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스 피게로아

54E.jpg
(전성기 시절)

g_elias_300.jpg
(최근 모습)

이름엘리아스 리카르도 피게로아 브란데르
(Elías Ricardo Figueroa Brander)
생년월일1946년 10월 25일
국적칠레
출신지발파라이소
포지션수비수
신체조건186cm
선수 경력산티아고 원더러스(1964-1976)
우니온 라 칼레라(임대)(1964)
CA 페냐롤(1967-1972)
SC 인테르나시오나우(1972-76)
CD 팔레스티노(1977-1980)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1981)
콜로콜로(1981-1982)
지도자CD 팔레스티노(1994-1995)
SC 인테르나시오나우(1996)
국가대표47경기, 2골
"이 영역은 나의 집이며, 누가 들어올 것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엘리아스 피게로아

1 소개

Don Elias

La Muralla Roja[1]

칠레 축구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며 역대 최고의 수비수를 꼽을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와 함께 남미 역대 최고의 수비수 자리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관계이다. 그와 비교했을 때, 수비력 만큼은 피게로아가 더 우세하다는 평. 자신이 속해있던 모든 클럽에서 주장직을 할 정도로 리더쉽이 있는 선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엘리아스 피게로아는 경기를 읽는 눈이 축구사에 손꼽힐 정도로 좋았던 선수였다. 그야말로 사기적인 수준이었고, 이 때문에 상대팀의 공격을 쉽게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또 경기를 읽는 눈, 시야가 좋았던 만큼 팀의 역습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고, 빠른 역습을 짧은 패스로 전개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난 선수였다.

독일의 프란츠 베켄바우어하고도 자주 비견됐는데, 베켄바우어는 롱패스나 대담한 킬패스 등으로 한 번에 상대를 무력화시키는데 능했다면, 피게로아는 짧은 패스에 의한 안정적인 빌드업에 능했다. 피게로아는 3선에 위치해 있을 때도 많았는데, 이 자리에서 공격을 끊거나 공을 소유하면서 공격을 이끌어가는 플레이가 아주 일품이었다고 한다. 테크닉도 S급이여서,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뛸 당시에도 브라질 선수들이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우수한 하드웨어를 지녔고, 여기에 점프력과 제공권 능력이 좋았으며 1대1 능력까지 굇수 수준이었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운 수비수였다. 그렇다고 거친 선수였는가? 피게로아는 커리어 내내 퇴장이 단 1번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매우 깔끔한 수비를 펼쳤으며 흥분해서 퇴장 당한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3 클럽

1964년 임대로 간 우니온 라 칼레라에서 데뷔를 했다. 임대에서 복귀한 피게로아는 곧바로 산티아고 원더러스의 핵심 선수가 되었으며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된다.

1967년에는 우루과이의 명문 클럽인 CA 페냐롤로 이적한다. 피게로아는 페냐롤에서 5시즌간 활약했고 리그 우승 2회를 비롯해 6회의 우승을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피게로아는 우루과이 올해의 선수상을 무려 3번씩이나 수상했다. 그것도 중앙 수비수가.

1972년 피게로아는 레알 마드리드의 오퍼를 거절하고 페냐롤을 떠나 브라질의 강호 SC 인테르나시오나우에 입성하는데, 최전성기를 맞은 피게로아는 브라질 리그를 개발살 내버리는 수준이었다. 이 당시의 브라질 리그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주 리그, 전국 리그. 총 2개의 리그가 병행되는 형식이었다.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뛴 5년간 주 리그는 5년 연속 우승했고 그 중 1974년에는 18전 18승. 전승 우승이라는 대업적을 이룩하기도 했다. 전국 리그에서는 1975, 1976년. 2회 우승했다. 이 와중에 피게로아는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올해의 남미 수비수 6연패를 비롯해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올해의 세계 수비수 4연패를 하는 등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인정받았다. 그뿐이랴 리그 MVP까지 4연패, 남미 올해의 선수상도 3연패를 달성했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 아저씨, 수비수다.

1977년에는 칠레 리그의 CD 팔레스티노로 전격 이적한다. 팔레스티노라는 팀은 50년대 잠깐 타이틀을 차지한 것 이외에는 우승과는 거리가 먼 중위권의 팀이었는데, 피게로아가 뛰던 4년간 리그와 컵대회에서 각각 1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피게로아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

1981년에는 게르트 뮐러, 고든 뱅크스등이 활약했던 미국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로 이적했으나 얼마안가 자국의 콜로콜로로 이적했고 1982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4 국가대표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총 47경기에 나서 2골을 기록했다. 66년 월드컵, 74년 월드컵, 82년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1979년 코파 아메리카에도 참가했다.

만 19세의 나이로 참가한 66년 월드컵에서부터 피게로아는 이미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분류되었다.소련, 북한, 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는데, 1무 2패로 탈락했다.

1974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페루, 베네수엘라와 한 조가 되었던 칠레는 베네수엘라의 기권으로 인해 페루와 경기만 했고 2-0으로 1승 1패씩 주고받은 상황에서 우루과이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인 결과 칠레가 페루에 승리하는 것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여기서는 소련과 맞붙었는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비긴 가운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로 인한 정세 불안으로 소련 선수들이 2차전을 칠레에서 치루는 것을 거부, 실격 처리되어 칠레가 어부지리로 올라갔다.

그렇게 참가한 1974년 월드컵, 전성기의 피게로아는 최선을 다했으나 칠레는 사실상 카스젤리 정도를 제외하면 피게로아의 원맨팀에 가까운 팀이었다. 호주, 동독, 서독과 한 조가 되었던 칠레는 피게로아를 중심으로 탄탄한 수비를 보여주었으나 공격수들의 연이은 삽질로 2무 1패. 조 3위로 광탈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칠레의 실점인데, 대회 우승팀인 서독을 상대로 단 1실점 밖에 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는 2실점 밖에 하지 않았다. 문제는 3경기에서 1골 만을 기록한 공격진이었다.

197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피게로아는 칠레의 주장으로 팀의 준우승을 이끌어내었고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칠레 축구협회 간부들이 이를 만류했고 피게로아의 은퇴는 없던 일로 되었다.

피게로아는 마지막으로 1982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은퇴 직전의 피게로아가 팀의 핵심인 것이 82년 칠레 대표팀의 현실이었고 칠레는 3전 3패로 광탈했다. 영광스러운 은퇴를 할 수 있었던 피게로아는 그렇게 허망한 결과를 받아들고 은퇴했다.

5 피게로아에 대한 말.말.말

"피게로아는 칠레 축구사상 최고의 선수이다. 어쩌면 그는 남미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일지도 모르겠다."

펠레

"나는 유럽의 피게로아일 뿐이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나는 피게로아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 말하는데 이견이 없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페헤이라(1970년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 주장)

"피게로아는 내가 본 최고의 수비수이다."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78년 월드컵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

  1. 직역하자면 붉은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