운 휴양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의술 역시 페르가몬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어 로마제국에서 손꼽히는 의료시설이 있는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으며 한때 20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기도 했으며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소아시아에 있는 7개의 교구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하지만 이러한 영화도 잠시 서기 262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완전히 쇠망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한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의 각축장이 되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2세에 의해 서기 620년경에는 완전히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다.이때 페르가몬은 규모는 작지만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이후 등장한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에도 버텼지만 계속되는 동로마 제국의 쇠락으로 인해 셀주크 제국때에는 이슬람권의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오스만 제국시절에는 사실상 유적만 흔적이 남았던게 이후 무라트 3세에 의해 설화석고 항아리 2점이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로 이송되었고 오스만 제국과 친선을 맺었던 독일 제국의 유적발굴 조사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3 페르가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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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의 박물관 섬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알프레트 메셀과 루트비히 호프만에 의해 설계되었다.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완공된게 내부에는 고대 그리스.로마,이슬람,중동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유적지 현지에서 출토된 그대로 옮겨져, 실제 크기로 재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전시품의 소유권에 관한 법정 논쟁, 특히 오스만 제국의 후신인 터키와의 분쟁이 심하다.[8] 줘놓고 생각해보니 아까움 박물관의 이름이 된 페르가몬 대제단 역시 그리스에서 발굴 후 가져와 재복원 한 것으로 유명하며 로마 제국의 밀레토스 시장문과 우마이야의 요르단 므샤타 궁전의 일부도 마찬가지로 통째로 발굴해 가져온 것. 4대 전시물이 똑같이 뜯어 온 복원품이니... 유적은 통째로 모아서 봐야 제맛입니다. 외국 분들은 그걸 몰라요 독일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박물관이기도 하다.
- 페르가몬 대제단
기원전2세기에 에우메네스2세에 의해 지어진 대제단으로 제단의 주신이 되는 제우스의 이름을 따서 '제우스의 대제단'이라고도 불린다.가로35.64미터(이 중 계단폭이 20미터), 세로33.4미터의 크기의 제단으로 각 면에는 올림푸스 신들과 기가스의 싸움인 기간토마키아의 역동적인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2014년 9월 25일부터 5년간 전시실 리모델링을 위해 전시가 제한될 예정.단, 전시물에 대한 차단시설 설치가 아닌 실내 온도 시스템을 손보는 정도로 리모델링 이후도 전시 자체는 종전과 다름없이 관람자들의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슈타르의 문은 발굴한 유적을 통째로 실어와 1930년까지 10여년간 모사하여 복원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당대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무슨 놀이공원 미니어쳐 같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이는 오히려 고증을 따른 복원으로, 이슈타르의 문과 바벨탑의 상부 신전은 수호의 의미를 가진 푸른색을 내기 위해 도기 기술(!)을 이용하여 짙푸른 색으로 구워 낸 벽돌로 지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 밀레토스 시장문(The market Gate of Miletus)
서기 2세기에 고대 도시인 밀레토스에 지어진 건축물로서 10세기와 11세기에 지진으로 붕괴된 것을 1900대에 발굴하여 박물관에서 재조립하여 전시를 하고 있다.높이는 폭은 30미터, 높이는 16미터의 크기이며 제 2차 세계대전 때 손상을 입은 것을 1950년에 재보수 과정을 거친게 2000~2010년대에 들어서 한번의 재보수 과정을 거쳤다.
- 므샤타 궁전(Mschatta)
요르단에 있던 우마이야 왕조의 겨울궁전인 므샤타 궁전의 일부로 남쪽 부분이 전시되어 있다.칼리프 알 왈리프 2세에 의해 건조되던 중 그의 암살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은체 방치된것으로 (이후 지진의 피해를 입었다) 오스만 제국 시절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에게 우호의 표시로 선물로 기증한 유적.
4 기타
역시나 당시에 대도서관으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가 위치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하게 되는게 이 것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양피지의 발명지가 페르가몬이라는 설이 있다.물론 어디까지나 널리 전해진 이야기일뿐 이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현재 이 유적이 위치한 베르가마군은 질좋은 카페트 생산지로 유명하다. 킬림(kilim)이라는 보풀이 없는 평직 카페트를 짜는데 특유의 노란색은 담배잎을 이용해 염색한 것이라 한다.- ↑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 ↑ 필레타이로스의 아버지 이름이 아탈로스였다.
- ↑ 이름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하였던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와의 연관성이 의심된 바 있으나 증거는 없다. 아무래도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가 궁정일지라는 기록을 남겼고 페르가몬 왕국이 도서관 장서로 유명하다 보니 의심할 만도 하다.
- ↑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이 관계가 좋을 때 마구 가져왔다고 한다.아래 므샤타 유적은 선물로 받은 유적.사실상 4대 전시물 모두 오스만 제국의 정부가 반출을 허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