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과학사학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중세 과학과 근대 초 과학 사이 관계에 대한 논쟁.
과학철학자 피에르 뒤엠에 의해 중세 과학이 재평가 받기 시작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으며, 앨리스테어 크롬비가 과학 혁명은 중세 과학의 실험적이고 수학적 방법이 성장하면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논쟁이 격화되었다.
2 논쟁 이전의 중세 과학에 대한 평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세는 암흑기라는 지극히 전통적인 평가이다.
이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며, 근대 과학은 이 고대 과학을 계승한 적자라는 표현을 통해 중세의 과학에 대해서 총체적 퇴보라는 악평을 내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논에서 중세는 과학의 불임의 시대과학이 고자라니라는 혹평을 하였으며 볼테르는 중세의 특징을 총체적 쇠퇴와 퇴보라는 평을 내렸다. 볼테르와 동시대인인 콩도르세는 그의 입장을 계승하여, 이런 중세 과학의 특징은 중세 교회의 탓이며, 로마 말의 기독교의 승리는 철학과 과학의 총체적 쇠퇴를 향한 신호탄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르네상스 개념의 창시자인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이러한 중세 암흑기라는 전통적 관점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로 간주하였다. 중세를 귀납추론과 자유로운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시기로 이해하며, 근대과학의 기원을 고대인들의 업적의 재발견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들은 중세시기의 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으로 인해 재생산되어왔다.
3 중세 과학의 재평가와 논쟁의 시작
중세 과학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첫번째는 과학사학 항목에서도 다루고 있듯,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사를 현대 과학으로 진보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 본 관점에서 벗어나, 중세 과학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는 과학사가들이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뒤엠의 주장이다. 뒤엠은 통계학의 기원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중세 수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을 발견했다. 뒤엠이 생각하기에 이들의 작업은 근대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요, 갈릴레오 갈릴레이 및 그의 동시대인들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의 일부를 예비한 것이었다. 그는 중세 과학을 연구한 것을 토대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근현대가 정당한 근거에서 자랑하는 역학과 물리학은 중세 대학의 심장부에서 나온 학설들이 일련의 연속적 개선을 거쳐서 발전한 것이다.
뒤엠의 주장은 연속성 논쟁을 불붙였으며 논쟁은 20세기 내내 이어졌다. 영향력 있는 중세 연구자인 찰스 호머 해스킨스나 린 손다이크가 뒤엠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앨리제 마이어는 중세의 원전을 해석하고 뒤엠보다 치밀하고 신중하게 중세 자연철학을 분석했다. 그녀 역시 개념 면에서든 방법론 면에서든, 중세과학은 근현대 과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전반까지 연속성 논쟁은 그나마 조용하게 진행됐지만, 앨리스테어 크롬비 이후로는 논쟁이 한층 가열되었다. 크롬비는 "17세기 과학혁명을 촉발한 것은 13~14세기에 진행된 실험적, 수험적 방법의 성장"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역사가 알렉상드르 코이레는 이에 반박했다. 그는 근현대 과학의 기원을 요약정리할 때, 방법론이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과학혁명은 중세과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말했다. 에르넌 맥멀린 또한 크롬비의 주장에 반박하며 중세과학과 근대과학 사이에 개념적&언어적 연속성이 폭넓게 존재함은 인정했지만 방법론상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